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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38호] 웃음 그리고 코미디: 저항의 텍스트 전략, 한계와 가능성_박근서(대구가톨릭대학교 언론광고학부 교수)

웃음 그리고 코미디: 저항의 텍스트 전략, 한계와 가능성

 

 

 

박근서 _ 대구가톨릭대학교 언론광고학부 교수

 

 

 

웃음: 계약의 파기

 

그는 위대한 과학자다. 남다른 통찰력과 오랫동안 쌓아온 노력의 결과로 그는 우주의 질서와 그 탄생의 비밀에 다가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에게 지구라는 행성은 단지 그가 살고 있다는 것 말고는 전혀 특별하지 않은 수많은 행성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지구가 특별한 만큼 다른 모든 행성들도 유일하고 특별하다. 해가 갈수록 그의 지력은 더욱 그 힘을 더해간다. 그에게 과학은 세상을 보는 눈이며 세상의 비밀에 다가가는 유일한 열쇠다. 늘 연구에만 몰두한 나머지 그는 자신이 한 가족의 일원으로 두 아이의 아버지이며 한 여자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했다. 그의 아내는 그런 그가 마땅치 않았다. 머릿속에 우주를 가두어 두어도 가슴으로 가족을 품지 못한다면, 그 삶은 얼마나 삭막하고 살풍경한 것인가. 어느 날 속에 담아 두었던 생각들이 터지듯 말이 되어 쏟아져 나온다.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 못한 그녀는 결국 눈물을 흘린다. 그녀의 울음에 그는 말한다. “도대체 왜 우는 거요? 다량의 물에 미량의 염화나트륨이 용해되어 있을 뿐인 그 액체로 나를 어떻게 해볼 생각일랑 아예 접으시오.”

 

이러한 과학자의 말과 행동은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그의 말과 행동이 우스꽝스러운 것은 상황과 맥락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은 이러한 경직성이 웃음을 자아낸다고 말한다. 삶이란 에너지의 부단한 흐름이다. 그것은 어떤 정형화된 틀이나 방식대로 정해진 길을 고집하는 기계적인 운동이 아니다. 무정형의 걷잡을 수 없는 돌발과 우연의 연속, 그것이 생명의 흐름이다. 그러므로 어떤 말과 행동도 그 흐름 안에서만 의미가 있을 뿐 정해진 뜻을 갖지 않는다. 우리는 말과 행동을 그것이 자리 잡은 상황과 맥락에 비추어 이해한다. 상황과 맥락이란 우선 특정한 말과 행동을 감싸는 다른 말과 행동들이며,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그것이 행해지고 말해지는 시간과 공간의 조건들이다. 바르트가 말한 대로 텍스트는 저자와 독자 사이의 계약에 따라 성립한다. 명시적이거나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텍스트는 이러한 계약에 따라 쓰고 읽어야 한다. 저자와 독자의 계약은 내러티브-담화와 같은 텍스트의 수준에서 그리고 장르 등과 같은 관습의 유형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이러한 계약을 체득하는 과정일지 모른다. 계약을 지키지 않으면(혹은 그럴 능력이 없다면), 황당해서 읽을 수 없는 텍스트를 짓게 되거나 공부가 모자라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베르그송이 언급한 과학자는 상황이 요구하는 의미의 계약, 암묵적으로 약속된 말의 계약을 이행하지 못하였다. 그가 계약을 어긴 것은 그가 일반적인 계약에 무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현실적 사용에 충분한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텍스트의 계약이란 단순한 규칙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할 줄 아는 능력을 포함한다. 물리적 법칙이 아닌 인간세계의 규칙들이란 무릇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능력 밖에 있는 것은 규칙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텍스트의 계약은 파란 불에 길을 건너는 것과는 다른 수준의 규칙이다. 그것은 수많은 경험을 통해 축적된 구사의 기술을 요구한다. 어떠한 면에서 베르그송의 과학자는 특정한 규칙에 집착해서 전체 계약을 어그러트린 경직됨 혹은 융통성 없음의 한 사례일 것이다. 경직됨 혹은 규칙과 기술의 능란한 구사에서 실패함으로써 텍스트 계약이 파기된 지점에서 베르그송은 우습다는 말을 한다. 웃음, 우스운 것은 무엇보다 순조로운 텍스트 계약의 전제 조건인 계약을 파기한 결과다.

 

 

웃음의 규칙

웃음의 규칙은 계약을 파기하는 것즉 규칙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요구한다. 웃음은 역설적이다. 물론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는 웃음을 설명할 수 없다. 규칙을 어기는 것만으로는 웃길 수 없다. 어려서 한창 말을 배우고 있는 아이들의 실수가 웃음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아이들에게 실수는 당연한 것으로 이미 염두에 두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실수는 긴장을 유발하지 않는다. 웃음이 유발되는 경우, 규칙으로부터의 이탈 혹은 규칙을 깨트림은 일종의 긴장을 유발한다.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규칙에 어긋나는 어떤 일이 발생할 때 그것은 사건이 된다. 합리적이고 사리에 맞는 어떤 일이라고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보가 충분하지 못할 때 상황은 문제가 된다. 이 경우 문제는 크게 두 가지 결말을 갖는다. 첫째, 우리가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어 현재로서는 그 상황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둘째, 실수나 고의로 규칙에서 벗어난 것이 틀림없다. 첫째의 경우 대개는 웃음이 유발되지 않는다. 둘째의 경우가 웃음이 유발되는 상황이다.

실수나 고의로 규칙에서 벗어난 경우, 웃음이 유발된다. 하지만 여기에도 조건이 있다. 우선 실수나 고의가 긴장을 고조시켜서는 안 된다. 즉 규칙에서 벗어난 상황의 원인이 밝혀짐으로써 상황이 종료되고 긴장이 해소되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웃음은 긴장이 해소되는 순간에 발생한다. 이를테면 친구를 놀리는 것은 규범적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긴장을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웃음으로 귀결된다면 그것은 그 벗어남이 어떠한 적의도 없이 단지 장난에 지나지 않았다고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웃음은 규범으로부터 벗어나 발생한 긴장 혹은 그 원인이 사소한 것이었음을 주장하고 인정받음으로써 면책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사소한 것으로 인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멀리 벗어나든가, 그 사소함에 대한 해명이 당사자와 주변 사람들에게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기는 사라지고 상황은 심각한 지경이 되어 버리고 만다.

농담이었다는 말이 지니는 힘이 여기에 있다. 지금을 진지하거나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 달라는 부탁, 만약 화를 내거나 성을 부린다면 옹졸한 벽창호로 여기겠다는 협박을 섞어 규칙과 규범으로부터의 일탈이 초래할지도 모를 뒷감당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이 이 말에 담겨 있다. 물론 모든 상황에서 이 말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상당한 효과를 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웃음이란 규범으로부터 벗어난 어떤 사건 그리고 그 사건의 주모자에 대한 이해와 관용을 포함한다. 쓰는 입장에서 웃음의 텍스트란 계약 위반을 소명하는 일이지만, 읽는 입장에서 그것은 위반을 허용하고 이를 사소한 것으로 넘겨 마음에 두지 않는 자세인 것이다. ‘웃음의 텍스트는 이 두 방향의 노력이 만나는 지점에서 생성된다. 규범으로부터 벗어나고 그것을 소명하더라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웃음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웃음은 쓰는 쪽의 문제이며 동시에 읽는 쪽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농담이었다는 말은 충분히 농담으로 들리게 말하고 난 뒤에 해야 하지만, 동시에 관용을 베풀어 받아들이라는 강력한 요청을 피력하는 것이기도 하다.

 

 

코미디: 텍스트적 저항의 무기

코미디는 웃음의 텍스트이다. 웃음을 통해 의미를 전하는 모든 텍스트는 근본적으로 코미디라 할 수 있다. 관습적으로 특정한 웃음의 텍스트를 좁은 의미의 코미디로 지칭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동시대적인 문화적 조건에서 볼 때 좁은 의미의 코미디를 고집하고 이를 전형적인 웃음의 텍스트로 규정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따른다. 이를테면 흔히 코믹하다는 텍스트들은 장르로서의 코미디는 아니지만 상당부분을 웃음을 위해 할애하고 있는 텍스트들이다. 현실적으로 장르적 코미디는 퇴조하고 있으나 그 특징을 공유하고 있는 텍스트들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코미디라는 이름을 장르적 전통에 국한하는 것은 오히려 논의를 위축시키고 현실의 문화적 상황을 외면하는 일이다. ‘코미디는 이제 장르라기보다는 텍스트를 구성하는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봐야할지도 모른다.

코미디는 지어진 웃음의 텍스트, 즉 웃음을 주요한 표현 수단으로 생산된 콘텐츠 혹은 그러한 텍스트 전략이다. 텍스트의 패러다임 혹은 전략으로서 코미디는 무엇보다 규범으로부터의 일탈을 활용한다. 코미디는 기본적으로 일탈의 텍스트이다. 규범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해서 웃음이 유발되는 것은 아니듯이 일탈 자체가 코미디를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대개의 대중문화 텍스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통상의 규범과 규칙으로부터 벗어나기 일쑤다. SF장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갖는 외계인으로 설정된다거나 시간을 초월하여 소통하고 통신하는 무전기를 매개로 서사를 끌어간다가거나 하는 드라마는 최근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또한 계급적 지배에 저항하듯 우리사회 엘리트그룹의 잔인한 음모를 고발함으로써 규칙에서 벗어나는 듯 보이는 텍스트들도 드물지 않다. 영화 <베테랑>이나 드라마 <리멤버-아들의 전쟁>은 모두 재벌2세의 비인간적인 성격과 그의 범죄를 비호하고 은폐하는 권력의 음모를 드러낸다. 하지만 이들은 코미디의 특징이 되는 일탈이 아니다. 텍스트의 일탈적 요소들은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이를 극대화하여 결국 폭발하고 터트려서 끝을 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진지하고 심각하며 모든 텍스트 요소들이 그러한 결말을 향해 달려감으로써 주제를 보전한다. 심각한 일탈은 웃음보다는 분노, 걱정, 고민의 대상이다. 하지만 코미디에서 일탈은 그 자체가 사소하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변명을 달고 나타난다.

하나의 텍스트 전략으로서 코미디는 종종 작은 웃음들 뒤에 심각한 이야기를 숨긴다. 이를테면 <파견의 품격> 혹은 이를 리메이크한 <직장의 신>은 과장된 설정과 그럴듯하지 않은 농담들 뒤로 나날이 비인간화되고 있는 우리의 고용상황을 언급한다. 마찬가지로 <질투의 화신>은 한편 흔하디흔한 러브코미디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성적 차별과 편견, 자본에 의해 분할 통치되고 있는 노동의 상황 등을 웃음의 코드를 앞세워 이야기한다. 채플린의 <모던타임즈>가 과장된 행동과 우스꽝스러운 몸짓 뒤로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고발한 데에는 비할 바 아니지만 이들 텍스트들 또한 어떤 부분에서 그와 비슷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현실의 주어진 규범, 권력의 질서로부터 벗어나 있으나 그것을 언급하는 방식은 결코 심각하거나 진지하지 않다. 코미디는 그런 것이다. 웃기는 것이 코미디지만, 코미디라고 하면 얼마간은 웃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코미디는 작은 웃음으로 커다란 심각함을 가려 덮는 위장의 전략이 되기도 한다. 사소한 일탈과 이로부터 웃음을 자아내 코미디라는 승인을 얻어 가려 덮으면 커다란 심각함이 허락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농담이 용서를 전제로 하는 공격이 되듯 코미디 또한 용인을 전제로 한 저항이 될 수 있다.

 

 

한계: 대안의 부재

코미디는 세상의 진실을 드러내는 좋은 방법이다. 텍스트의 전략으로서 그것은 심각한 문제를 쉽게 언급할 수 있도록 해준다. 현실은 부조리의 집합체지만 언급되지 않는다면 논의될 수 없고 논의될 수 없다면 고쳐질 수 없다. 그러한 면에서 코미디는 어려운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농담에 성질을 부리는 것만큼 민망하고 제 얼굴 깎는 일도 흔하지 않다. 가끔 그 민망함을 마다치 않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 대가는 다른 경우에서보다 크고 무겁다. 코미디와 웃음에 대한 관용이 문화적 유연함을 과시하는 징표가 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비용과 위험이 큰 만큼 반대급부도 있는 것이다.

코미디는 저항의 텍스트이며, 근본적으로 기존의 규범과 질서를 해체 혹은 전복한다. 그 자체가 규범과 질서를 벗어남으로부터 시작하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며, 이를 용인하고 허용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강제하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미디의 길항하는 두 힘이 여기서 맞부딪혀 하나의 긴장을 만든다. 진지하고 심각하면 웃을 수 없기 때문에 코미디는 그저 그러한 사실을 드러내 보여줄 뿐 그 이상의 진전된 논의를 끌어내기는 어렵다. 전복과 위반은 코미디라는 말에서 번복되는 효과를 갖기 때문이다. 말하기 위해 발설언급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 그것에 대한 주목과 수용을 불확실하게 만드는 것은 코미디가 갖는 가능성의 측면이자 한계인 것이다. <렛 잇 비>의 용감한 한마디가 술주정이나 이내 꼬리를 내리는 비겁함으로 연결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관용의 범위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코미디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자가당착을 감수한다.

 

 

사진1 | KBS <개그콘서트 - 렛 잇 비> 화면 캡쳐. (KBS제공)

20146월부터 20156월까지 KBS <개그콘서트>에서 방영된 개그 코너 중 하나. 직장인들의 애환을 개그와 노래로 풍자하여 웃음을 주는 코너다. 편집자주. (편집자주)

 

세상에 오직 코미디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코미디에 모든 걸 바랄 수는 없다. 웃음은 텍스트의 한 효과이며 한 전략일 뿐이다. 코미디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한 단초를 마련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만으로 세상의 변화를 완결할 수는 없다. 권력이라는 단단한 벽에 균열을 내고 그로부터 새로운 관계의 비전을 엿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코미디는 힘과 가능성을 가진 텍스트-전략이지만, 그 자체가 대안은 아니다. 코미디는 기존의 규칙을 벗어남으로써 시작하는데, 이는 기존 질서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에 근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또 다른 한계를 초래한다. 코미디는 대체로 기생적인 텍스트다. 기존의 질서를 부정하거나 벗어나기 위해 그것을 언급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코미디의 텍스트적 저항은 부정적이며 해체적인 것이지 긍정적이거나 건설적인 것이 아니다.

코미디가 규범으로부터의 이탈하면서 그리는 궤적이 반드시 탈주의 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모든 일탈이 진보적인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코미디의 저항 또한 필연적으로 진보의 노선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코미디도 보수적일 수 있다. 오히려 어떠한 면에서 근본적인 보수성을 지니고 있을지 모른다. 대안에 접속해 새로운 삶의 비전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해체와 부정은 단지 그런 채로의 삶을 인정하고 긍정하는 단순한 긍정이 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냥 그렇다혹은 아니면 말고의 무책임의 여지가 코미디의 또 다른 얼굴을 만든다. 그러므로 코미디와 코미디언이 특별히 진보적이라고 주장할 근거는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음과 코미디를 이야기하는 까닭은 그것이 지닌 가능성 때문이다.

코미디는 규칙을 의도적으로 어긋나게 함으로써 시작되기에 규칙의 습득과 통달 혹은 초월이 그 전제이다. 코미디는 규칙을 수행하지 못하는 무능의 결과가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는 초극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코미디의 신은 아폴론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이다. 문제는 그 뛰어 넘음의 위치에서 무엇을 보느냐, 이제 돌아와 무엇을 행하느냐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코미디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이후로는 다시 진지해지고 심각해져야하기 때문이다. 그것의 문제를 들춰내는 것만으로는 그것을 대신할 어떤 것도 만들어낼 수 없다. 그것은 영원히 반복되는 어떤 수레바퀴의 한 지점이며, 그것의 굴림은 수레를 움직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