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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135호] 연구 / 세미나 - 영성과 치유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2015년 공동학술대회 <현대사회에서의 치유와 행복>

 

 

영성과 치유

 

 

 

박병준 _ 국제인문학부 철학전공 교수/철학연구소장


 

인간 본성으로서의 ‘영성’

 

 오늘날‘영성’만큼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는 상징어도 없을 것이다. 영성은 어원적으로‘초월’과‘내재’를 포괄하는 중층적 의미를 지닌 매우 심오한 개념으로서 대체로 신화나 종교학의 상징적 전유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제 영성은 종교에 국한된 상징어로 이해되기보다는 철학적 통찰이 요구되는 인간 본성의 주요개념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심연’으로서의 인간은 본성적으로 끊임없이 자기규정을 넘어서는‘초월의 존재’이며, 이러한 심연과 초월성을 포섭하는 전인적 이해의 단초를 제공하는 핵심 개념이 바로‘영성’이다. 이러한 영성은 어떠한 경우에도 배타적인 신비 속으로 자기를 감추는 비현실적 개념이 아니라 자신과 관계하며, 또한 자기를 타자와 관계시키는 정신의 본질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성은 부정이 아닌 긍정, 절망이 아닌 희망, 불행이 아닌 행복에로 끊임없이 자기를 넘어선다는 점에서 철학상담에서 요구하는‘치유’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철학상담에서 상정하는 내담자의 자기치유의 가능성에 대한 이론적 근거와 정당성을 초월로서의 영성에서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치유와 연관된 영성, 즉‘영성 치유’는 인격의 성숙과 의식의 확장을 지향하며, 정서적 체험을 불러일으키는 데 관심을 두며, 대상과의 관계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현재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인‘인문 치유’와‘마음 치유’를 포섭하는 상위의 심화된 형태의 치유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영성은 정신적 존재인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의 근본 본성인 초월성에 근거하여 자연적이면서도 동시에 초자연적인 실재에 대한 갈망을 배재하지 않으면서 궁극적인 의미와 가치를 지향하고 추구하게 함으로써 통합적이며 전인적인 삶에로 나아가도록 돕는‘힘’으로 작용한다. 영성은 어원적으로 영혼과 관련하여 생명의 원리로서, 특히‘지성혼’과 관련하여 사물의 이치를 분별하는 로고스의 원리로서 이해되지만, 내용적으로는 무엇보다도 정신의 초월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영성의 본질을‘생명’, ‘로고스’, ‘초월’의 원리로 규정하고, 이를 현대적 사유 안에서 이해 가능한 방법으로 모색해 보는 것이 이 글의 주된 핵심이다.

 

실존적‘물음’으로 향하는 감성, 이성, 그리고 ‘영성’


 초월로서의 영성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음을 던지게 하는 지속적인 힘이며, 자신이 마주한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자 삶의 부정적인 경험들을 극복하게 함으로써 통합적이며 전인적인 삶에로 나아가도록 돕는 치유의 힘이다. 물음은 근본적으로 존재에로 향해 있으면서 우리를 절대적인 존재 의미에로 이끌어주며, ‘허무’가 아닌‘존재’에로, ‘존재 부정’이 아닌‘존재 긍정’에로, 그리고‘무의미’가 아닌‘의미’에로 우리를 초대한다. 이제 물음 속에 있는 인간의 영성 자체가 바로 인간에 대한 전인적 이해의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감성, 이성 그리고 영성을‘물음’과 연결시켜 논의를 확장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영성의 차원에서 감성은 인간의 삶에 의미 있는 물음을 던지는 주요한 단초가 된다. 실존철학에서 보듯이 인간의 영성적 물음은 사실 감성적인 것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죽음과 허무, 무의미와 부조리, 불안과 두려움 등 실존적 상황에서 느끼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들은 단지 지양되고 제거되어야할 부정적 요소이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을 근본적인 영성적 물음에로 이끌어주는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한다. 우리는 고통과 불안이 가져오는 실존적 물음의 긍정적 의미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이 실제로 실존적 물음을 던지는 순간은 고통과 상처 그리고 좌절과 두려움에로 내몰린 한계 상황이라는 점에서 감성은 물음을 촉발하는 주요 계기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감성이 물음을 촉발하고는 있으나, 감성에서 촉발된 물음은 아직 그 의미가 분명하고 명확하게 주제화 되어있지 않다. 물음의 방향 설정은 감성 보다는 오히려 이성에 의해 주도되어야 할 필요성이 여기서 제기된다. 감정에 내몰린 마음의 상태를 이해하고 그것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감성 자체가 아닌 이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적 사유는 항상 말 혹은 언어를 매개로 물음의 수행 원리로서 작용하지만, 물음의 수행 원리로서의 이성의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 이성의 한계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비로소 이성을 넘어선 영성의 단계로 도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파스칼은『팡세』에서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고, 진리 인식의 길이 오로지 이성에만 있지 않고 인간의 영적 직감에 있다는 사실을 통찰한 바 있다. 인간의 삶에는 무조건적인 헌신과 희생, 봉헌과 사랑과 같은, 영성 없이 오로지 이성의 합리성만으로는 온전히 이해될 수 없는 숭고한 절대적 가치와 의미들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 절대적 의미를 갖고 다가오는 이런 숭고한 가치들에 대한 물음은 이성의 차원을 넘어선 영성적 물음을 통해서만 그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물음의 무한성이 제시하는 존재 의미 - 전인적 치유로서의 ‘영성’

 

 

 

 인간의 물음이 끊임없이 수행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물음의 초월적 성격을 규정해 주고 있으며, 그 초월성 안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성적인 것에로 정향되어 있다. 물음의 무한한 지평 안에서 인간은 절대적이고 궁극적이며 최종적인 것과 조우하게 되며, 바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영성인 것이다. 인간의 진정한 영성은 중단 없는 물음과 함께 하는 ‘정신’에 있다. 인간의 정신의 초월성은 인간이 물음의 실행을 통해 유한한 존재로서 자기를 인식하는 가운데 그런 유한성을 넘어 묻게 되는 물음의 무한한 가능성에서 주어진다. 이성을 압도해 오는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 인간은 불안하여 자주 절망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자기 자신의 실존적 본래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이와 정면으로 대면해야만 한다. 이성을 압도해 오는 사태 앞에서 인간의 정신이 전체 의미 안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포착하는 그 순간 영성은 드러난다. 인간의 이런 영성은 무엇보다도 무한성과 절대성을 자기 안에 함축적으로 지시하고 있는 물음 자체에서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인간은 정신의 끊임없는 물음 실행을 통해 내적으로 초월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것과 조우하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이며 무제약적인 절대적인 존재 지평에서 수행되는 물음으로부터 궁극적으로 존재 의미가 밝혀지며, 바로 여기서 인간의 삶에 활력과 생명을 불어넣는‘치유’를 가능케 하는‘존재 긍정’과‘존재 강화’로서의 존재 이해가 일어난다.


 여기서 인간의 정신의 근본 작용인 감성과 이성과 영성이 인간의 치유의 통합적인 내적 원리로 작용하는 철학상담의 방법론을 감성, 이성, 영성의 차원의 ‘3단계 영성 치유’ 방법으로서 ‘전인적 영성 치유’로 명명한다. 이 방법은 인간 본성의 세 원리, 즉 감성, 이성, 영성의 통합적 적용을 통한 인격의 전인적 치유를 목표로 한다. 이는 문제에 직면한 인간이 감성적 물음을 통해 문제의식을 촉발하고, 이를 분별하는 이성적 통찰의 물음 수행과 궁극적인 의미를 좇아 끊임없는 자기 초월을 통해 물음을 지속시키는 영성의 도움 없이는 온전한 치유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겪는 마음의 상처는 정서적 차원의 공감만으로 혹은 사물의 이치를 분별하고 인식하는 이성의 힘만으로 온전한 치유가 이루어질 수 없다. 나의 경험 일체는 그것이 내 영혼에 생채기를 내는 부정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엄연히 나의 일부요 내가 평생 감당해야할 몫이다. 이런 부정적인 경험들로부터 오는 마음의 깊은 상처들은 단순한 감정의 순화나 이성적 통찰의 대화만으로는 온전한 치유가 이루어지기 힘들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기를 전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존재 긍정으로서의 영적인 힘이 요구된다.


전인적 영성 치유로의 초대 - 영성 치유의 3단계


 영성 치유의 첫 단계는 감성을 통한 영성적 물음의 촉발 단계로서 이 단계에서는 감정이 어디로 흐르는지 살펴서 왜 그런 감정에 처해 있는지 그 물음을 촉발하고, 또 감정의 순화를 거쳐 이성적 사유에로 나갈 수 있는 내적인 역량을 키우는 단계이다. 이는 상처받는 자가 자신의 감정에 함몰되기보다 감정으로부터 빠져나와 감정과 대면함으로써 자신의 내적 상태를 살필 수 있는 용기를 얻는 단계이다. 그래서 이 단계는 궁극적으로 의미 발견과 의미 부여에로 이끌어주는 실존적 상황과 직결된 물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유한한 자신의 한계 앞에서 감성이 자극하는 물음은 한계 상황에 맞선 지극히 실존적인 물음일 수밖에 없다. 사실 이런 물음 자체가 내담자에게는 또 다른 고통이 될 수도 있지만, 이를 통해 내담자는 자기 치유를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된다. 영성 치유의 두 번째 단계는 감성에 의해 촉발된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물음의 수행 단계이다. ‘이해’없는치유는 불가능하다. 인간이 뜻하지 않은 불행 앞에서 이를 이해하고자 부단히 몸부림치는 것은 불행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노력의 일환이다. 철학상담의 철학적 대화는 기본적으로 이런 이성적인 물음에 기초한다. 물론 이 단계가 감성을 전혀 배제한 채 이성만으로 이끌어진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철학상담의 진정한 철학적 대화는 감성과 이성이 상보적으로 작용하는‘공감적 대화’가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영성 치유의 세 번째 단계는 궁극적이며 최종적인 의미를 좇아 지속적으로 물음을 던지는 영성단계이다. 영성 치유의 본질은 인간의‘초월성’과 인간의 ‘근본 물음’의 수행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인간을 치유에로 이끄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 안에서 인간의 자기 긍정을 가능하게 하는 절대적인 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정신적 존재인 인간은 그 본성상 끊임없는 물음 실행 속에 있는‘묻는 존재’이다. 이 물음은 근본적으로‘존재 물음’을 향해 있다. 존재 물음에는 절대적인 존재 긍정을 통해 모든
부정을 넘어섬으로써 자기 안에 일체의 허무를 이기는 영성이 내재되어 있다. 철학상담의 방법으로서의‘전인적 영성 치유’의 핵심은 감성에서 촉발되고 이성에 의해 주도적으로 물어지는 문제 제기와 문제의식을 존재 긍정의 영성적 물음에로 포섭하는데 있다. 바로 이를 통해 내담자는 자신의 삶의 궁극적 의미에 도달하게 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문제를 의미 전체 안에서 발견할 때 자기 치유적인 이해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철학상담의 모든 철학적 대화가 기본적으로 지향해야할 핵심 요소이자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내적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영성은 종교를 떠나서도 이해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삶의 요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