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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19호] 건망증, 바닥 건망증 -박성우- 깜박 나를 잊고 출근버스에 올랐다 어리둥절해진 몸은 차에서 내려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방문 밀치고 들어가 두리번두리번 챙겨가지 못한 나를 찾아보았다 화장실과 장롱 안까지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집안 그 어디에도 나는 없었다 몇장의 팬티와 옷가지가 가방 가득 들어 있는 걸로 봐서 나는 그새 어디인가로 황급히 도망친 게 분명했다 그렇게 쉬고 싶어하던 나에게 잠시 미안한 생각이 앞섰지만 몸은 지각 출근을 서둘러야 했다 점심엔 짜장면을 먹다 남겼고 오후엔 잠이 몰려와 자울자울 졸았다 퇴근할 무렵 비가 내렸다 내가 없는 몸은 우산을 찾지 않았고 순대국밥집에 들러 소주를 들이켰다 서너 잔의 술에도 내가 없는 몸은 너무 가벼워서인지 너무 무거워서인지 자꾸 균형을 잃었다 금연하면 건강해지고 장수할 수 있.. 더보기
[119호] 바닥이다 싶을 때 표명희 모니터에 수상한 사람이 잡혔다. 지하층과 1층 복도를 기웃거리던 낯선 남자가 2층 복도 CC카메라에 다시 잡혔다. “고시원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사장이 계산기를 두드리며 궁시렁거렸다. 그가 장부와 계산기를 번갈아가며 들여다보는 내내 나는 CC티브이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사내는 이제는 익숙한 태도로 T자형 좁은 복도를 감상이라도 하듯 천천히 오가기 시작했다. “야, 어떻게 돈이 삼십만 원이나 차이 나냐?” 사장이 계산기를 내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월별로 종량제 쓰레기봉투 한두 장 차이나는 것까지 따지고 드는 사장에게 한 달 치 고시원비 빠뜨린 일이 용납될 리 없다. 퇴실 결정을 번복하며 나중에 재등록했던 학생 건을 깜박한 것이다. 어쩌면 사장은 그것이 나의 단순한 착오로 빚은 실.. 더보기
[119호] 유령 윤이형 그녀가 열람실 문을 힘겹게 밀고 들어온 것은 12월 초의 어느 날, 폐관시간을 한 시간쯤 남겨둔 오후 다섯시 무렵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날따라 신착도서 목록 파일을 갈아엎느라 오후 내내 직원 모두가 커피 한잔도 못 마신 채 분주히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파일 대조작업을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내 앞에 그녀가 서 있다는 걸 알았다. 주의 깊게 둘러본 사람은 알지도 모르겠지만, 대학 도서관 열람실은 의외로 다양한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사이클 선수복을 입고 헬멧을 쓴 땀투성이 중년 아저씨가 독일 시인의 시집을 대출해가거나, 로리타 양복을 입은 앳된 얼굴의 아가씨가 이종격투기 교본을 한아름 빌려간다거나 하는 일이 몇 번이나 있어서, 나는 웬만큼 특이해 보이는 방문.. 더보기
[119호] 도피성 정한아 죽은 사람도 꿈을 꿀까. 내가 물었을 때, 너는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지. 창밖은 캄캄한 밤이었어. 너는 너무 많이 지쳐보였어. 온종일 차를 달려 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나왔지만, 불빛 한 점 보이지 않았지. 너를 불편하게 할 마음으로 그런 질문을 한 건 아니었어. 나는 늘 네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지. 내가 하는 말은 대부분 너를 피곤하게 할 뿐이고 그럴 바에야 입을 다물고 있는 게 훨씬 낫다는 걸 잘 알면서도, 말하기를 멈출 수가 없었어. 침묵은 두 사람 사이에 감춘 것을 모두 다 드러내는 법이니까. 그것이 너와 나 사이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와 선명하게 보여줄까 봐, 두려웠어. 어린 시절 그런 동화를 본 적이 있지. 춤추기를 멈추지 못하는 빨간 구두의 소녀 이야기. 소녀는 사람들이.. 더보기
[118호] 복지와 노동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다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복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마 무상급식이나 반값 등록금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 비정규 일자리를 줄이고 차별을 없애는 것이 복지일까 아니면 복지와는 상관없는 노동문제일까? 대졸 청년에게 좋은 일자리를 보장하고 구직수당을 주는 것은 복지일까 아니면 그것 역시 노동문제일 뿐일까? 한국의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한다. 또한 국가는 “사회적․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임금의 보장에 노력하여야 하며(제32조 1항)”, “사회보장·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제34조 2항)”고도 한다. 한국의 헌법은 복지정책과 노동정책이 동전의 양면이며 상당부분 국.. 더보기
[118호] 제주해군기지, 주권적 선택이 초래할 비주권적 결과 정욱식(평화네트워크 대표) 9월 하순 제주해군기지 건설로 몸살을 앓고 있는 강정마을을 다시 찾았다. ‘살아있는 바위’ 구럼비는 거대한 펜스에 가로막혀 벌금과 체포를 각오하지 않는 한 갈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맨발로 그 바위 위에 서면 온몸으로 전해오던 생명의 소리는 굴삭기에 의해 요란한 죽음의 소리로 둔갑해버렸다. 평화롭던 마을공동체도 이미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곳에선 찬반 주민들 사이에 멱살잡이가 벌어지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하여 거듭 묻게 된다. 천혜의 자연과 평화로운 마을을 파괴하면서 얻게 되는 국익이 무엇이냐고?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제주해군기지 문제를 둘러싼 득실관계를 따져봐야 할 자리는 첨예한 이념 대결이 대신하고 있다. 보수 언론과 정치인들은 해군기지 반대 세력을 “종.. 더보기
[118호] 탈핵의 정치사회학 김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후쿠시마 핵발전소는 여전히 조용히 불타고 있다. 핵발전의 기본 원리가 연속적인 핵분열인 이상, 아무리 냉각수를 들이부어도 녹아내린 격납용기와 핵연료는 조용히, 눈에 보이지 않고 소리와 냄새도 없는 방사능을 내뿜고 있다. 핵발전을 옹호하는 전문가들조차 이 사고를 수습하는데 최소 십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 예상한다. 이 사고가 불행 중 다행으로 이 수준에서 마감된다 하더라도 그 동안 그리고 그 이후에도 후쿠시마 주민들을 비롯해 우리 모두는 직접 또는 간접적인 상해와 부담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꺼지지 않는 핵발전소의 불길만큼이나 핵산업의 드라이브도 아직 꺾이지 않고 있다. 이는 핵발전의 시작과 성장이 정치와 군사, 에너지 산업의 동맹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상기.. 더보기
[118호] 카다피의 트리폴리 퇴각, 리비아는 어디로? 문이얼 (아이비스 에너지 전략 연구소) 리비아 민주항쟁의 배경 카다피가 나토의 공습과 반군의 공세에 밀려 트리폴리에서 퇴각하면서 리비아 사태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고 있다. 향후 리비아 사태에 대한 장기적인 전망을 하기 위해서는 리비아 사태 진행 과정에서 드러난 다양한 모순관계를 볼 필요가 있다. 지난 1969년 친서방 경향의 국왕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이집트의 나세르가 주창한 아랍 민족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은 카다피가 권력을 잡았다. 당시 국왕은 벌어들인 석유 대금을 리비아 대중들의 필요에 맞게 제대로 분배하지 않았고, 이러한 상황 때문에 리비아 대중들은 카다피의 쿠데타를 묵인했다. 리비아는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식민지배를 받았고, 사회적으로 매우 낙후되어있었기 때문에 쿠데타 성공 이후 카다피는 몇 가.. 더보기
[118호] 세계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Mundus?) 세계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Mundus?) - 전 세계로 번진 재정위기로 위협당하는 세계경제 - 장시복(목포대학교 경제학과) 전 세계로 번진 재정위기 세계는 재정위기로 중병을 앓고 있다. 그리스로부터 시작된 재정위기는 아일랜드를 거쳐 이탈리아와 스페인으로 번지고 있다. 이로 인해 재정위기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지나 않을까하는 우려가 커지고 있으며, 유럽연합이 과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심지어 최악의 경우에는 유럽연합이 붕괴될 수도 있다는 암울한 전망까지 제시되고 있는 실정이다(최근 이 문제는 10월 위기설로 나타나고 있다. 10월에 유럽 주요국의 국채만기가 도래하면서 그리스의 디폴트 선언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2011년 8월 스.. 더보기
[118호] 세계없는 세계의 폭력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교수) 근대의 생명권력이 전체화시키면서 또한 개별화시키는 권력이라고 말했을 때, 푸코는 자신이 얼마나 헤겔과 닮은 생각을 하는지 몰랐을 것이다. 전체화시키면서 개별화시키는 권력으로서 근대 권력을 해부하는 것이야말로 헤겔의 가장 독특한 업적이기 때문이다. 아마 몇 가지 유예조건을 달고 적절하게 손을 본다면 우리는 푸코가 후기에 전개했던 생명권력 분석이 법치국가를 분석한 법철학에서의 헤겔과 얼마나 흡사한지 깨닫고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주권적이고 사법적인 권력의 모델을 집요하게 비판한 푸코는 실은 그와 똑같은 노선을 따라 나아갔던 헤겔(알다시피 헤겔은 홉스와 루소로 대표되는 주권적인 권력을 집요하게 비판하지 않았던가)과 일치하지 않는가, 무엇보다 주체화되지 않은 채 존재하는 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