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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40호] <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를 읽고

<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를 읽고

 

신문방송학과 전공 석사과정 황민아

 

   

이 책은 사회변혁 운동가이자 문학평론가인 김명인이 기록한 2000년대 전후의 글들로 구성된 책이다. 한때는 유신체제와 신군부로 대변되는 독재 권력에 맞서 사회변혁 운동으로 80년대를 살아낸 역사의 산증인으로서, 또 다른 한때는 80년대를 지나 90년대 이후 문학의 변화상을 감시하고 비판해온 문학비평가로서 살아온 김명인은 한국 사회의 모습을 망원경 혹은 현미경의 거리로 일축일신하며 한국 사회의 문제와 일상을 들여다보고 비판한다. 특히 2000년대 참여정부 시절 돌기처럼 솟아올랐던 정치경제적 문제와 사회문화문제를 토대로 고찰한 김명인의 글은 현재에도 유효한 근원적인 사회 문제 진단과 그 통찰력을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이 지난 이 시점, 본 글은 김명인의 비평이 놓치고 있었던 부분과 그의 논의에서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부분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계속되는) 민주주의의 배반

 

박근혜와 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인해 한국사회의 썩고 추악한 모습이 겹겹이 드러나고 있는 현재, 대다수의 한국 시민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과 함께 분노와 참담함으로 엉킨 일상들을 보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혹자는 보수 정권이 들어섰던 지난 10여 년 동안 이루어진 민주주의의 퇴행을 강력하게 역설하며한때집권했던 진보당의 시절을 장밋빛으로 물들여 회상하기도 한다. 자신들 앞에 당면한 사회적인 혼란과 정의롭지 못한 기득권의 민낯을 직시하며 잠시라도 분노를 잊고 싶어서일까.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병리를 더욱 곪게 하여 폭발시켜 버린 박근혜 정권의 병폐 아래 사람들은 다시는 마주 할 수 없기에 실컷 좋았다고 생각하기 쉬운 과거로 회귀하기도 한다. 단적인 예로 <무현, 두 도시 이야기>라는 노무현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개봉하는 등 노무현을 향한 노스탤지어가 만연해도 이상하지 않은 이 시점, 참여정부 시절에 기록된 김명인의 비평문은 우리에게 다시 질문을 던진다. 과연 그때의 민주주의는 우리를 배반하지 않았는가? ‘우리에 과연 누가 포함될 수 있는가를 세밀하게 따져보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참여정부 시절의 민주주의 역시우리를 배반하였고 앞으로도 민주주의의 배반은 계속될 것이라는 게 나의 대답이다.

밀레니엄이라는 허공의 숫자가 매겨진 지 약 10년 후가 지난 한국 사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김명인이 들여다본 10년 전의 모습들과 많이 겹친다. 꿉꿉한 뱀은 탈피만 할 뿐 여전히 그 몸체를 가지고 있듯이 신자유주의 질주는 멈추지 않고 경제적 약자, 비정규직의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인간적인 유대는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어 하나의 사물로 취급된다. 성주 주민들은 한미동맹이라는 핑계로 결정된 사드 배치를 반대하기 위해 여전히 고군분투 중이다.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의 인권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가난한 열거법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민주주의의 배반 속에서 과연진보는 어떻게 이루어나갈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시민들이 그토록 선망하는민주주의그 자체는 무엇인가?

김명인은 민주주의가 배반하는 한국 사회의 문제를 반합리주의적이라고 진단하며 기형적인 근대화 속도로 인해 그동안 한국 사회가 체화하지 못했던근대적 합리주의를 이제는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명인이 생각하는근대적 합리주의란 투입과 산출에 따라 예측이 가능한 상태이다. 투입과 산출에 적용할 항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김명인은민중의 생존권공공의 행복을 위해합리성이야말로 한국 사회가 구축해야 할 정신적 인프라라고 단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김명인의 주장에는 합리성만으로 예측할 수 없는 배제의 가능성이 도사린다.

먼저 김명인이 지향하는 근대주의적 합리주의는 합리성 즉 이성적 사고를 토대로 한특정공론장을 전제로 한다. 합리적인 이성은 대상을 전제하여 관념을 중심으로 적절한 산출과 투입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것이다. 이 과정은 산출과 투입을 결정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작동될 수 있으며 투입과 산출이라는 관념적인 방식에 맞지 않는, 합치할 수 없는 주장은 배제될 가능성이 있다. 즉 근대적 합리주의에는 산출과 투입 과정조차도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배제의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적 합리주의가 추구하는 민주주의는 계속해서 지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위한 대안은 근대적 합리주의의 통합적인 방식보다 기존에 형성되어있던 공론장을 균열시키고 틈새를 벌려 또 다른 배제의 목소리를 공론장에 참여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이는 김명인이 언급한 합리성보다는 몸과 몸으로 부딪혀 공론장의 지평을 넓혀가는 갈등적 민주주의에서 발견될 수 있다.

 

 

일상의 정치화, 정치의 일상화

 

단단하게 형성된 공론장에 틈새를 벌려 새로운 목소리를 들려주는 일이야말로 문학이 할 수 있는 하나의 역할이 아닐까. 격변했던 한국 근대화를 몸으로 직접 거쳐 온 김명인은 그가 맞닥뜨린 사회 현실뿐만 아니라 문학 사조 역시 비판적으로 들여다본다. 그에 따르면 사회 현실문제와 불가분한 관계를 지닌 문학 사조 또한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다.

무엇이 한국 문학의 바람직한 형상일 수 있을까에 관한 깊숙한 성찰과 비판도 들여다볼 시간도 없이 맞이한 2000년대는 소위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괴물의 모양새를 가진 무정한 자본의 논리가 마음 놓고 판을 치는 시대이다. 이미 한국 사회를 덮친 이 괴물 앞에 자그만 한국 문학의 판 역시 속수무책이었고 이미 한국의 다른 제도와 마찬가지로 기성화된 일부 문단 권력은 자신을 성찰할 여유도 없이 대중의 입맛에 맞는, 더 잘 팔릴 수 있는 작품들을 쏟아냈다. 김명인이 바라본 2000년대에 횡행한 작품들은 대개 일상에서 포착할 수 있는 얄팍한 감성을 풀어낸 것들로 주를 이루었고지성과 공동체적윤리성이 결여된일차원적인 감각만을 자극하는 값싼 소모품으로 전시되었다.

현대 한국 문학 사조에 대한 김명인의 뼈아픈 진단은 아직도 유효하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와 더불어 문학의 판에도 뿌리내린 상업주의와 고착된 문단 권력은 신경숙의 표절문제가 불거졌을 때 대다수 문학인의 침묵과 방관으로 인해 막혀버렸던 공론장, 하나의 고발 이후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속속히 드러난 문단 내 성폭력 사건 등과 같이 수면 위로 튀어나오는 돌기들을 통해 훤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한국 문학의 기성화, 문단의 권력화는 80년대 이후의 한국 문학 작품에서 드러나는 사회 비판의식의 결여와 맞물린다. 김명인은 그 속에서 한국 문학의 매너리즘 속에서 문학을 통한일상적 정치, 정치적 일상으로의 변혁을 기원한다.

김명인이 강조한 일상적 정치, 정치적 일상을 향한 바람은 1969년 캐롤 해니시의 선언이 천명하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제2물결 페미니즘의 주요 슬로건에서 이미 드러나기 시작했다. 공론장에 참여하지 못하는 배제 당한 목소리, 거대 담론과 이분법에 갇혀서 새어 나오지 못한 일상적 존재의 목소리, 차별에 억눌린 목소리를 끌어내어 감추어진 존재를 드러내는 일은 문학과 정치가 할 수 있는 공통의 역할일 것이다. 도미니카의 소설가 진 리스는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라는 작품을 통해 19세기 고전 <제인에어>의 백인 중심적 서사에서 삭제되었던 광녀 앙투아네트의 목소리를 새롭게 발굴하고 나아가 기존의 이야기를 비판적으로 전복한다. 이처럼 배제된 목소리를 수면 위로 드러내는 문학의 사회적 역할로 비추어 봤을 때 과연 현대 한국문학은 그 역할을 적절히 수행하고 있는가?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지성을 바탕으로 한 자유로운 말들의 카니발현장을 한국문학에서 목도하기 위해서는 문학의 판을 구성하는 이들이 안락한 자리에서 벗어나 그 판을 깨뜨리는 불온한문학의 등장을 위해 무거운 돌을 삼켜야 할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