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20. 10. 16. 09:00

석사과정 이 가 효 (LI JIAYI)

 

코로나19가 우리의 생활 패턴을 완전히 바꿔놓고 있다. 올해 초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수많은 바이러스 중 특히 코로나19 와 같이 생존에 관련된 충격적인 경험에 의해 굵은 전용신경 회로가 구축되면 그 비극성으로 전체성이 형성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안과 우울, 무기력, 스트레스에 중독된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이와 같이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로 인해 트라우마가 생긴 사람이 많다. 하지만 바이러스보다 우리의 삶을 더욱 해치는 것들은 눈으로 보이지 못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며 한 가을의 밤 영화 <밀양> 다시 찾아보았다.

 

  일상생활에 널리 사용되면서 ‘트라우마’라는 단어가 가지는 무게가 다소 가벼워졌다고 볼 수 있으나, 사실 트라우마는 정신 건강의학과의 진료 항목에 해당하는 질병으로 일상에서 평범하게 사용할 만한 단어는 아니다. 사람들은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9·11테러, 대구지하철 참사 등 대형사건, 사고가 발생했을 때 함께 듣게 된다. 소설, 영화 등 스토리가 있는 문예물에서 트라우마는 ‘주인공의 극복 대상’으로 자주 사용된다. 영화 <밀양> (2007, 이창동 감독) 역시 주인공 신애(전도연 분)가 겪는 트라우마와 그에 대한 대응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원작이 라고 할 수 있는 이청준의 소설 <벌레이야기>가 있기 때문인지 영화에 대한 기존 연구나 보도에는 소설과 영화라는 형태 변화에 따른 서사 변용에 대한 인식, 교육 측면에서의 깨달음이 담겨 있다. 영화가 개봉한 지 10년 이상 지난 만큼 다방면에서 많은 연구가 누적되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이야기를 하려 한다. 영화 <밀양>은 주인공 신애의 트라우마 극복 시도 이야기로 읽힐 가능성이 존재 한다. 이에 본 글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바탕으로 주인공 신애가 충격적인 사건을 겪으면서 어떤 트라우마들을 마주하고, 이에 대해 어떠한 대응을 보이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 트라우마로부터의 회피

 

영화는 차창 너머의 맑은 하늘을 담으며 시작하지만, 그 하늘을 바라보는 주인공 신애의 마음은 편치 않다. 기혼자라면 절대 겪고 싶지 않을 두 가지 사건-배우자의 외도와 그 배우자의 사망-을 겪은 후 아들 준을 데리고 서울에서 밀양으로 이동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밀양으로의 이동은 여행이 아닌 이사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제까지 삶의 터전이었던 서울을 떠나 완전히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애의 이사는 배 우자의 외도와 배우자의 사망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에 대한 ‘회피’이다. 배우자의 외도와 사망은 하나만이라도 개인에게 충분히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두 개의 사건을 연달아 겪은 신애에 게 기존의 거주지는 더 이상 안락한 보금자리가 될 수 없다. 기존 의 거주지에서 그녀는 ‘평범한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였지만 이 제 그녀의 위치는 ‘바람핀 남편을 둔 아내’이자 ‘그 바람난 남편이 죽은 아내’로 변화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주위의 변화한 시선을 인지 할 때마다 그녀는 절대 떠올리고 싶지 않은 두 개의 사건 ‘배우자 의 외도’와 ‘배우자의 사망’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신애는 이사를 통해 이 두 가지 사건이 자신의 의식 차원으로 올라오는 계기 즉, 주위의 시선과 마주치는 빈도를 줄인다. 그리고 이는 신애가 두 사건을 자신의 무의식 단계에 머물도록 효과적 으로 ‘억압’하도록 만든다. 물론 타 지역으로의 이동이 그녀가 겪은 사건들을 없는 일로 만들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러한 공간 이동을 통해 신애는 ‘배우자의 외도’와 ‘배우자의 사망’ 중 전자에 대한 부담감을 줄인다. 실제로 밀양에 도착한 신애가 연기한 것은 ‘서울에서 온 돈 많은 과부’였으며, 이 과정에서 그녀의 남편이 ‘외도하고 사망한 사실’은 감춰진 정보가 되고 밀양은 ‘외도하고 죽은 남편의 고향’이 아닌 ‘죽은 남편의 고향’이 된다. 물론 밀양 사람들 중에도 왜 하필 죽은 남편의 고향으로 온 것인지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신애가 말만 하지 않는다면 죽은 남편의 ‘외도’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정보가 되는 것이다. 자신을 찾아온 남동생에게 “난 서울이 싫어. 여기가 좋아. 여기가 왜 좋은지 아니? 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거든. 나 여기서 새로 시작할거야.”라는 신애의 말은 그녀가 서울에서 느꼈던 부담감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새 공간에 진입하는 그 순간 신애의 가족은 아들인 준뿐이기에 신애는 그저 ‘아들과 사는 엄마’의 위치를 획득할 수 있고, 이것은 그녀 가 바라는 새로운 시작의 발판이 되어줄 것이다.

 

  그런데 신애가 선택한 밀양이라는 공간은 바로 그녀에게 상처를 준 남편의 고향이다. 그녀가 거주지를 옮기는 중요한 선택을 하면서 자신의 부모에게조차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점, 밀양 사람 중에도 그녀가 왜 하필 죽은 남편의 고향으로 왔는지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는 점 등은, 자신을 배신한 배 우자의 고향으로 가서 새출발을 하는 그녀의 행동이 상식선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임을 드러낸다. 그 이유는 신애가 자신을 찾 아온 남동생과 피아노 학원에서 나누는 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신애는 남동생과 싸우는 과정에서 인정할 것은 인정하라는 남동생에게 “너 가! 그런 소리하려면 지금 당장 서울 올라가!”라고 외친다. 죽은 남편의 외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또한 신애의 대사 에서 죽은 남편은 ‘그 인간’이기도 했다가 ‘준이아빠’이기도 하고, 보고 싶은 존재이기도 하고, 가족만 사랑했던 존재이기도 하다. 신애에게 죽은 남편은 부정적인 감정과 그리움이 섞인 대상인 것 이다. 즉 신애가 밀양으로 이사하는 것은 친정 가족을 포함하여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과의 연계를 최소화함으로써 배우자의 외도를 부정하고, 배우자가 자신에게 준 충격을 억압한 채 새롭 게 출발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출처 : 네이버 카페 (https://cafe.naver.com/moviejaryo/5532)

 

두 번째 트라우마의 승화 실패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새롭게 출발하고 싶었 던 신애의 바람과는 달리 밀양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다. 이사와 함께 ‘바람났던 남편이 죽었다’라는 사실은 어느 정도 덮어 둘 수 있었으나, 어찌 되었건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서울에서 온 과부’ 로 인식한다. 외지에서 온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빠르게 자리를 잡고자 그녀가 선택한 것은 서울에서 온 ‘돈 많은’ 과부를 연기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거주할 공간과 피아노 학원 문제를 해결한 후, 실제로 땅을 살 것은 아니지만 땅을 보러 다닌다. 그녀는 지역 사람들과 모인 자리에서 부동산 의 전화를 받는 모습을 연출하는 한편,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 동네 아주머니들과 노래방에서 놀기도 한다. 어느 날, 노래 방에 들렀다가 늦게 귀가한 신애는 집에 아들 준이 없음을 알게 된다. 신애가 부유하다고 생각한 누군가가 돈을 노리고 준을 납치한 것이다. 신애는 돈이 많은 ‘척’ 했던 것이지 실제로 부유 했던 것은 아니기에 납치범이 요구한 금액을 전부 마련할 수 없 었다. 납치범의 요구에는 못 미치는 금액을 약속된 장소에 가져다 놓지만 준은 사망한다.

 

  새로운 시작의 장소가 하필 밀양이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 하는 친정 가족들의 반발과 관계 단절, 외지인을 쉽사리 받아들 이지 않는 지역 사람들의 텃세조차도 감내할 정도로 당시의 신애 에게는 삶에 대한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아들의 납치와 사망이 라는 사건을 겪으며 신애는 삶을 지탱하고 있던 것들을 모두 상 실한다. 밀양에서 살아가기 위해 만들고 있던 동네 사람들과의 유대관계는 치명타를 입었고, 그녀가 결혼과 출산을 통해 만들 었던 자신의 ‘가족’은 이제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평소 신애는 동네 약사의 교회 전도를 흘려들었지만 극심한 절망에 빠져 고통스러 워하던 중 스스로 교회를 찾고, 예배에 참여해 울부짖고 통곡함 으로써 아들의 죽음 앞에서 억압해 두었던 감정을 분출한다. 이 후 신애는 교회 활동에 매우 열심히 참여하게 되고, 교회에 다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 살해범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를 용서 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큰 결심을 하고 아들 살해범 면회를 가지 만 그녀가 마주한 살해범은 자신은 이미 하나님에게 용서받아 마음이 편안하니 당신(신애)도 편안해지라고 말한다. 이에 신애는 ‘유가족인 내가 아직 범인을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범인을 용서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하며 큰 충격을 받고 살해범을 용서 하지 못하고, 자신이 믿었던 신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만약 신애가 아들 살해범을 용서하는데 성공했다면 신애는 자신이 억압해두고 조금씩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슬픔, 분노 등 의 감정을 모두 초월하여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승화의 단계에 도 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살해범의 용서와 내적인 승화에 실패했기 때문에 이후 그녀는 자신이 의지하고 믿었던 것 들에 대해 반항한다. 교회 부흥회에서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를 틀어 예배를 망치고, 미수에 그치기는 하지만 기혼자이고 독실 한 기독교 신자를 유혹하여 정사를 나누려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녀의 반항은 사과를 깎던 칼로 자신의 손목을 긋는 자살시도로 까지 이어지게 된다. 아들 살해범을 용서하겠다는 결심을 통해 승화 단계 직전까지 이르렀지만 결국 용서에 실패함으로써 그녀는 승화에 실패하고, 신애의 트라우마 역시 해소되기는커녕 반항과 자살시도라는 가장 극단적인 반동행동으로 표출된다.

 

트라우마 대응와 나의 생각

 

결론적으로 영화 ‘밀양’은 신애가 두 번째 트라우마 승화에 실패 하고 반발, 반항, 퇴행 등의 행동을 보인 끝에 자살시도라는 극 단적인 선택에 이른다는 점에서, 트라우마 극복에 실패한 인간 이 겪는 상황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럼에도 신애가 집에서라도 자신의 손으로 머리카락 자르기를 시도했다는 점, 그리고 머리카락을 자르는 신애의 곁에서 종찬이 거울을 들어주 고 있다는 점에서 신애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직면하고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영화는 연이어 큰 사건을 겪는 여성이 자신의 트라우마에 대응하는 방식을 보여줌 으로써 트라우마 극복의 어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의지를 갖고 트라우마 극복에 도전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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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20. 10. 16. 09:00

김지은 (전북녹색연합 사무국장)

 

 

생전 이런 비는 처음 봐. 전에는 비도 알맞게 왔고, 눈도 알맞게 왔고, 뭐든 알맞게 왔어.” 54일이라는 역대 최장의 장마기간을 기록한 폭우로 올 여름 큰 침수 피해를 입은 남원 주민의 이야기이다. 10일 동안에 연달아 세 번의 태풍이 한국을 강타했고, 지난 겨울엔 눈이 거의 내리지 않았다. 한국에서만 자라는 구상나무는 지리산과 한라산에서 집단 고사하고 있고, 제주의 산호도 떼죽음을 당하고 있다. 1,200년을 살아온 아프리카의 바오밥 나무들도 돌연 쓰러졌다. 중국에선 두 달 넘게 지속된 폭우로 한국의 인구보다 많은 기후난민이 발생했고, 지구에서 가장 춥다는 시베리아는 관측사상 최고 기온인 38도를 기록하여 과학자들의 예측보다 80년 빠르게 기온이 변하고 있다. 호주의 대규모 산불은 7개월 동안 꺼지지 않았고, 시베리아 산불에 이어 계속된 미국 서부 해안의 산불은 남한 면적의 20%에 해당하는 면적을 불태우고 있다. 지구 최대의 습지인 브라질 판타나우는 1년 째 불타고 있다. 서유럽은 40도가 넘는 폭염에 시달렸고, 미국과 중동의 일부 지역은 50도가 넘는 기온을 기록했다. 영구히 녹지 않는다는 동토층이 녹아내리면서 이산화탄소 보다 온실효과가 30배 이상인 메탄가스가 방출되고 있고, 알래스카의 빙하는 예측보다 100배 빨리 녹고 있다. 불과 며칠 전에는 40도에 육박하는 폭염에 시달리던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 지역이 하루 만에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서 폭설이 내리는 믿지 못할 기상이변이 발생했다.

 

인간과 다른 생물종들이 적응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뭐든 알맞게 오던 기후는 이제 인간과 다른 생물종들이 적응할 수 있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변하면서 점점 생존할 수 없는 조건으로 악화되고 있다. 여기에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병까지 겹쳐 전 세계는 다중의 재난 상황에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지구 온도 상승으로 인한 기후재난의 극히 일부분이며 시작에 불과하다. 지구 평균 온도가 단 1도 상승한 것만으로도 이미 수많은 생명들이 죽었고, 생태계는 연쇄적으로 급격히 붕괴되고 있으며 이 연쇄적인 고리의 끝은 인간을 향하고 있다. 기후위기는 100년 후에나 일어날 미래의 위험도, 먼 나라 북극곰만의 문제도 아니다. 인류와 다른 생물종들에게 현재 진행중인 재앙이다.

 

지난 9일 세계자연기금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50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전세계 야생동물의 개체수가 70% 가까이 급감했다. 화석기록을 보면 지난 6억년 동안 지구에는 총 다섯 번의 생물 대멸종이 있었다고 한다. 5번의 대멸종은 대규모 화산폭발, 소행성 충돌 등 모두 자연적인 현상에 기인하였다. 대멸종 시기에 생물종의 60% 이상이 영원히 사라졌다는 것을 돌이켜본다면 과학자들이 우려하고 있듯, 우리는 지금 6번째 대멸종에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자연적인 원인이 아니라 오롯이 인위적인 산업자본주의 체제가 원인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절멸 위기이다.

출처: https://www.jatinverma.org/what-is-the-ongoing-sixth-massextinction

흔히들 기후위기의 원인을 인간 활동과 탐욕이라 말하고, 코로나 감염병을 중국의 탓으로 돌리곤 한다. 그러나 기후위기와 코로나의 뿌리는 동일하다. 산업자본주의 체제에 의한 자연과 인간, 생물종에 대한 착취가 원인이다. 기후위기의 원인을 단순히 인간의 무한한 욕망 때문이라 말하고 코로나의 원흉을 중국이라고 말하는 순간 기후위기와 코로나가 가진 계급적·착취적 속성은 숨겨지고, 그 책임의 당사자와 해결 방안은 모호해지고 무의미해진다. 세 시간을 맨발로 걸어 학교에 가는 아프리카의 어린아이와 비싼 자동차를 소유하고, 비행기로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북반구 부자어른은 기후위기에 같은 부채를 가진 동일한 부류의 인간이 아니다. 중국은 감염병의 발생지일 뿐이지, 감염병의 원인이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들여다볼 수 없다면 코로나와 같은 감염병은 계속 등장할 수 밖에 없고, 기후위기로 인해 빙하와 영구동토층이 녹으면서 인류가 대응할 수 없는 바이러스가 더 빈번하게 출현하게 될 것이다.

 

지구 온도를 상승시킨 주요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의 농도는 지난 80만년 동안 300ppm 이하를 유지해왔는데 산업혁명 이후 단 100년도 안되는 시간 동안 무려 100ppm 이상이 증가했다. 1만년 동안 지구 평균 온도는 약 5도가 올랐지만, 인류는 산업화로 불과 100년만에 지구 온도를 1도 가까이 상승시키고 말았다. 2018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 총회에서 지구 온도 2도 상승도 위험하다며, 상승 제한폭을 1.5도로 낮추기로 합의했다. 세계 각국은 올해 안에 유엔에 2030년 온실가스 감축목표와 2050년 장기 저탄소 발전전략을 제출해야 한다. 2020년은 인류 문명과 지구 생물종의 운명에 결정적인 해이다. 세계 각국과 지방정부는 기후위기 비상사태를 선언하기 시작했고, 지구 온도 상승을 1.5도 이내로 제한하기 위한 구속력 있는 제도와 정책들을 마련하며 탈탄소 사회를 위한 전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물론 트럼프와 같이 여전히 기후위기를 부정하거나 새로운 이윤 창출 수단으로 악용하는 자본가와 기득계층 또한 득실하다.

 

출처: https://climate.nasa.gov/

과학자들은 지구 온도 상승을 1.5도 이내로 막지 못한다면 극한적인 기후 재난과 생물 대멸종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나아가 2도를 넘기게 된다면 인간이 모든 활동을 멈추고 온실가스를 전혀 배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후시스템은 회복력을 상실하여 붕괴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IPCC2018년 특별보고서를 통해 66%의 확률로 지구 온도 상승폭을 1.5도 이내로 억제하는데 남아있는 탄소배출총량(탄소예산)420기가톤으로 추정하였다. 이 남아있는 탄소예산을 기준으로 1.5도 이내로 제한하기 위해서는 2030년까지 2010년 대비 최소 45% 이산화탄소를 감소시키고, 2050년경에 넷제로에 도달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하지만 영구동토층이 녹으면서 추가적으로 배출될 탄소와 습지에서 배출될 메탄으로 배출할 탄소량은 100기가톤까지 줄어들고, 또한 이산화탄소 이외의 온실가스의 감축 수준에 따라 잔여탄소배출총량은 250기가톤까지 추정되었다. 2018년을 기준으로 남아있는 탄소예산을 250기가톤으로 추정한다면, 2020년 현재, 1.5도 이내로 제한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4년도 남지 않은 셈이다. 게다가 1.5도 이내로 제한할 가능성을 66%가 아닌 100%로 고려한다면 과연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더군다나 IPCC의 권고 사항은 지구 스스로 온도 상승을 일으키게 되는 임계점에 대한 예측이 빠져있는 매우 보수적인 기준이다. 그린란드와 남극의 빙상 손실, 영구동토층에서의 탄소 방출, 열대우림과 산호초 서식지의 붕괴 등 예측 불가능한 수많은 기후 급변요소들을 고려한다면, 1.5도 상승은 IPCC의 예측처럼 몇 십년 후가 아니라 급격하게 일어날 가능성도 농후하다. 세계기상기구가 최근에 발표한 기후전망보고서에 따르면 전 지구적으로 향후 5년 동안 한 달 이상 산업화 이전보다 최소 1.5상승을 경험할 가능성이 70%에 달하는 것으로 예측됐고, 향후 5년 안에 1.5상승 확률이 20%에 이를것으로 예측됐다. 한 번 배출되면 수 백년에서 수 천년 동안 사라지지 않고 대기중에 머무르는 온실가스의 속성 때문에 그야말로 지금 당장 모든 온실가스 배출을 중단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긴급하고, 위중한 비상 사태이다. 심지어 2018년 극지연구소 북측해빙예측사업단의 책임연구원은 지금은 탄소 배출 제로만으로도 부족하고, 오히려 마이너스 배출로 대기중의 탄소를 땅속으로 포집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라고 경고했다. 1.5도 상승은 생태계에 결코 안전한 목표가 아닌 것이다. 또한 과연 1.5도라는 온도가 우리가 목표로 삼고 수용해야 할 온도인지도 의문이다. 0.5도 온도가 상승되는 동안 희생될 생명들을 누가, 무슨 권리로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뜨거워진 지구 속에서 극한적인 기상현상과 기상이변은 더 빈번해지고 강해질 것이며 일상화 된 폭우와 폭염, 가뭄과 기근, 태풍, 산불의 연쇄 고리 속에 인간 뿐 아니라 수많은 생물종들이 생존기반과 목숨을 잃을 것이다. 곳곳에서 분쟁과 폭력, 전쟁이 이어질 것이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한국 정부와 정치권, 기업들은 비상사태에 걸맞는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과감한 대책을 세우지 않고, 안일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기후위기를 선제적으로 대응한다면서 발표한 그린뉴딜에는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온실가스 감축계획과 배출제로 목표설정이 빠져있다. 더군다나 기후 위기가 많은 사람들의 생존과 직결된 농업부문에서 가장 먼저 심각한 피해와 희생을 불러옴에도 불구하고, 농업부문의 대책이라는 것이 고작 디지털 인프라 구축작업에 태양광 설치, 공공와이파이 공급이 전부이다. 기후위기는 곧 농업의 위기이자, 먹을거리의 부족과 직결되는 생존의 위기이다. 한국은 OECD 34개국 중 식량자급률이 32위로 최하위에 속한다. 쌀을 제외한 식량자급률 8.9%, 사료를 포함한 곡물자급률이 3.1% 밖에 되지 않아 기후위기로 인한 식량 부족에 가장 먼저 심각한 충격을 받을 국가 중 하나이다. 온실가스를 대량으로 배출하는 산업과 일자리를 어떻게 정의로웁게 전환시킬 것인지, 교통부문과 축산업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를 어떻게 감축할 것인지 고민도 제대로 된 계획도 없다. 공기업인 한전은 해외 석탄발전 투자를 강행하고 있다. 여전히 경제성장이 제일 중요한 목표인 그린뉴딜은 대기업과 기득 계층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의롭지 못한 정책일뿐만 아니라, 기후 위기를 진짜 위기로 인식하지 않는 안일함과 절망만을 확인시켜줄 뿐이었다.

 

기후위기의 원인은 자연과 인간을 끊임없이 착취해 온 산업자본주의체제, 인간중심주의, 원자론적세계관, 성장중심주의, 개발주의, 우월주의이다. 문제의 원인에 대한 절실한 성찰과 전환 없이 에너지원을 재생에너지로 바꾸고, 내연차를 전기차로 바꾸는 등의 기술적인 수단만으로는 기후위기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기술적 처방은 또 다른 배제와 차별, 위험을 가져올 뿐이며 실질적인 온실가스 감축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생산 규모와 소비 규모를 유지하는 걸 전제하고, 경제성장도 지속하면서 기후위기도 막을 수 있다고 말하는 건 기만이다. 그런 건 이제 불가능하다. 유한한 자연적 수용성 안에서 성장은 이제 물리적인 한계를 넘어섰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윤리적인 한계에 이르렀다. 자본주의 구조 안에서 기후위기를 막으면서 불평등과 경제위기 등도 함께 해결할 수 있다는 그린뉴딜은 사기 정책이다. 이제 그만 성장할 수도, 성장해서도 안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성장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하자. 코로나와 같은 감염병 역시 그저 마스크를 쓰고 방역을 철저히 하고, 지원금 몇 만원 등의 일시적인 대응 수단만으로 결코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코로나를 불러오고 확산시킨 산업자본주의의 자연 착취, 야생동물의 거래와 서식지 침범, 자본주의 축산업, 세계화, 신자유주의 무역체제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기후위기로 인한 감염병은 더 빈번히 발생할 것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에게 돌아가 희생과 불평등을 더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출처: 환경부 온실가스종합정보센터, 세계은행 (https://newsroom.posco.com/kr 2019년 11월 29일 포스코 에코 리포트에서 재인용)  

 

우리는 기후위기를 불러온 산업자본주의 체제를 넘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 용기를 내어야 한다. 기후위기는 계급차별, 종차별, 성차별, 세대차별, 지역차별을 넘어 더 좋은 세상을 요청한다. 생산수단과 자본을 독점한 자본가의 이윤증식을 위한 자연과 인간, 생물종에 대한 모든 착취와 지배를 끝내야 한다. 기후위기가 가진 계급적 속성을 외면하고, 성찰하지 않고, 벗어나지 않는다면 제일 약하고 가난한 생명들부터 희생당하고, 사라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개발하지 않고, 성장하지 않고 지구상의 많은 생명들과 새로이 관계 맺으며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적극 찾아야 한다. 단순히 상품을 소비하고 폐기하는 단절된 소비자로서가 아니라, 에너지 생산과 물질 생산이 남긴 쓰레기와 위험, 부담을 약자와 지역, 비인간 생물종, 미래 세대에게 끊임 없이 외부화시키고 전가하는 무책임한 구조를 바로 잡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규정하는 것처럼 무한한 욕망을 가진 탐욕스러운 존재가 아니다. 무한 경쟁과 욕망은 우리의 본성이 아니며 자본가가 필요로 하는 허상이다. 지구에는 인간만 사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결코 만물의 영장이 아니며, 우리에겐 어떤 생물종도 지배하고 착취할 권리가 없다.

 

석탄발전소와 핵발전소를 모두 멈추어야 한다. 제주도·새만금 신공항 사업, 대규모 간척사업, 지리산 산악열차 사업 등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의 모든 국가 폭력과 개발행위는 중단되어야 한다. 전혀 정의롭지 못한 방식으로, 지역주민을 무시하고 대규모 생태계 파괴를 가져올 대규모 중앙집중식 에너지사업을 멈추어야 한다. 자동차 이용을 과감하게 줄일 수 있도록 온실가스 배출을 최소화할 대중교통 체계를 급직적으로 확대하고, 자동차 도로를 과감하게 줄여 누구나 안전하고 보편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자전거 길로 전환해야 한다. 전세계 모든 교통수단을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은 온실가스가 축산업이라는 단일 산업에서 나오고 있다. 정부는 동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고 온실가스를 내뿜는 공장식 축산을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하는 일을 멈춰야 한다. 고기중독 한국의 식생활이 채식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촉구해야 한다. 생산수단과 생산규모를 자본가와 권력가가 아닌 노동자와 농민, 자영업자, 소상공인들이 민주적으로 조절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온실가스 배출 산업과 일자리가 정의롭게 전환될 수 있도록 소규모 지역 공동체 안에서 필요한 만큼만 적당히 생산하고 나누며 자급하고 자족하고 순환될 수 있도록 농업과 물질 생산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구조를 창발해야 한다. 먹을거리, 주거, 의료, 에너지, 교통, 교육 등을 시장의 상품이 아닌 공공의 영역에서 평등하고 안전하게 보장되고 나눌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소비하기 위해 자본주의 이윤체제에 저당잡혀야 했던 우리의 노동과 존엄, 자연의 가치를 되살려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자본주의체제를 선택한 것이 아니며 이 체제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면 바꿔야 하고, 우리는 다르게 살기로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이 생존을 위협하고, 더구나 잘못과 책임이 거의 없이 가난한 이들과 지역, 어린이, 청소년, 태어날 미래세대, 비인간 생물종들의 생존을 위협하며 부담과 희생을 전가하는 잘못된 체제라면 더더욱 바꿔야 한다. 그것은 단지 생존만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넘어선 자본주의 체제에게 박탈당한 사랑과 공감의 복원이다.

 

끊임없는 성장과 개발, 발전 이데올로기에 지배당하는 사회가 아니라,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의 수용성 안에서 생명과 기쁨, 관계, 우애, 평화, 정의가 중심 가치가 되는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두 번째 지구는 없다. 경제성장도 지속하면서 기후붕괴를 막을 수 있을 만큼 여유롭고 한가로운 상황이 아니다. 기후위기에 중간은 없다. 자연은 타협하지 않다. 대기 과학자인 조천호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지구에 의존적이지만, 지구는 우리에게 의존해야 할 이유가 없다.” 이제 우리는 대규모 생물종의 절멸위기를 가져온 기존의 체제를 바꾸지 않으면 안되는 엄청난 도전과 역사적인 기로에 서있다. 우리에겐 절망과 포기, 부정 대신 새로운 세상을 디딜 용기와 연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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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20. 10. 16. 09:00

이 준 형 (일반대학원 신문방송학과 박사수료/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연구원)

 

‘미디어 속 먹는 행위를 본다는 것’, 즉 먹방은 이제 ‘새로운 사회적 현상’이라고 소개하기도 어려운 무엇인가가 된 듯하다. 2000년대 후반부터 한국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먹방은 이제 전세계적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 현상의 자연스러움 이면에 어떤 메커니즘이 있는가에 대해서 설득력 있는 해석이 제출되고 있지는 않다. 먹방 시청자들에 대한 조사를 통해 ‘먹는 모습에서 대리 만족을 느낀다’, ‘외로움을 달랜다’ 정도의 일반적 동기를 확인하거나 그로부터 현대 사회에서 인간들이 느끼는 ‘소외감’이 현상의 원인이라고 이야기되는 정도가 전부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소외감’이라는 변인만으로는 먹방의 인기라는 결과가 충분히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에 만족스럽지 않다. 어떤 질문이 계속 우리에게 남는다.

 

  ‘우리는 어떻게 실제로 먹지 않고도 먹방을 통해 만족감을 느끼는 존재가 되었을까’,

 

  나아가, ‘우리는 어떻게 실제로 감각하지 않고도 감각했다고 느끼는 존재가 되었을까’.

 

  이 글을 통해 먹방과 미디어를 매개한 감각의 구조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인간적 행위 혹은 감각의 외부화라는 이 문제설정에 대해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그의 대표적인 저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1989/2013)를 통해 꽤 설득력있는 해석을 제공한다. 그는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가 마치 사물들 사이의 관계처럼 나타나게 된다’는 <자본> 1권에서의 맑스 물신주의에 대한 정식을 나름대로 의 방식으로 풀어낸다. 지젝은 물신주의가 인간 사회의 고유한 효과이며, 각 시대에 특정한 형태를 취하게 된다고 본다.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적 관계에서 주인과 노예의 지배 - 종속 관계는 그 관계의 네트워크적 효과일 뿐인 것이 주인이 내재적으로 갖춘 아우라이자 권위인 것처럼 나타나는 물신주의적 관계가 된다. 반면, 자본주의 사회에 서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라는 인간적인 예속 관계가 사라지고 법적으로 평등하고 자유로운 주체들 간의 관계가 새로 정립된다. 이 과정에서 인간들은 스스로의 노동력을 상품의 형태로 내다팔 수 있는 ‘자유로운 노동자’의 지위를 얻는다. 이러한 지위는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으며, 노동력은 화폐와 ‘등가적으로 교환’된다. 동시에 서로 다른 사용가치를 가진 상품들이 화폐라는 상품의 매개를 통해 등가적으로 교환될 수 있다는 물신적인 믿음이 새롭게 생겨난다. 화폐는 추상적으로 보편적인 가치의 위치로 올라서서 다른 상품들의 다종다각한 사용가치를 자신의 형태로 표상할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자유로운 노동자’의 지위를 얻은 인간의 노동력 상품은 화폐를 통해 ‘법적인 계약에 근거해 등가 교환’되지만, 그 이면에서 가치를 잉여적으로 더 만들어내게 된다. 자본은 이러한 잉여가치에 대해서는 화폐를 지불하지 않고 ‘착취’한다. 즉, 자본주의 이전에는 인간 관계에 직접 기입되었던 물신주의가 ‘사물들 사이의 관계’인 상품 물신으로 자리를 옮긴 셈이다. 전자본주의적인 사회적인 불평등과 지배 - 종속 관계(착취 관계)가 자본주의 시기에 법적으로 평등한 주체들의 관계 속에서 사라진 듯 보이지만, 실은 잉여가치에 대한 착취로 형태를 바꾸었을 뿐인 것이다. 이때 지배 - 종속의 관계가 자본주의에서도 계속되고 있다는 ‘진리’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주체라는 관계에 대한 상상 속에서 억압된다.

 

  맑스는 이러한 자본주의적인 착취 관계가 본격적인 저항에 직면하지 않게 되는 원인을 이데올로기라는 문제 설정 속에서 찾는다. ‘허위 의식’으로서의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가 피지배 계급에게도 내면화되어 혁명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차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젝이 볼 때,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현상은 맑스가 말하는 것처럼 ‘그들(피지배 계급)이 그것(착취 관계)을 알지 못한 채 행하는’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지 않다. 그가 보기에, 인간들은 이미 억압된 진리와 물신주의적 효과의 허구성에 대해서 ‘냉소적’으로 알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돈이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가치를 ‘표현하는 수단’일 뿐이라 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 위에서도 돈은 사물들 간의 관계, 즉 상품 교환의 “물질적 현실 속에서 스스로 부(富) 그 자체의 직접적 구현물”(Zizek, 1989/2013)인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 따라서 지젝에게 이데올로기는 이미 구축된 현실을 사람들 지식의 차원 에서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작동 안에 직접 기입되어 현실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직접 현실을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야말로 맑스가 빠져있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인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상품 관계의 물신적이고 착취적인 효과들에 대해서 냉소적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적 행위를 통해 자본주의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지젝은 물신주의에 대한 이러한 해석 속에서 ‘믿음과 내밀한 감 정들이 진정성이 손상되지 않은 채로 타인에게 전이되거나 위임될 수 있다’는 라캉의 명제를 이끌어낸다. 마치 물신주의적 믿음이 자본 주의적 주체들에게선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상품 교환 관계라는 인간 바깥의 관계로 대체되어 ‘대신’ 믿어지고 작동하는 것처럼 말이 다. 지젝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코미디 TV 프로그램들에 일반적으로 삽입되는 ‘녹음된 웃음’을 든다. TV 속 타자가, 웃어야 하는 현대인을 대신해서 웃는 일을 대신 해주는, 인간 외부의 감정적 대체물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웃는 것이 우리가 아님을 냉소적으로 알고 있 지만, 그럼에도 그 웃음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종합하자면, 자본주의적인 사회 구조가 자유롭고 평등한 계약 주체로서의 인간들의 관계와 그 바깥에서 물신주의적으로 착취와 불평등을 산출하는 상품 관계의 합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자본주의적인 감정과 감각의 구조 또한 인간과 그 바깥에서 ‘대신 웃어주는 소리’처럼, 대신 느끼고 감각하는 대상들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본주의적인 감각의 구조 속에서 미디어를 통한 감 각과 감정적인 전이가 가능해졌다는 해석을 해볼 수 있다. 우리는 미디어 속 인물과 직접적이고 인간적인 관계가 불가능하며, 사실은 상관도 없는 사이라는 것을 냉소적으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감정과 감각을 미디어의 재현들을 통해서 대신 느낄 수 있다. 심지어 는 별다른 서사 구조 속에 우리를 빠뜨리지 않고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 '포르노'라는 성적 대리 장치의 작동이나 '푸드 포르노'라고 불리기도 하는 먹방의 대리적 감각 작동이 가능해진 것은 이러한 자본주의적 구조의 결과이다. 우리는 이러한 구조 속에서 '먹지 않고서도 배부르게 되는' 감각을 경험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리적인 감각의 관계는 어떤 문제들을 만들어 낸다. 직접 대면하지 않는 존재들에 대해서 우리가 훨씬 더 약한 윤리적 강제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미디어 속 인물들을 통해 감각하는 것의 정도는 강해졌지만, 그 인물들과의 관계는 인간보다는 사물과의 관계에 가까운 무엇인가로 남아있다. 때문에 우리는 사물로서의 미디어 속 인물에 대한 윤리적 태도를 취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나 미디어 속 인물은 나름대로의 현실을 살아내는 사람들이며, 사물로서 취급될 때 인간적 고통을 느끼는 주체들이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 을 냉소적으로 알면서도 모른 체한다. 포르노 영상 속 배우들이 착취적인 산업 구조와 학대 속에서 고통 받고 있음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사람들이나, 악성 댓글을 활용해 유튜버나 인플루언서들의 감정에 생채기를 내는 데 거리낌을 느끼지 않는 ‘악플러’들은 이러한 냉소 적인 거리 속에서 그들을 사물로서 대하는 자본주의적 주체들이다. 먹방 유튜버의 감각을 우리의 것으로 느낄 수 있는 우리는, 이러한 냉소적인 거리를 통해 언제든 미디어 속 인물들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오히려 적극적으로 생채기낼 수 있는 주체 구조 속에 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미디어 속 감각의 생생함’에 경탄하거나 ‘미디어 속 인물에 대한 윤리’를 규범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이러한 미디어 속 세계와 현실 속 주체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더 많은 연구와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적인 감정과 감각 관계의 구조적인 폭력에 대해 논의해야만 한다.

먹방 유튜버 입짧은햇님 영상 화면 캡처. 2020.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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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20. 10. 16. 09:00

 

 

 #2.5

 

날이 시원해졌습니다. 무더운 여름을 마스크와 함께 보낸 후 계절의 시계는 전환점을 돌았고, 어느덧 가을이 다가왔습니다. 여러 달을 거치며 코로나19는 일상의 일부가 되었고, 마스크 없는 일상을 상상하기란 여전히 쉽지 않아 보입니다. 지난 8월 말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상향은 코로나19로 인한 또 다른 풍경을 가장 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관광객이 북적거리는 공간이었던 오후 9시의 명동 거리는 인적이 드문 스산한 거리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남긴 것은 비단 쓸쓸하게 텅 빈 거리 뿐만은 아닙니다. 최근 한국 사회에 산재하는 몇몇 문제들은 거리두기 2.5단계에 이르러 더욱 극적으로 심화된 듯 합니다. 전광훈 목사와 보수 우파 개신교 세력이나 전공의 파업 문제는 단지 우리 눈에 드러난 것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코로나19가 만들어낸 균열은 아주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해 사회 곳곳의 문제를 비틀고 있습니다. 이에 서강대학원신문은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시작된 계기부터 그 너머의 시간까지 있었던 문제들을 해시태그(#)로 묶어내고자 합니다. #2.5단계를 통해 전례 없는 사회 변화 가운데 나타난 노동환경의 악화, 보수 우파 개신교의 문제, 의료계 파업, 사각지대에 놓인 예술인, 급격한 기후변화 문제, 학생들의 불안과 답답함 등 우리 삶에 각기 다른 균열을 가하고 있는 문제들은 무엇인지 담아내고자 합니다. 더 나아가 코로나19가 빚어낸 변화들을 두고, 어떤 관점과 태도로 바라보아야 할지 지면을 빌어 논의의 장을 열어보려 합니다.

 

편집장 하 태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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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20. 10. 16. 09:00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석사과정 호 규 현

 

[코로나의 초대 : 미디어 속으로]

 

인간에게는 다양한 욕구가 있다. 식욕, 성욕, 수면욕과 같은 생리적인 것들과 명예, 재물, 지식과 같은 특정 대상을 향하는 것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종류가 있다. 매슬로우(Maslow. A. H.)는 이러한 인간의 욕구가 5가지 범주를 갖고 우선순위가 있다고 보았다.(Maslow. A. H. 1943)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애정 및 소속의 욕구, 존경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충족시키고 다루는 방법에 대해 개인은 사회화를 통해 학습하고 내재화한다. 각자만의 ‘욕구 충족 메커니즘’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 나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위기는 이 안정적인 기제가 발동하는 것을 방해하고 때로는 아예 무너뜨리기도 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후 코로나19)은 앞서 말한 거대한 위기에 해당한다. 그것은 우리들의 기존 행동 양식을 변화하도록 강요했다. 건강에 대해 집중하게 하고, 만나서 식사하는 것을 지양케 했으며, 교육마저 접촉하지 않은 채 이뤄지도록 바꿨다.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을 제약하는 것은 매슬로우의 욕구 위계 3단계에 해당하는 ‘애정 및 소속의 욕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양한 욕구를 다루기 위해, 미디어 의 이용이 증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대부분의 욕구 충족 은 타인 없이 이루기 어려웠으며, 미디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미 공유를 돕는 도구”(나은영,2010)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코로나19는 우리를 어떻게 미디어로 초대했는지, 우리는 그 안에서 어떠한 변화 를 겪고 있는지 알아보자.

사례 1 : 뉴스

평소에 하루 동안 몇 번이나 뉴스를 확인하는가? 필자는 코로 나19가 심각해진 올해 1월 이후로는 하루에 적어도 5번 이상 은 뉴스를 찾아봤던 것 같다. 뉴스는 코로나19의 소식을 알려주는 가장 공신력 있는 정보원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유행 초기 에는 수많은 정보가 연일 쏟아져 나왔고, 많은 이들이 보도를 접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들였다.(방송통신심의위원회,2020.06.02.) 그렇지만, 코로나19는 우리 모두가 처음이었고 이는 뉴스도 마찬가지였다. 코로나19의 정보 자체가 많은 변수를 지님에 따라, 때때로 어제 전달한 내용이 다음날 수정되기도 하고, 지금 상황을 악용해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뉴스이용자는 ‘정확한 정보’를 접하기 위해 노력이 필요했다. 즉, 수용자의 주체성 있는 정보선별이 이전보다 더 강하게 강요된 것이다. 이에 발맞춰 학계와 언론사에서는 허위사실을 검증하고 올바른 정보를 얻을 수 있게끔 ‘팩트체크’코너를 더욱 활성화하기도 했다.

  한편, 뉴스의 특성상 보며 즐거움을 느끼기란 쉽지 않겠으나, 더욱 현실이 암담하게 느껴지는 소식이 많았다. N번방 사건, 자연재해, 의료진 파업 등 부정적인 정서를 일으키는 일들은 이용자들에게 정서적인 피로감을 더욱 가중했다. 뉴스로부터 누적되는 부정적인 정서를 상쇄하기 위해 사람들은 때때로 걱정 없이 즐길만한 다른 콘텐츠를 더 찾기도 했다

 

사례 2 : OTT서비스1) 및 동영상 플랫폼

바깥이 위험하다는 인식이 증가함에 따라 개인은 안전한 공간에서 시간을 더 많이 보냈고, 이는 ‘여가’에도 큰 영향을 미 쳤다. 실내에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에 대한 사용이 증가했고, 특히 OTT서비스 및 동영상 플랫폼의 이용량은 크게 증가했다. OTT서비스의 경우 시장이 꾸준히 크고 있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스마트폰 등의 미디어 이용 시간의 증가와 영화관 폐쇄 등 여러 조건이 맞물려 호황을 이루게 됐다. 특히, <감기,2013>과 같은 재난 영화들에 대한 이용도 급증했는데(허민녕,2020,02.28), 이는 비슷한 위기상황에서 희망적인 결말이 주는 잉여현실로부터의 만족감을 추구했다고 분석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유튜브와 같은 동영상 플랫폼에 대한 이용도 세계 각지에서 증가했는데, 큰 변화는 이들이 즐김의 장 (filed)에 더불어 다양한 정보 공유의 장으로서 입지를 견고히 다졌다는 점이다. 특히 이들은 급변한 생활양식에 적응하기 위한 유용한 학습 도구로 사용됐다. 예를 들어, 대면 행동이 제약된 시기에 맞춰 홈트레이닝, 요리, 자격증 시험 등에 대한 트래픽이 급격히 증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동영상 플랫폼이 검색 도구로써 더욱 활용되고 있으며, 앞으로 인터넷 상의 정보 접촉 양상에도 차이를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례 3 : SNS

SNS는 타인과 연결에 대한 어포던스를 지닌다.(나은영,2010) 어포던스는 환경이 개인에게 어떠한 기능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의미한다. 즉, SNS는 본인과 다른 사람 사이의 연결에 대한 기능을 제공하리라는 기대를 준다는 것이다. 코로나19는 사람들 간의 집적 연결을 방해하며, 대안인 미디어의 이용으로 자연스럽게 유도했다. 그 결과 각종 메신저와 더불어 SNS의 이용량은 눈에 띄게 증가했다. (권상희, 2020,03.27) 원인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코로나19에 관해 정제되지 않은 정보를 빠르게 얻 을 수 있다는 기대에 의한 것이다. 정제되지 않은 정보는 경험적이고, 언론이나 정부 발표에서는 알 수 없는 부분까지 알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국내에서는 최초 확진자가 등장했을 때와 31번 확진자 이후 확산이 증가한 시기에 트위터 버즈량2)이 매우 높게 증가했다.(닐슨코리아, 2020) 이는 발 빠르게 정보를 얻음과 동시에, 확진자 동선 같은 정보를 리트윗함으로써 서로 주의하고자 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다. 트위터나 네 이버카페, 커뮤니티 웹페이지 등이 이에 해당한다.

  두 번째 이유는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코로나19로 인한 여러 사건은 다양한 가치판단을 내리게 한다. 사람들은 불확실한 기준에 관해 판단을 내릴 때 다른 사람과 본인을 비교하려 하며,(Leon Festinger, 1954) SNS는 탁월한 도구가 된다. 지인이나 유명인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거나, 인터넷 공론장에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 본인의 의견을 비교한다. 또한, 코로나19 이전에 타인과 직접 교류가 활발했던 사람의 경우엔 사회적 관계에 대한 관성이 클 것이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게시하거나, 과거에 즐거웠던 순간을 담은 사진을 다시 공유하기도 한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밴드, 카카오스토리 등이 해당한다.

 

[미디어 밖에 사람이 있다.]

 

앞서 3가지 사례를 통해 코로나19사태 이후의 미디어 이용의 변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위기와 혼란 앞에서 미디어를 더욱 찾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고, 때로는 혼란으로부터 빠져나와 즐길 거리를 찾는다. 오히려 만날 수 없어서 더욱 간접적으로 타인과 연결하기 위해 붙든다. 이러한 이용양상은 가중되거나 변화가 있었을 뿐, 사실 특별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쉽게 지각하지 못할 만큼 미디어와 함께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끝으로, 글을 쓰고자 했던 의도를 밝히며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인간은 소중하다. 나는 세상에 유일무이한 스토리의 주인공이며, 당신도 그러하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미디어 안에 존재할 때에는 그 소중함과 가치에 대한 지각이 쉽게 낮아진다. 코로나19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을 제약하고, 미디어로 초대함으로써 이러한 현상을 더욱 강화했다. 문제는 분노와 혐오의 대상이 있을 때 극명히 나타난다. 대상이 응당 비판 받을 만하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해서는 안 될 표현이 너무 나도 쉽게 오간다. 미디어는 아무리 우리 몸에 깊숙이 달라붙더라도 어디까지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한다. 미디어 밖에 ‘존재 자체로 소중한’ 사람이 있다.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미디어 밖의 사람을 강조하며, 미디어 속에서 글을 쓰고 있는 호규현(27세)의 모습이다

            

참고자료

 

권상희, (2020,03,27.) 왓츠앱, 코로나19로 사용량 40% 증가, zdnet.co.kr/view/?no=20200327100942

나은영(2010),미디어 심리학.(pp. 33) 한나래출판사

닐슨코리아. (2020) 코로나19 관련 소셜 미디어 빅데이터 분석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보도자료(2020,06,02.), 「방통위, 코로나19에 따른 스마트폰ㆍPC 방송프로그램 이용행태 조사 결과 공개」

허민녕, (2020,02,28.) ‘컨테이젼’ ‘감기’, 압낭에서 터진 반갑지 않은 인기,msn.com/ko-kr/entertainment/movies/커네이젼감기-안방에서-터진-반갑지않은-인기/ar-BB10vnOu

Festinger, L. (1954). A theory of social comparison processes. Human relations, 7(2), 117-140.

Maslow, A. H. (1943). A theory of human motivation. Psychological Review, 50(4), 370?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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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20. 10. 16. 09:00

오유선 기자

 

 

새 학기가 시작되는 9, 학생들의 희망과 다르게 그들의 학교 생활은 지난 학기와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름내 안정세를 보이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이 8월 중순을 기점으로 급격히 증가했기 때문이다. 필수과목 및 실기 과목을 위주로 대면 강의를 계획했던 대학교들은 대부분 다시 전면 비대면 강의로 수업 방식을 전환했다. 특히 8월 말 사회적 거리두기가 2.5단계로 격상되면서 학교의 많은 시설 역시 이용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비대면 위주의 수업과 교내 시설들의 폐쇄 등으로 학생들은 이번 학기에도 학교를 이용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국내의 경우 위와 같이 비대면 방식을 위주로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외국에서 유학 중인 학생들의 상황은 어떨까. 특히 올해 3-4월에는 유학생들의 귀국이 잇따라 일어났던 바 있다. 그들의 학교 생활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었던 것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현재 국내 석사과정을 진행하며 박사 유학을 준비하고 있는 학생 S(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4학기 재학 중),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중 올해 초 귀국하게 된 학생 B(카네기멜론대학교, 3학기 재학 중), 그리고 대면 강의를 실시하는 학교 방침으로 인해 프랑스로 출국한 유학생 J(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1학기 재학 중)를 대상으로 짧은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를 통해 그들이 유학을 준비한 과정, 귀국과 출국을 결심하고 진행해왔던 과정 및 이에 대한 그들의 솔직한 심경에 대해 알아보았다.

 

1. 유학 준비 중인 경우 : 불확실한 선발 인원과 입학 후의 상황

우선 유학을 준비중인 경우에는 내년 입학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비교적 타격이 적은 편이라 할 수 있다. 유학 준비를 위해서는 오랜 기간 학교 내외에서 여러 사항들을 준비해 놓아야 한다. S씨의 경우에는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 미국 유학을 계획하며 다양한 준비를 해왔다. 교내에서는 조교 활동과 교수님들의 프로젝트에 최대한 참여하며 연구 경력을 쌓았고, 학교 외부에서는 GRE와 토플 등 필수 시험의 준비를 진행해 왔다. 그러던 중 코로나19의 발생으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계속해서 나름의 준비를 이어왔다.

다행히 유학을 계획하고 이를 지원하는 과정은 대부분 온라인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지원 과정에서 현실적인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다만 S씨는 코로나19의 세계적인 확산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지원을 준비 중인 학교가 기존에 비해 외국인 학생들을 적게 선발하지 않을지, 그리고 내년에도 코로나가 여전히 진행 중이어서 온라인으로 수업을 들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된다며 불확실한 상황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유학을 준비중인 경우에는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한 국제적인 상황이 일상생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선발 기준 및 합격 후 수업 방침 등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을 계속해서 가져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2. 귀국 후 비대면 강의를 듣는 경우 : 방 안에서 이어가는 유학생활

앞서 S씨는 유학을 준비하며 내년에도 코로나 진행 중일 경우 온라인으로 수업을 듣는 것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현재 귀국하여 국내에서 수업을 듣고 있는 B씨의 경우를 살펴볼 수 있었다. B씨는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중 올해 3월에 귀국한 후, 현재까지 2학기에 걸쳐 국내에서 비대면 방식으로 수업을 듣고 있다. 올해 3월 들어 미국 동부를 중심으로 코로나19의 확산세가 심상치 않아지자 B씨의 학교는 3월 중순 이후 남은 학기를 100% 원격수업으로 진행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이 유럽발 입국 항공편을 모두 금지하겠다고 발표했던 직후였고, B씨는 이에 서둘러 한국행 비행기를 예매하여 귀국했다.

B씨는 비대면 수업 방식이 한 학기 추가됨에 따라 현재 2학기째 국내에서 유학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B씨가 수강 중인 학교는 이번 학기의 경우 일부 강의는 100% 비대면 방식, 일부 강의는 대면+비대면(학생이 비대면 100% 수강을 원할 경우 해당 방향으로 변경 가능) 방식인 hybrid model을 사용 중이다. 비대면 강의는 zoom을 통해 이루어지며, 혼합형식의 강의 또한 대면 수업일의 경우 교실 내 상황이 zoom으로 방송되고 학생들끼리의 교류가 가능하다. 또한 몇몇 수업은 방학 중 강의내용을 미리 녹화하고 업로드하여 주차에 맞는 강의를 시청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B씨는 “zoom을 통해 비대면 강의를 실시간으로 듣는 수업과, 녹화된 zoom 강의를 추후 수강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들으면서 생체 리듬에 맞는 학교 생활을 찾아가고 있다며 한국에서 수업을 들을 때의 긍정적인 측면을 밝혔다. 하지만 시간대의 차이로 인해 녹화된 zoom 영상을 찾아봐야 하는 경우에는 실시간으로 수업을 수강하는 같은 과 친구들 혹은 교수님과 즉각적인 소통이 어렵다는 한계가 발생할 때가 있다. 또한 B씨의 전공인 예술경영학의 경우 대부분의 학생들이 학기 중 인턴십을 병행하고 있지만, 한국에 있는 B씨의 경우 병행할 수 있는 인턴십의 종류 등에서 현실적인 어려움이 나타난다. 이에 대해 B씨는 실무와 현장 경험, 네트워크 등이 중요한 분야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이러한 점들을 놓치고 간다는 데에서 아쉬움을 느낀다고 답했다.

현재 3학기 재학 중인 B씨는 이번 학기를 한국에서 마치고, 마지막 학기의 활동 및 취업 준비 등을 위해 내년 1월 중순~2월 중 출국 예정이다. 기존의 학교 일정대로라면 1월 초 출국을 해야 했지만, 다음 봄학기의 개강을 2월 초로 연기하는 학교 발표를 듣게 되어 이에 맞춰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하지만 양국의 코로나 진행 상황에 따라 추후에도 변동이 생길 가능성 또한 염두에 두고 있는 상황이다.

 

3. 출국하여 대면 강의를 듣는 경우 : 위험 인식 차이에서 오는 불안함

B씨는 내년 초의 출국을 계획하며 해당 시점에 코로나19가 확산될 경우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와 관련하여 이번 학기 대면 강의를 위해 8월 말 프랑스로 출국하여 현재 수업을 듣고 있는 J씨의 경우를 살펴볼 수 있었다. J씨의 경우 학사 생활 역시 프랑스에서 진행하던 중, B씨와 마찬가지로 3월에 학교에 락다운이 걸리면서 4월 말 한국으로 귀국했다. 바로 석사 입학을 준비하던 J씨는 학기의 시작에 맞춰 8 31일 프랑스로 다시 출국하여, 현재 프랑스에서 대면 강의를 들으며 석사 1학기를 진행하고 있다. J씨는 출국 과정을 회상하며장기 출국자의 경우 허용되는 마스크 150개를 들고 나갈 수 있었다. 출국장에 들어가서는 우선 마스크를 신고하고, 체온 측정 및 기대 좌석 거리두기, 기대 마스크 착용 필수 및 개인정보 작성 등의 과정을 통해 학교로 돌아갔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J씨가 재학 중인 통계학과는 전체 15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며 모든 수업이 대면 수업으로 진행되고 있다. 학교의 수업 방식과 관련하여 J씨는 강의실 내에서 학생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거리를 띄워 앉으며, 대강의인 경우에는 온라인 비대면 수업으로 진행하는 경우 또한 존재한다. 대강의를 듣는 인원을 반으로 나눠 홀수 주차와 짝수 주차에 현장수업을 진행하는 경우도 있으며, 소규모 수업은 전면 대면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답했다.

프랑스는 최근 일일 확진자가 10,000명 가까이 발생하면서 코로나 재확산 국가 중 하나로 주목 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하여 J씨는 일상생활에서 코로나19에 대한 대응 방식이 한국과 매우 다르다고 지적했다. J씨에 따르면 현재 프랑스에서는 코로나19를 위험으로 인식하는 정도가 낮으며, 야외 운동 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스크를 벗고 운동하고 있고, 대중교통 혹은 길에서 마스크 착용이 의무임에도 불구하고 통제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식당, 카페, 바 등도 모두 정상 운영을 하고 있고, 이러한 시설들에서 거리두기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또한 코로나 확진자 자가격리 또한 잘 이루어지지 않고 확진자들이 자유롭게 이동하고 있으며, 검사를 받으려고 해도 한참 기다려야 가능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러한 상황에 J씨는 코로나19가 나 혼자 kf94를 쓰고 거리두기를 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래도 사람들이 이를 위험으로 인식하지 않는 데에서 늘 불안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유학생들은 저마다 자신의 목표를 가지고 타국으로 나가 학업을 진행하려 결심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현재 불확실성이라는 점에서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도, 한국 귀국 후 수업을 듣는 학생도, 출국하여 대면 수업을 듣는 학생도 각자의 위치에서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 하루 빨리 상황이 안정되어 국내외 학생들이 학업에 전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거의 비어 있는 학교 연구실에서 마스크를 쓰고 이번 글을 마무리한다.

출처 : http://www.newstouch.site/news/articleView.html?idxno=9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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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20. 10. 16. 09:00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 김 진 호 목사 

 

 

 

출처: 김성민 

 

전광훈, 제대로 일냈다

 

사랑 제일교회는 장위 뉴타운 10구역 조합 측과의 명도소송에서  소했다. 교회가 받을  있는 보상금 평가액인 82억 원의 7배나  구한 탓이다. 이제 법적으로는 강제철거만 남았다. 이에 교인들  당수가 교회에서 철야를 했다. 한데 이는 집단감염이 일어나기  좋은 상황이다. 아마도 그때 돌았던 듯하다. 그러다 전광훈이 주도하고 교인들 대다수가 참석한 8.15 광화문 집회가 열렸다.  교회뿐 아니라 전국의 고위험군에 속하는 교회들의 신자 상당수가 참여했다. 불길한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제2차 대감염이 발발했다. 물론  주요 원인은 사랑 제일교회와 8.15 광화문 집회였다. 정부는 8월 30일, 수도권 지역에 대한  회적 거리두기 2.5단계 적용을 선포했다. 하반기 경기회복을 기대했던 사회는 급락했다. 위험한 극우주의자 전광훈이 제대로 사고를 쳤다.

 

 

 

변두리 목사, 세상의 중심이 되다

 

그는 이미 1990년대 후반, 막말로 유명한 개신교계 목사사회에서도 좀처럼 볼 수 없는 수위 높은 발언을 남발했다. 하지만 그를 주 목한 이는 거의 없었다. 2003년 개신교3.1절 구국기도회 때, 두 차례나 정권을 빼앗긴 우파 세력의 선거연합이 바닥까지 흔들리 던 시절,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지 보름도 안 되었는데, 무려 20 만의 반정부를 외치는 인파가 모였다. 전광훈은 그때 혁혁한 공로 를 세웠다. 하지만 여전히 그를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 한국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개신교의 선거연합이 만들 어졌던 2008년 대선국면에서 전광훈은, 그의 이름이 미미하나마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그에게 이렇다 할 떡고 물도 나눠주지 않았다.

  이후 그는 네 번의 기독교정당 창당을 주도했다. 점점 제법 많 은 목사, 장로를 엮어냈지만, 그들의 교회 신자들은 그 당에 표를 주지 않았다.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붕괴되고, 문재인 정부가 집권하던 때, 특히 2017년과 2018년 3.1절 구극기도회가 밑바탕이 된 이른바 ‘태극기 애국시민’이 오백만 명이 될 거라고 호언장담했지만, 최대인파가 몇만 명을 넘지 못했다. 이후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와 손잡고 정 당을 통해 현 정부의 붕괴를 도모했으나 2020년 4.15총선에서 처 참한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그가 애써 모은 지지자들의 수가 증가 한 것보다 반대하는 이들의 수가 훨씬 더 많이 늘었던 것이다.

  2014년에는 ‘한국교회선교은행’을 만들었고, 몇 년 후 선교카드 5종이 발행되었다. 하지만 이 ‘은행’은 사실상 페이퍼컴퍼니였다. 그리고 5장의 카드는 기존 카드사가 발행한 것이었다. 전광훈과 그의 추종자들은 일종의 카드용역업체를 운영한 셈이다. 그것으로 거대 한 기금을 만들려 했다. 만약 성공했다면 대형 금융사기 사건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나 같이 제대로만 되었다면 꽤 위험한 일들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 파급효과는 미미했다. 한데 그가 벌인 일은 아닌데, 뜻 밖에도 대대적인 감염증 사태의 주역이 되었다. 그렇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었는데, 이제야 그는 세상의 중심이 되었다.

 

 

 

실패 이유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위험한 극우주의자로 알려졌음에도 그는 왜 자신이 의도했던 일들에서 번번이 좌절해야 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와 그의 주요 대중이 사회적 자원을 활용할 능력이 매우 빈약했기 때문이다. 우선 전광훈을 주목해보자.

 

한국개신교의 중심부 엘리트가 되는 데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미국교회와의 연줄망이다. 긴 얘기가 필요하지만 여기선 간략히 결론만 말하겠다. 미국보수파 정치세력과 미국교회와의 연결망에 엮이는 것이, 미국의 영향이 절대적인 한국사회에서는 교회 차원을 넘어서 사회 형성에까지 절대적 의미를 지녔다. 하여 그 연줄망에 엮이는 것이 한국교회의 엘리트가 되는 데 있어 가장 결정적인 조건이었다. 그러려면 몇몇 주요 교단에 속해야 한다. 한데 전광훈은 그런 교단 출신이 아니다.

 

하지만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교회의 규모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실제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용기는 전형적인 변두리 지도자였지만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갖는 개신교 지도자의 한 사람이다. 한편 최근에는 규모 뿐 아니라 교회가 입지한 지역도 중요하다. 적어도 강남권(강남, 강 동, 분당)에 속한 대형교회여야 그 교회 담임목사가 개신교 내에서 말 발이 먹힌다. 한데 알다시피 전광훈은 대형교회 목사도 아니고, 강남권 교회의 목사도 아니다.

 

한편 흥미로운 또 하나의 조건이 있다. 개신교 목사들이 학력 에서 뛰어난 엘리트들이 아님에도, 목사사회에서 학력은 굉장히 중요하다. 교단 신학교들 중 어느 학교 출신인가, 그 학위가 문교부인가 학위인가 교단인가 학위인가 등 깨알 비교가 작용한다. 그리 고 이른바 ‘더 성공한’ 이들은 위조된 박사라도 받아야만 다른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위치에 있게 된다. 전광훈은 그런 학력 서열에서 제일 하층에 속한다.

 

  하여 그가 개신교 엘리트들의 지지를 받기란 기적과 같은 일이다. 그럼에도 개신교 연합단체 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기관인 한 기총 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몰랐던 사실은, 그가 회장이 될 당시 이 기관은 거의 폐가에 가까운 주인 없는 저택 같은 상태 였다. 이것은 한기총 회장으로서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해도 그것을 뒷받침할 자원을 모으기가 여의치 않다는 것을 뜻한다. 해서 그는 일찍부터 ‘선교카드’라는 이름의 독창적인 자원 모델을 찾아내야 했고, 한기총이 이단으로 지목했던 종파의 지도자를, 이단 해체와 함께 한기총 공동회장으로 추대하기까지 했다. 이 종파가 꽤나 부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를 더욱 개신교 주류가 되는 길을 막았다.

 

광신도 현상

 

그를 추종하는 대중은 어떤가? 여기서 전광훈이 벌인 종교운동의 성격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넓게 보면 그는 종교적 열광주의 운동의 지도자다. 흔히 이런 지도자를 한국개신교에서는 ‘부흥사’라고 부른다. 한데 종교적 열광주의 현상은 종종 반사회적 성향을 지닌다. 그런 성향의 종교인들을 흔히 ‘광신도’라고 부른다. 한데 최근 한국에서 광신도 현상이 광범위하게 일어난 시기는 1990년대 후반부다. 시기상으로 보면 이른바 ‘IMF대란’이라고 부르는 외환위기가 일어난 그 즈음이다. 이때 두드러진 현상은 사회 양극화가 극적으로 심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때 개신교 내에선 흥미로운 현상이 일어났다. 교회의 지배적 인 흐름이 귀족주의로 이동하였다. 이런 귀족화 현상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났는데 ‘졸부형 귀족주의’와 ‘웰빙형 귀족주의’가 그것이다. 한데 전자는 그 이전에도 있었던 현상이기에 특이한 것이 아닌 반면, 후자는 한국 교회나 사회에서 매우 새로운 현상이었다. 그 것을 간단히 요약하면, “예수라면 이것(자신의 풍요)을 어떻게 할까”에 관한 문제의식이다.

 

문제는 이런 폼나는 귀족주의를 따라 할 수 없는 이들이 교회에 적지 않았던 데 있다. 교회의 제도나 담론은 웰빙형 귀족주의를 선망하면서 재구축되었다. 그러자 교회에서 소외된 이들이 대대 적으로 교회를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크게 보면 이탈한 자들이 재정착한 곳은 두 범주로 나뉜다. ‘비정치적 광신도 집단’과 ‘정치적 광신도 집단’이다. 전자를 대표하는 종단이 신천지였다면 후자는 이른바 극우개신교의 아스팔트신자들이 되었다. 후자의 경우, 2018년 이후 전광훈이 그 중심에 우뚝 섰다. 편의상 이들을 ‘전광훈 현상’이라고 부르자.

 

전광훈 현상의 모든 대중이 광신도인 것은 아니다. 또 그 대중 이 외환위기 이후의 신자유주의적 사회에서 실패자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현상에 속한 이들의 계층적 속성과 종교적 속성이 대체로 그렇다는 얘기다.

 

하여 전광훈의 대중은 대체로 자원이 빈약하다. 또 그들이 자원을 동원할 능력도 부족하다. 여기에는 다른 이들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도 포함된다. 하여 광신도 현상은,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 의의 기원》에서 다룬 것 같은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가령 사회를 통합할 만한 국가의 능력을 초과하는 엄청난 난민이 발생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시끄럽지만 극한적 위험으로 우리를 몰아가지는 못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코로나19다

 

문제는 ‘코로나19’다. 실제로 전광훈은, 그가 의도한 것도 아니고 그의 능력에 의한 것도 아닌데, 사회를 위험에 빠뜨렸고 일약 스타가 되었다. 물론 전광훈이 위험한 세상의 주역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기에 등장할 위험한 존재를 부르는 재앙의 예언자가 될 가능성은 농후하다. 하여 우리는 그가 거짓 예언자임을 증거해야 한다. 또한 그를 추종하는 이들이 그와 같은 이의 말에 왜 현혹되는지를 묻고 그 원인을 제거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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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20. 10. 16. 09:00

김정대 신부 ( 예수회 ,  물리  81)

 

지난 327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텅 비어있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코로나19 팬데믹의 종식을 청하며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였다. 그가 종교 지도자로서 세상의 고통을 함께 지며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비가 오는 텅 빈 성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홀로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는 장면은 매우 비현실적이고 슬프기까지 하였다. 또 교황은 성베드로 성당에서 예년과 달리 소수의 사람들만이 참석한 가운데 쓸쓸히 부활절 성야미사를 주례했다. 이런 비현실적인 장면이 우리의 현실이 된지도 벌써 6개월이 넘었다. 교황이 보여준 몇몇 장면들은 현재 코로나바이러스의 대유행이라는 재난 앞에서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고립과 고통 같은 삶의 무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런 재난은 누구나 경험하지만 재난으로 인한 고통은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난의 고통은 더 큰 무게로 다가온다.

 

먼저 감염의 위험에 노출된 사람들이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으로 어떤 이들은 대중교통을 회피하고 자가용으로 출퇴근을 한다. 재택근무가 가능한 노동자들도 있다. 그러나 생산직 노동자와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재택근무가 가능하지 않다. 이들은 매일 매일을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며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의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다. 또 감염에 매우 취약한 노동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있다. 지난 310일 서울 구로구의 에이스손해보험 콜센터의 직원과 교육생, 가족 등 최소한 79명 확진판정을 받은 것이 단적인 예이다. 이 집단감염의 원인은 2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좁고 밀폐된 공간에 모여 있는 것과 업무 특성상 마스크 착용이 어려운 노동환경이었다.

 

출처 :  픽사베이

524일 첫 확진자가 발생하여 집단 감염으로 이어져 152명의 누적 확진자가 발생한 쿠팡 부천물류센터의 경우도 비슷한 예다.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으로 대부분의 사업체가 불황기를 겪고 있지만 온라인 물류업체는 약진중이다. 그중 쿠팡은 최대의 수혜 업체로 꼽히고 있으며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속에서 거래량이 두 배가 늘어 300만 건을 웃돌고 있다.사업의 번성에도 불구하고 쿠팡은 방역에 취약한 구조와 노동환경을 가지고 있다. 먼저 고용구조가 방역에 취약한 부분이다. 쿠팡에 근무하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하루 일해서 그날 일한 수당을 받는 일용직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아프면 쉬어야 하는데 그럴 경우 돈을 받지 못하므로 직접적으로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다. 사실 첫 확진자도 증상 발현 후 11일 후에 확진 판정을 받았다. 그 사이에 그를 접촉한 사람들은 감염의 위험에 노출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감염의 위험에 노출된 환경에서 컨테이너 내부에서 작업을 할 경우, 노동자들은 밀폐된 환경에서 단기간 내에 강도 높은 노동을 해야 하기에 노동자들이 마스크를 착용하기 쉽지 않다. 또 휴게실 식당 등에서 거리두기가 미흡했고 방역을 철저히 하지 않은 것이 복합적인 원인이 되어 집단 감염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런 가운데 쿠팡은 24일 첫 확진자 발생 통보를 받았음에도 이 사실을 노동자들에게 알리지 않고 정상출근을 하게 하였고 25일에도 노동자들에게 문자로 출근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렇게 정상출근한 사람들 중에 다음날 확진 판정을 받은 이들도 있다. 쿠팡은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으로 늘어난 배송물량을 처리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의 안전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쿠팡이 내세우는 로켓배송뒤에는 노동자들의 목숨이 담보된 노동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현장에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의 위험에 노출되어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임금 차별 외에도 정규직 노동자들에 비해 노동조건이 열악하고 불황기에는 먼저 해고당하는 차별을 당한다. 들은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의 재난 속에서 감염 위험 외에도 해고의 피해에도 노출되어 있다.

 

인천국제공항은 최근 만 여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공항공사와 자회사에 직접 고용했다. 인천공항 운영 및 관리 노동자 외에도 인천공항에는 여행관광업과 항공업과 같은 업종이 집약적으로 모여 있어 고용된 노동자 수는 7만 정도이다. 모든 나라가 문을 꼭꼭 닫아걸고 있으니 여행관광업과 항공업계가 직격탄을 맞았다. 대부분의 업종이 노동시간을 단축하여 노동자들은 연차 강제와 무급휴직, 그리고 권고사직을 빙자한 해고와 같은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인천투데이, 46) 지난 47일 국제노동기구는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으로 인해서 올해 2분기 전 세계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6.7%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경향신문, 49)

 

아시아나 KO(케이오)의 예는 항공업계의 불황으로 인해 무급휴직과 해고의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시아나 케이오는 아시아나항공의 수화물 분류 및 기내 청소를 담당하고 있는 아시아나항공의 하청업체이다. KO 외에도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소유의 KF, KA, KR과 같은 하청업체들도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으로 항공기 운항이 줄어들자 하청업체인 아시아나 케이오는 노동자들에게 희망퇴직이나 무기한 무급휴직을 선택하도록 강요하였다. 사측의 강요로 500여명의 노동자 가운데 120여명은 희망퇴직으로 회사를 떠났고, 360명의 노동자는 무기한 무급휴직동의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무급휴직 동의서에 서명을 거부한 노동자 8명은 지난 511일자로 정리해고를 통보받았다. 이런 아시아나 케이오의 기업 운영 방식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망각한 이기적인 행위이다. 왜냐하면 정부는 이런 항공업계가 불황을 극복하도록 3조원의 지원금을,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휴업수당의 90%를 지원할 수 있는 5천억 원의 고용유지지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런데 아시아나 케이오는 고용유지를 위한 10%의 분담금조차 거부하고 노동자들에게 정리해고를 통보했다. 아시아나 케이오는 노동자와 기업의 상생을 거부한 것이다.

 

우리 몸의 중심은 가장 약한 부분이다. 즉 가장 약한 부분이 보호될 때 우리는 건강하게 균형 잡힌 몸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약한 사람들이 보호될 때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으로 사회적 약자들이 일회용 취급을 당하고 사회에서 배제되고 있는 우리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이렇게 일회용 취급을 당하고 사회에서 배제되고 있는 비정규직의 숫자는 어림잡아도 천만 정도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부활절 메시지를 통해 무관심, 자기중심, 분열과 망각과 같은 단어는 없어져야 하며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희망이라는 다른 전염병이 퍼져나가길기원했다. 우리는 생명과 이웃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연대를 실천하고, 배려와 돌봄으로 사회에서 배제되고 있는 이웃들에게 희망을 나누어야 한다.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의 시기에 우리는 뉴 노멀(New Normal)’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는 원래 새로운 표준이라는 의미의 경제용어이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는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있다. 이제 진정으로 새로운 표준을 이야기해야 할 때이다. 우리 사회는 과거와 같은 자본 중심의 공격적인 약육강식의 사회가 아니라 관계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새로운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자에 대한 배려와 돌봄, 그리고 나눔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아야 한다. 이런 새로운 가치로 포스트 코로나를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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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20. 10. 16. 09:00

라이더유니온 김지수

라이더유니온 김지수

 

사회적 거리두기로 사회 활동 전반이 침체를 겪는 시기에도 어김없이 분주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나와 같은 배달노동자들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배달노동자는 플랫폼 기업에 소속되어있다. 근무환경은 플랫폼사의 지시에 따라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또 다르다. 언제까지 변화가 계속될까. 끊임없는 변화에 언젠가 적응하지 못하는 순간이 오면 그때 부딪히는 현실은 감당할 수 있는 것일까.

 

배달라이더들의 일터는 날마다 변화한다.

배달을 처음으로 시작했던 6년 전에는 지금과는 다른 환경이었다. 가게에 소속되어서 일한 시간만큼 돈을 받고, 늘 돌아다니는 똑같은 동네에서 예상되는 일정한 수입을 받으며 가게 사장님의 명확한 지시 아래 일했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플랫폼노동자의 신분보다는 보다 예상 가능한 생활을 유지해나갔다.

 

장마가 유난히 길었던 올여름, 배달 도중 빗길에서 넘어지는 사고로 나는 어깨가 다쳐 6주 넘게 일을 쉬고 있다. 6주 사이 배민커넥터들이 갑작스럽게 늘어나 일감이 줄어들고, 배달 시간이 더 촉박해지고, 프로모션이 바뀌고, 배달을 지시하는 AI의 알고리즘이 바뀌었다고 한다. 산재 휴업 기간이 끝나고 다시 일터로 돌아갔을 때 나는 또다시 이런 새로운 업무환경에 적응해야만 한다. 나의 생계를 책임지는 내 일인데, 내일을 알 수가 없다. 대체 6년 전과 달라진 것이 무엇일까. 존재하지 않던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 원인은 오늘날 대다수의 배달노동자들이 몸담은 배달의민족, 쿠팡이츠와 같은 플랫폼 기업에 있지 않을까.

 

 

플랫폼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현재 대다수의 배달노동자가 몸담은 플랫폼 기업들은 기존의 기업들과 다른 우선 전략을 택하고 있다. 이들은 태생적으로 이윤을 우선하기보다는 거대한 규모 달성과 독점을 추구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독점 과정의 수단이 바로 소비자 편의, 플랫폼의 매력경쟁이다. 얼핏 소비자 입장에서는 낮은 비용, 선택지의 다양화, 서비스의 확대가 절대선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플랫폼은 그 확장과 소비자 편의를 위해 언제든 노동자의 삶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비자의 다수는 노동자다)일례로 카카오는 카풀 서비스를 통해 국내 차량 2,300만대를 플랫폼으로 연결하고자 25만 규모의 택시라는 기존의 노동 구조를 파괴하려고 시도했었고 오늘날의 유통 플랫폼 기업에서는 소비자 편의를 명분 삼아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을 고려하지 않는 배달시간 제한, 새벽 배송 등의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해외의 플랫폼 기업인 아마존은 고객집착이라는 표어를 내걸어가며 시장 1위의 점유율을 차지하였다. 그 맹목적인 표어 이면에는 플랫폼 노동자들의 희생이 있다. 어느새 주류로 자리 잡은 이런 식의 소비자 우선주의가, ‘플랫폼의 자본주의가 우려스럽다.

 

 

플랫폼 자본주의, 참을 수 없는 노동의 가벼움

지금 포털 창에 배민커넥트를 검색하고 페이지에 들어가면, ‘시간 날 때 한두 시간 가볍게’, ‘운동 삼아’, ‘퇴근길에’, ‘주말 오후 한두 시간 가볍게라는 지원 배너가 떠 있다. 실제로 플랫폼 노동은 배너 속 표현처럼 시간 날 때 한두 시간 가볍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플랫폼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인권과 안전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음식이 가게에서부터 주문자에게 가기까지, 결국 사람의 노동에 의존하고 있다면 말이다. 책임 있는 기업이라면 그 모든 노동의 과정을 가볍게 인식되도록 할 것이 아니라 기업의 생존을 지속 가능하게 해주는 모든 이들에게 발전적인 답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구조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플랫폼 기업이 마음먹기에 따라 언제 어떻게 정책이 바뀔지 모르는 상황에선 자영업자, 소비자, 배달노동자 모두가 그 부담을 떠안아야 하는 구조인데, 그마저도 거의 독점에 가까운 시장이기 때문에 다른 선택지를 찾기도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부가 나서서 적절한 개입을 하는 것은 물론 가장 기본 중의 기본으로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배달 노동자들의 노동권이다.

 

출처: 민중의소리

배달 노동자의 인권, 노조할 권리를 보장받는 것에서부터

현재 배민의 경우 2,300여 명 규모의 배민라이더스에 대해선 노동3권을 인정하고 있지만, 6만여 명 규모의 배민커넥터에게는 노동 3권이 주어지지 않고 있다. 결국 커넥터들은 부당한 일이 있어도 배민에 개선을 요구할 수 있는 합법적인 통로가 없는 것이다. 유럽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는 플랫폼노동자가 법적으로 노동자냐 아니냐의 문제를 떠나 노동3권은 기본적 권리로 보장되고 있는 상황인데, 플랫폼 기업들은 외면만 하고 있다.

 

노동을 노동이라 부르지 못하는 배달노동자들은 지금 이 시각에도 빠르게 늘어가고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 제도가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단 한 시간의 노동이라도 그 가치는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더 이상 노동을 노동이라 부르지 못하는 라이더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란다. 결코 가볍지 않은 배달 노동자의 인권, 노조할 권리를 보장받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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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20. 10. 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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