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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호] 미디어 속 먹는 행위를 본다는 것, 감각하지않고도 감각하는 것.

이 준 형 (일반대학원 신문방송학과 박사수료/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연구원)

 

‘미디어 속 먹는 행위를 본다는 것’, 즉 먹방은 이제 ‘새로운 사회적 현상’이라고 소개하기도 어려운 무엇인가가 된 듯하다. 2000년대 후반부터 한국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먹방은 이제 전세계적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 현상의 자연스러움 이면에 어떤 메커니즘이 있는가에 대해서 설득력 있는 해석이 제출되고 있지는 않다. 먹방 시청자들에 대한 조사를 통해 ‘먹는 모습에서 대리 만족을 느낀다’, ‘외로움을 달랜다’ 정도의 일반적 동기를 확인하거나 그로부터 현대 사회에서 인간들이 느끼는 ‘소외감’이 현상의 원인이라고 이야기되는 정도가 전부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소외감’이라는 변인만으로는 먹방의 인기라는 결과가 충분히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에 만족스럽지 않다. 어떤 질문이 계속 우리에게 남는다.

 

  ‘우리는 어떻게 실제로 먹지 않고도 먹방을 통해 만족감을 느끼는 존재가 되었을까’,

 

  나아가, ‘우리는 어떻게 실제로 감각하지 않고도 감각했다고 느끼는 존재가 되었을까’.

 

  이 글을 통해 먹방과 미디어를 매개한 감각의 구조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인간적 행위 혹은 감각의 외부화라는 이 문제설정에 대해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그의 대표적인 저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1989/2013)를 통해 꽤 설득력있는 해석을 제공한다. 그는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가 마치 사물들 사이의 관계처럼 나타나게 된다’는 <자본> 1권에서의 맑스 물신주의에 대한 정식을 나름대로 의 방식으로 풀어낸다. 지젝은 물신주의가 인간 사회의 고유한 효과이며, 각 시대에 특정한 형태를 취하게 된다고 본다.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적 관계에서 주인과 노예의 지배 - 종속 관계는 그 관계의 네트워크적 효과일 뿐인 것이 주인이 내재적으로 갖춘 아우라이자 권위인 것처럼 나타나는 물신주의적 관계가 된다. 반면, 자본주의 사회에 서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라는 인간적인 예속 관계가 사라지고 법적으로 평등하고 자유로운 주체들 간의 관계가 새로 정립된다. 이 과정에서 인간들은 스스로의 노동력을 상품의 형태로 내다팔 수 있는 ‘자유로운 노동자’의 지위를 얻는다. 이러한 지위는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으며, 노동력은 화폐와 ‘등가적으로 교환’된다. 동시에 서로 다른 사용가치를 가진 상품들이 화폐라는 상품의 매개를 통해 등가적으로 교환될 수 있다는 물신적인 믿음이 새롭게 생겨난다. 화폐는 추상적으로 보편적인 가치의 위치로 올라서서 다른 상품들의 다종다각한 사용가치를 자신의 형태로 표상할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자유로운 노동자’의 지위를 얻은 인간의 노동력 상품은 화폐를 통해 ‘법적인 계약에 근거해 등가 교환’되지만, 그 이면에서 가치를 잉여적으로 더 만들어내게 된다. 자본은 이러한 잉여가치에 대해서는 화폐를 지불하지 않고 ‘착취’한다. 즉, 자본주의 이전에는 인간 관계에 직접 기입되었던 물신주의가 ‘사물들 사이의 관계’인 상품 물신으로 자리를 옮긴 셈이다. 전자본주의적인 사회적인 불평등과 지배 - 종속 관계(착취 관계)가 자본주의 시기에 법적으로 평등한 주체들의 관계 속에서 사라진 듯 보이지만, 실은 잉여가치에 대한 착취로 형태를 바꾸었을 뿐인 것이다. 이때 지배 - 종속의 관계가 자본주의에서도 계속되고 있다는 ‘진리’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주체라는 관계에 대한 상상 속에서 억압된다.

 

  맑스는 이러한 자본주의적인 착취 관계가 본격적인 저항에 직면하지 않게 되는 원인을 이데올로기라는 문제 설정 속에서 찾는다. ‘허위 의식’으로서의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가 피지배 계급에게도 내면화되어 혁명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차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젝이 볼 때,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현상은 맑스가 말하는 것처럼 ‘그들(피지배 계급)이 그것(착취 관계)을 알지 못한 채 행하는’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지 않다. 그가 보기에, 인간들은 이미 억압된 진리와 물신주의적 효과의 허구성에 대해서 ‘냉소적’으로 알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돈이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가치를 ‘표현하는 수단’일 뿐이라 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 위에서도 돈은 사물들 간의 관계, 즉 상품 교환의 “물질적 현실 속에서 스스로 부(富) 그 자체의 직접적 구현물”(Zizek, 1989/2013)인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 따라서 지젝에게 이데올로기는 이미 구축된 현실을 사람들 지식의 차원 에서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작동 안에 직접 기입되어 현실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직접 현실을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야말로 맑스가 빠져있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인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상품 관계의 물신적이고 착취적인 효과들에 대해서 냉소적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적 행위를 통해 자본주의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지젝은 물신주의에 대한 이러한 해석 속에서 ‘믿음과 내밀한 감 정들이 진정성이 손상되지 않은 채로 타인에게 전이되거나 위임될 수 있다’는 라캉의 명제를 이끌어낸다. 마치 물신주의적 믿음이 자본 주의적 주체들에게선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상품 교환 관계라는 인간 바깥의 관계로 대체되어 ‘대신’ 믿어지고 작동하는 것처럼 말이 다. 지젝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코미디 TV 프로그램들에 일반적으로 삽입되는 ‘녹음된 웃음’을 든다. TV 속 타자가, 웃어야 하는 현대인을 대신해서 웃는 일을 대신 해주는, 인간 외부의 감정적 대체물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웃는 것이 우리가 아님을 냉소적으로 알고 있 지만, 그럼에도 그 웃음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종합하자면, 자본주의적인 사회 구조가 자유롭고 평등한 계약 주체로서의 인간들의 관계와 그 바깥에서 물신주의적으로 착취와 불평등을 산출하는 상품 관계의 합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자본주의적인 감정과 감각의 구조 또한 인간과 그 바깥에서 ‘대신 웃어주는 소리’처럼, 대신 느끼고 감각하는 대상들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본주의적인 감각의 구조 속에서 미디어를 통한 감 각과 감정적인 전이가 가능해졌다는 해석을 해볼 수 있다. 우리는 미디어 속 인물과 직접적이고 인간적인 관계가 불가능하며, 사실은 상관도 없는 사이라는 것을 냉소적으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감정과 감각을 미디어의 재현들을 통해서 대신 느낄 수 있다. 심지어 는 별다른 서사 구조 속에 우리를 빠뜨리지 않고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 '포르노'라는 성적 대리 장치의 작동이나 '푸드 포르노'라고 불리기도 하는 먹방의 대리적 감각 작동이 가능해진 것은 이러한 자본주의적 구조의 결과이다. 우리는 이러한 구조 속에서 '먹지 않고서도 배부르게 되는' 감각을 경험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리적인 감각의 관계는 어떤 문제들을 만들어 낸다. 직접 대면하지 않는 존재들에 대해서 우리가 훨씬 더 약한 윤리적 강제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미디어 속 인물들을 통해 감각하는 것의 정도는 강해졌지만, 그 인물들과의 관계는 인간보다는 사물과의 관계에 가까운 무엇인가로 남아있다. 때문에 우리는 사물로서의 미디어 속 인물에 대한 윤리적 태도를 취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나 미디어 속 인물은 나름대로의 현실을 살아내는 사람들이며, 사물로서 취급될 때 인간적 고통을 느끼는 주체들이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 을 냉소적으로 알면서도 모른 체한다. 포르노 영상 속 배우들이 착취적인 산업 구조와 학대 속에서 고통 받고 있음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사람들이나, 악성 댓글을 활용해 유튜버나 인플루언서들의 감정에 생채기를 내는 데 거리낌을 느끼지 않는 ‘악플러’들은 이러한 냉소 적인 거리 속에서 그들을 사물로서 대하는 자본주의적 주체들이다. 먹방 유튜버의 감각을 우리의 것으로 느낄 수 있는 우리는, 이러한 냉소적인 거리를 통해 언제든 미디어 속 인물들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오히려 적극적으로 생채기낼 수 있는 주체 구조 속에 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미디어 속 감각의 생생함’에 경탄하거나 ‘미디어 속 인물에 대한 윤리’를 규범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이러한 미디어 속 세계와 현실 속 주체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더 많은 연구와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적인 감정과 감각 관계의 구조적인 폭력에 대해 논의해야만 한다.

먹방 유튜버 입짧은햇님 영상 화면 캡처. 2020.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