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10.18 11:11

기업예술의 탄생

 

 

심상용_ 미술사학 박사, 동덕여자대학교 큐레이터학과 교수

 

 

기업들에게 민주주의에서의 표현의 자유, 정당한 법의 절차, 혹은 정치적 대표성 등의 법적 권리를 주는 것은 일단의 계약서에 그런 권리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업들에게 이러한 권리를 허용하는 의원들이나 판사들은


지적으로 정직하지 못하거나 혹은 수퍼자본주의의 영향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오직 사람들만이 그런 권리를 소유해야 한다.

 

 

기업국가한국

 

1997· 98년의 환란과 IMF 사태, 2008년의 글로벌 금융대란을 거치면서 한국에서 기업은 국가운명에 상응하는 지위로 격상된 듯하다. 기업이 국가비전이요, 사회적 토대요, 민중의 철학이어야 한다는 것이 정부의 선전이었다. 정부와 기업, 기업과 정부의 협력이 공공연하게 미화되고 도덕적인 것으로 포장되었다. 국세청 자료에 의하면, 2012년 전체 기업 영업이익의 24.9%(39조원)는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 두 기업이 낸 것이다. 2009년의 16.9%에 비하자면 비약적인 증가세가 아닐 수 없다. 같은 기간 개별기업으로서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이익 비중은 2009년 이후 두 배로 뛰었다. 이렇듯 짧은 기간에 국가의 경제 집중도가 위험수위를 오르내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 이명박 정부의 고환율 정책이었다.

기업 프랜들리 정부기업하기 좋은 나라등의 구호가 매일 저녁 뉴스를 타던 5년을 포함해 지난 20년 동안 한국은 급격하게 기업국가로 재구조화되어왔다. 이 기간 동안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이윤창출을 내기 어려울 것으로 간주되는 공공영역의 기업이나 조직, 활동들은 급속하게 위축되거나 폐기되었다. 기업국가가 추구하는 가치와 실행의 목록은 이렇다. 경영진단이나 경영화의 이름으로 효율성과 민영화의 날을 갈고, 그 벼려진 것으로 공공영역과 활동들을 회복불가의 상태에 이를 때까지 들쑤시고, 그것들을 사적 수익의 식탁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 로버트 라이시Robert B. Reich에 의하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승리를 위해 민주주의를 쪼그라들게 하고, 소비자와 투자자의 근력을 키워 시민의 운동력을 박탈하는 국가다. 조지프 스티글리츠에 의하면 기업국가는 지난 30년 동안 우파가 최소정부라는 이름으로 추진해온 것인데 그의 표현을 빌자면 이렇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국가는 자유주의자들이 옹호하는 최소국가가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것(국가)는 지나친 제약에 쫓겨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는 공공재(기간시설 및 과학기술, 교육에 대한 투자)조차 공급하지 못하는 국가, 지나치게 허약하여 공정한 사회구축의 전제조건인 소득재분배조차 시행하지 못하는 국가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 정부의 규모는 전혀 줄지 않았으며, 기능적으로 심각하게 왜곡되어 부유층에게 푸짐한 선물을 내어주고 있다.”

기업국가 한국의 상황도 이에 못지않다. 오슬로 대학의 박노자는 한국에서 특권층·중상층이 아닌 사람으로 늙어가는 것은 처벌에 가까운 것이라 했다. 10대 그룹 대주주 10명에게 돌아간 주식 배당금이 70만 명 이상이 되는 공식실업자들이 받을 돈의 약 30%에 해당되는 이 사회에서 현대판 귀족사회의 부활을 본다고도 했다. 주로 현대미술의 V.I.P. 핵심 고객이기도 한 상위 1%의 평균 소득은 중위소득에 비해서도 22.6배나 된다. 반면 빈곤격차(poverty gap)는 세계에서 4번째로 높은 나라다. 기업국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공공성의 부재며 공공재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다. 기업의 치열한 경쟁체계가 사회의 모든 기관과 조직, 개인으로 전이되기 때문이다. 교육, 예술, 문화, 심지어 가정에조차 수익창출논리가 침투하고, 각 영역의 공공성과 자발성의 기반은 심각하게 훼손된다. 기업국가에서 기업의 이익사냥을 벗어날 수 있는 땅은 단 한 평도 없다. 기업의 입장에서 공공영역은 준비된 경쟁자가 부재하다시피 하는 금싸라기 땅과 진배없다. 진출이 허용되는 순간, 막대한 이익이 기업의 차지로 돌아갈 것이다. 이들 기업이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내는 일은 조금도 어렵지 않다. 오늘날 대기업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특혜를 통해 차지한 돈의 일부를 공공영역을 수호하려는 정부의 의지를 꺾는데 투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탁으로 한국의 교육과 문화는 분야는 이미 최소한의 공공성마저 담보하기 어려울 만큼 과도하게 사유지화 되어버렸다.

정부는 교육을 높은 비용을 지불하는 소수에게만 혜택이 집중되도록 시장화 하는 사교육관련 기업들을 감시하는 일을 일찍이 포기해버렸다. 그 결과 공교육은 토대마저 흔들리게 되었다. 더 큰 문제는 정부가 교육이 기업의 쓸 만한 부품을 생산해내는 비인간적인 공정이 되도록 하는데 오히려 앞장서왔다는 사실이다. 학생들은 이 기업국가, 교육방임정부에 의해 살인적 경쟁에 내던져지고 일찌감치 심신의 황폐화를 경험하게 된다. ‘자라는 아이들에게 불행을 떠안기는 것이 한국 공교육의 실체인 것이다.

대중문화는 몇 개 기업에 이익이 집중되는 독점구조로 급속히 이행되어 생태계의 교란은 이미 심각한 단계에 이르렀다. 예술도 자본기계의 부속으로 급속하게 편입되어, 공공미술관은 민영화되고, 이론과 비평은 시장의 병참기지로 전락하고, 예술가는 브랜드화된 스타로 대체되었다. 작가건, 이론가건, 관장이건, 큐레이터건 심지어 감상자들조차 이익 지향적으로 인식하고 기업적으로 판단한다. 기업화된 개인이나 기업의 소장품 목록에 들고, 유능한 시장조직의 일원이 되는 것 외의 다른 활동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시장에서 성공한 예술이 진정한 예술로 선전되고, 구성원들은 이익과 효율성에 의해 서열화 된다. 이들 모두는 창작하는 빈곤층creating poor으로 주저앉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않은 채 경쟁 속으로 투입된다.

한국은 복수의 비엔날레를, 그것도 성대하게 치른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나라가 되었는데, 이는 비엔날레를 의사 기업쯤 되는 것으로 아는 잘못된 인식이 한 몫 한 결과다. 비엔날레를 먹거리 산업의 전초기지쯤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비엔날레의 이면에 대해 더 깊이 성찰하려는 시도는 매우 부족하다. 오늘날 글로벌 비엔날레들은 반자본주의 이념을 표방하는 듯하면서, 실은 자본의 구동력으로 돌아가는 진정한 자본주의 벤처venture’로서 기능한다. 글로벌 거대 비엔날레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거나 앞으로 거래될 것들이 매우 특별한 가치 있는 것들이라고 믿게 만들기 위한 시장의 보조 추진 장치로 작동한다. 글로벌 비엔날레의 또 하나의 기능은 지구촌의 지역들에 예술의 글로벌 스텐다드를 유포시킴으로써 글로벌 시장으로의 편입을 용이하게 하는, 일종의 중앙화폐의 그것이다. 중앙은행 시스템이 중앙화폐 이외의 것들을 정크화폐로 낙인찍듯이, 지역의 예술과 미학에 불량 낙인을 찍는 기능인 것이다. 글로벌화가 지역 검열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이로 인해 글로벌 미술시장을 독과점하고 있는 소수의 이익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오래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농담을 빗대어, 오늘날 경쟁적으로 치러지고 있는 글로벌 비엔날레들의, 현 시장 질서를 영속화하려는 위선적인 속셈을 폭로 한다. “그들- 글로벌 비엔날레들- 는 오늘날의 예술계가 자본주의 기계의 일부라고 말한다. 그러나 당신은 여기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정말로 자본주의 기계의 일부이다!”

한국이 비엔날레라는 자본주의 기계를 통해 큰돈을 벌게 되는 일은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글로벌 비엔날레 체계가 미래에 큰 수익을 올릴 지도 모를 지역의 예술적 잠재력의 싹을 사전에 잘라내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예술의 탄생

 

최근 대기업들이 예술의 전면으로 더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한류韓流의 성공, 미술시장의 활성화 등으로 예술의 투자수익모델화 가능성이 점쳐지면서 기업과 예술의 다양한 협력이 전례 없이 고무되고 있다. 국내의 영향력 있는 전시와 학술행사, 수상제도 등은 갈수록 소수 거대기업이나 대기업의 직·간접적 운영이나 후원, 기부등과 긴밀하게 결부되고 있다. 공공미술관 생태계 전반에서 비중이 큰 사립미술관들의 대다수가 재벌이나 거대기업 소속인 상황에서 예술에 미치는 이들 기업의 막대한 영향력이 그리 새로운 현상인 것만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미술관에 뿌리내린 대기업 안주인들의 손길이 힘으로 작동하는, 이를테면 재벌가의 미술관을 살펴보면 요즘 가장 잘나가는 작가의 답이 나온다는 작금의 상황은 이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특히 재벌 소유 미술관들의 활동이 발휘하는 영향력은 이전에도 남달랐지만, 그 힘의 작동방식에 있어 오늘날처럼 절대적이거나 포괄적이지는 않았다.

재벌가 사모님은 리히텐슈타인을 좋아한다같은 냉소 섞인 풍자에는 생각보다 함의가 담겨 있다. 기업예술의 전형적인 속성이 그 가운데 하나로, 예컨대 기업예술은 리히텐슈타인 같은 스타작가를 일관되게 선호한다. 분명 보편적 의미의 취향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이 탈세나 비자금조성 같은 직접기여일 수도, 기업 이미지 개선이나 광고 같은 간접기여일 수도 있지만, 어떻든 기업이익에 부응하려면 스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업은 이익이 담보되지 않는 취향을 위해서는 결코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 기업의 자발적 선행은 불가능한 개념으로, 기업은 좋은 일을 위해 좋은 일을 하지 않는다. 취향에 대한 존중과 자발적인 예술애호라는 요인이 전무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것이 돈을 벌어주는 예술보다 상위의 기준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없다.

그러므로 예술투자 기업은 블루칩 작가를 차지하거나 생산해내는 경쟁을 선동하고, 그들이 주류를 차지하도록, 그리고 안정적인 투자대상으로 자리잡는 시장이 조성되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시장이 이미 안정적으로 구축된 작가들은 값이 오를 대로 오른 주식처럼 수익성이 떨어지므로, 기업은 갈수록 투자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신진작가들을 키우는데관심을 기울이게 된다(블루칩 작가의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는 이유가 이것이다). 미래의 스타-블루칩 작가들에 대한 집중은 투자의 변동성을 더욱 증가시키고, 그것은 다시 집중성을 높이도록 하는 원인이 된다. 특히 경기가 자주 불황국면을 들락거리게 되면 기업들은 집중성을 더욱 높여 스스로 위험성이 낮은 활동만을 찾아나서는 회피효과를 강화한다. 절대다수의 작가들이 이 범주 밖으로 밀려나게 되는 것인데, 그렇게 만든 당사자인 예술투자기업은 이미 브랜드화되었거나 앞으로 그렇게 될 가능성이 없는, 사실상 대다수의 작가들에게 돈을 쓰는 것은 문화경쟁력을 떨어트리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취향이라는 상쟁재로 인해 고도의 수익성을 창출할 수 있는 투자재가 있을 뿐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20117월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이우환>전이 열렸다. 구겐하임의 아시아예술 담당 삼성 시니어 큐레이터알렉산드라 먼로Alexandra Munroe에 의하면, 전시의 취지는 한국작가 이우환을 세계적 인물이자 현대의 거장으로 조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2010년부터 삼성이 구겐하임에 제공해온 아시아관련 예술펀드가 아니었더라도, 한 아시아 작가의 세계미술에 대한 영향력이 구겐하임의 관심사가 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돈이 아시아현대미술에 대한 미술관의 관대함의 급수를 갑자기 높게 올렸을 거라는 것이 단지 추론만은 아니다. 이 사실이 전시의 보도자료에 명시되어 있다 : “이 전시는 삼성의 선도적인 후원으로 성사되었다.” 이는 그에 상응하는 선도적 후원이 가능하다면, 구겐하임의 큐레이터십이 여타의 작가들에 대해서도 자신의 소신이나 평가를 조정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의미다.

20146월 알프레드 파크망Alfred Pacquemen 전 퐁피두센터 관장의 기획으로 프랑스 베르사유 박물관에서 개최되었던 이우환의 초대전에도 같은 맥락의 개입이 있었다. 기획자는 철과 돌이라는 두 물질이 충돌하는 효과가 이우환 조각의 핵심이라 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전시만을 놓고 보자면, 이우환이 전시를 위해 직접 구입한 알프스 지역과 스칸디나비아 산 돌 만큼이나 베르사유의 중앙 홀에 삼성전자가 설치한 대형 초고화질UHD TV도 상징적인 요인이 아니었을까. 201388일자 <리베라시옹Libération>의 기사에서 베르사유의 까뜨린느 뻬갸르Catherine Pégard관장도 이와 관련한 베르사유의 확고한 입장을 밝힌다. "우리의 모든 행사에는 메세나가 같이 합니다.”

미디어들은 이우환이 베르사유에 초대된 두 번째 아시아 작가라는 사실에 방점을 찍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세 번째다. 지난해 6월에서 9월 사이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사진전이 베르사유의 부속건물인 오랑주리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물론 유병언의 사진들의 베르사유 초대와 그가 베르사유에서 진행되는 물의 궁전의 숲행사의 유일한 메세나로서 기부한 14십만 유로 사이에 연결고리가 없을 수 없다. 지난 2014612일 베르사유 박물관에서 진행된 뻬캬르 관장과 <연합뉴스>의 인터뷰에서 이 전시를 위한 유병언의 기부금은 5백만 유로로 언급되었다. 프랑스 외무장관 로랑 파비우스Laurent Fabius의 권유로 취소되긴 했지만, 또 다른 후원의 대가로 그의 사진들이 콩피에뉴 나폴레옹 3세 극장에서 열리는 음악회에서 전시될 예정이었다.

사람들은 기부에도 품격이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설사 그것이 사실이더라도, 그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오늘날 돈으로 살 수 없는 품격은 존재하지 않으며 돈이 품격을 가리는 것도 아니다. 전술한 인터뷰에서 "베르사유에 낸 유병언의 후원금이 공금횡령으로 조성된 것이라면 베르사유에도 책임이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빼캬르 관장은 후원금이 문제가 있다면 베르사유는 책임자가 아니라 제1의 피해자"라고 펄쩍 뛰었다. 전시를 열 당시만 해도, 그 돈이 그토록 검은색인지 알 수 있는 단서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병언의 사진을 "평범함 속의 비범함"으로 극찬한 것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 당시만 해도 그 작품이 아마추어 수준이라는 단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품격 있는 후원이 주는 명예와 로비로 사들이는 명예를 구분하는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병언의 루브르 전시에 글을 쓴 사람은 박사학위 소지자로 1993년부터 파리 국립미술학교의 사진 큐레이터였으며 2010년부터 사진 분야의 전시를 책임지고 있는 안-마리 가르시아Anne-Marie Garcia. 아마도 유병언이 기부한 11십만 유로가 그렇게 하도록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베르사유의 뻬갸르 관장도 전직 기자로서의 필력을 살려 영원과도 같은 순간같은 시적인 표현을 동원해 이 훌륭한 사진작가를 찬양했다. 2012<꼬내상스 데 자르Connaissances des Arts>2013<보자르 Beaux-Arts>에서도 유병언의 사진을 테크닉이 뛰어난 걸작으로 평하는 뻬갸르 관장과 편집자 또마 슐레세르의 글들이 실렸다. 이 사태에 대해 베르나르 아스케노Bernard Hasquenoph는 탄식한다. “모두들 그의 케이크 조각을 원한다. 냉소만 나올 뿐이다.” 사실은 유병언의 케이크가 아니라 돈의 케이크일 것이다.

재력으로 인식을 조정하고, 로비로 예술성을 획득한다는 사실이 글로벌 현대미술의 판이 벌어지는 곳에서는 어디든 공공연하게 확인된다. 한 때 명망을 누렸던 기관들조차 앞장서서 면죄부를 발행했던 중세 교회의 관례라도 따르듯, 후원이나 기부의 관행 안에서 액면가에 따라 구분되는 예술적 인정의 쿠폰을 주고받는다. 오늘날 예술투자 기업은 기부나 후원의 명목으로 포장된 로비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들에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는 싸움에서 우위를 장악하고 있다. 베르사유 박물관이 제프 쿤스나 무라카미 다카시 같은 상업적 키치작가를 끌어들였던 것도 이 맥락인데,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대해 아스케노는 일갈한다. “() 소득원에 불과한 사람을 위대한 아티스트로 포장하는 데서, 우리는 현재 우리의 대표적인 미술관들이 예산이 없다는 핑계로 모든 종류의 타협을 허용하는 윤리적 일탈의 기미를 본다.” 그럼에도 이를 단지 몇몇 기관이나 그 관련자들의 박약한 윤리성의 문제로만 다뤄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정부와 기업, 공공선과 자본, 공공영역과 사유지 사이의 필수적인 균형 틀이 위협받고 있는 이 시대에 관한 본질적인 문제다. 한국에서 여전히 구겐하임의 전시가, 모마의 컬렉션이, 테이트 모던과의 계약체결이, 베르사유 미술관의 초대가 우상화되고, 위대한 예술성을 가름하는 결정적인 심급으로 작용한다는 것 역시 단지 한국예술의 낙후성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러한 균형틀이 깨져 심각한 오작동을 일으키고 있는 한국사회의 현재와 미래에 관한 문제다.

지난 20141, 한국의 또 다른 거대기업이 거액의 후원금의 힘으로 유럽의 또 다른 미술관과 계약을 체결했다. 현대자동차는 영국의 테이트 모던Tate Modern 미술관과 11년이란 최장기 파트너십을 체결한 첫 번째 기업이 되었다. 그리고 그 계약의 첫 사업으로 비디오 작가 고백남준의 작품전을 열기로 계약을 체결했고, 전시의 원활한 개최를 위해 미술관 측이 작가의 작품 9점을 구입하는 것도 후원하기로 했다. 선구적인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과의 관계가 현대자동차로선 손해보지 않는 비즈니스 전략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술적인 것으로 자주 오인되곤 하는 비즈니스적 성과에 의해 가려져서는 안 될 측면들이 있다. 후원금 계약체결이 테이트 모던의 학예팀을 움직여 백남준이 세계 미술사에 끼친 영향을 재조명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비즈니스적 성과에 의해 미술관이나 큐레이터의 우선적인 관심사를 조정하거나 통제하는 것은 언제든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형성되는 의미를 여과 없이 가치화하는 한국예술 장의 관행을 내부적으로 채우는 자기기만과 허세 가 그것이다. 기업의 푸짐한 후원금 계약으로부터 오는 것은 진정한 예술의 성과와는 관련이 없는 기업예술의 장황한 레토릭일 개연성이 그만큼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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