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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108호] 붉은 입술, 차가운 사랑

김명석 (이화여대 철학과 강사)


벚꽃이 펄펄 내렸다. 네 눈동자는 부풀어 올랐다. 네 손을 잡을까 말까 고민했다. 힐긋 본 네 볼은 몹시도 미끄럽고 뽀얗다. 해가 진 저녁 벤치에 앉아 짤랑거리는 미루나무와 몽환 같은 구름을 바라보았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였다. 너는 시선을 나에게 돌렸다. 유난히 두툼하고 빨간 입술. 소리는 날아가고 너의 색깔과 움직임만이 그 공간에서 잔치를 이루었다. 사랑하고 싶어. 사랑해. 나에게 일어났던 그 느낌을 굳이 사랑이라 불러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너 역시 날 사랑하기 시작할 때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하지 않았다. 어느 장소에 있더라도 너는 내 생각이 났다고 고백했다. 무슨 음악을 들어도 나와 함께 듣고 싶어 음악을 멈추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열량의 총량은 제한되어 있다. 모든 뜨거움은 식는다. 모든 격정은 잔잔해진다. 그것들은 동역학과 열역학의 지배를 받으며 시간적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노란은행이 폭풍처럼 휘날리던 날 너는 사랑이 식었다고 말했다. 식었던 것이 너의 충동이라고 말하지 않고 왜 사랑이라고 말해야 했을까? 사랑은 가변적 현상이며 일시적 현상이다. 그것은 순간적 현상이다. 그것은 삶의 극히 부분적 현상이다. 사랑이 변했다. 사랑이 끝났다.

사랑이란 원래 몹시 모호한 현상이다. 사랑이 무엇인지 성찰하지 않은 채 사랑을 시작하고 가열하고 끝내고 다시 시작한다. 상처 입은 자들은 사랑의 본질을 파악한 양 사랑에 대해 단호하게 말하기 시작한다. 사랑은 소유욕이다. 사랑은 집착이다. 사랑은 환상이다. 사랑을 믿지 않는다. 사랑은 나쁘다. 사랑은 없다. 사랑을 막 시작한 이들은 사랑에 대해 온갖 찬사를 늘어놓는다. 사랑은 운명이다. 사랑은 두근거림이다. 사랑은 체험이다. 그들이 시작하려는 것, 가열하고 있는 것, 끝내려는 것, 잃었던 것이 과연 사랑이었을까?


나는 너의 두툼하고 빨간 입술, 확장된 동공, 뽀얀 피부에 끌렸다. 네 입술이 유난히 발그스름해지고 두툼해지는 때가 배란기 직전이었다는 것을 안 것은 최근이다. 그때 네 피부는 뽀얗게 변하고 동공은 확장되었다. 둘 중에 하나가 진실이다. 두툼하고 빨간 입술, 확장된 동공, 뽀얀 피부를 내가 매력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너는 배란기 직전에 그렇게 변했다. 아니면 너의 그런 모습이 네가 지금 배란기 직전이라는 징표이기 때문에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에 끌리게 되었다. 둘 사이의 인과관계는 보다 원시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

배란기 직전의 네 모습을 내가 아름답게 여기는 것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만일 내가 여성에게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내 유전자를 퍼트리는 데 불리할 것이다. 또한 배란기를 앞두고 내가 아름답게 여기는 모습으로 네가 바뀌는 것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만일 네가 남자들이 좋아하는 모습으로 변모하지 않는다면 네 유전자를 퍼트리는 데 지장이 올 것이다. 배란기 직전에 실제로 너의 성욕은 증가한다. 배란기에 고백한 사랑, 그때 시작된 사랑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까! 배란기를 조심하라.

두툼하고 빨간 입술이 그 자체로 아름답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매력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었다. 신경회로가, 그 회로를 설계한 유전자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여태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우리 신경회로에 그리고 우리 유전자에서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다. 그 속에서 지금 무엇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 우리가 감지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것들이 우리 판단을 좌우하고 있다. 이것은 지배이면서 동시에 기만이다. 우리는 각자의 유전자에게 기만당하고 있으며 지배받고 있는 중이다. 이것이 내가 느낀 매력, 네가 가진 매력의 진실이었다. 너에 대한 나의 이러한 끌림이 내 사랑의 본질이었다고 결론내리는 건 가슴 아픈 일이다. 나에게 시작된 그 느낌은 사랑이 아니라 유전자 엔진의 가동이었다.

내가 너에게 사랑에 빠진 것은 네가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세부를 그렇게 따뜻하게 이야기했기 때문도 바흐 무반주 첼로 조곡 사라방드를 그렇게 쓸쓸하게 이야기했기 때문도 네 얼굴의 기하학적 조형이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내 후각신경이 너의 코퓰린 페로몬에 반응했기 때문이다. 너의 코퓰린 분비가 왕성해지는 날 나의 테스토스테론은 증가하고 나는 너를 만지고 싶어 안달했다. 이 역시 지배이자 기만이다. 그리고 너는 나의 안드로스테논 페로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페로몬을 감지하는 우리 능력은 순전히 생리학적 본능이다. 우리는 그 능력을 키우기 위해 애쓴 적이 없다. 우리에게 그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도 못했다. 페로몬에 대한 우리 반응을 우리는 지금까지 사랑이라고 불렀다.

나는 네게서 나는 솔잎 냄새를 무척 좋아했다. 노을로 붉게 타는 서해 해송에서 나는 그 냄새. 네 품에 얼굴을 묻었다. 너는 내게서 푸른 보리 풀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네가 나의 체취를 좋아하는 것은 내가 너와 유전적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유전적 다양성은 유전적 적응 능력을 높이기 때문에 우리 몸 속에는 유전적 다양성을 확대하려는 메커니즘이 장착되어 있다. 유전적 차이를 감지하는 우리 능력은 유전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유전적 본능이다. 우리는 이것을 학습한 적도 의식한 적도 없다.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가 경험하는 이끌림의 본질을 구성한다. 이것을 우리는 지금까지 사랑이라고 불렀다. 너의 사랑은 너의 의지가 아니었다. 나는 자동기계처럼 너를 사랑했다. 우리가 과연 사랑했을까?


우리가 과연 사랑했을까, 하는 물음은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의존한다. 사랑은 모종의 욕구이자 욕망이다. 그것은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이다. 이것은 하나의 지향적 행위이며 따라서 심적 사건의 범주에 속한다. 사랑에 대한 많은 담론들이 이 분명한 사실을 무시하곤 한다. 의도적 행위와 기계적 근육운동 사이에는 제거할 수 없는 개념적 간격이 존재한다. 눈에 먼지가 들어와 반사적으로 눈이 깜빡이는 것과 추파를 던지기 위해 윙크하는 것은 모두 눈두덩 근육을 사용한 신체 운동이다. 그러나 둘은 동일한 범주의 움직임이 아니다. 하나는 기계적 행동이고 다른 하나는 의도적 행위이다. 윙크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이 없다면 의도적 윙크와 반사적 깜빡임 사이엔 아무런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호르몬이다, 사랑은 유전적 본능이다, 등의 이야기는 사랑의 본성을 전혀 해명해주지 못한다. 사랑에 대한 너의 관념은 너의 연애 경험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 내가 사랑에 대해 성찰하기 시작했을 때 너는 나의 성찰을 추상적이라고 불평했다. 그것은 연애를 많이 해보지 못한 사람의 사변이라고 놀렸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연애를 많이 해본 너의 특권이다. 그러나 사랑이 의도적 행위라는 것을 너도 인정한다. 너 또한 분명 사랑이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신경생리학적 사건이라고는 믿지 않을 테니까. 네가 나를 사랑할 때 너는 지향성, 의지, 의도,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추상성을 배제하고 현실을 반영하고 경험을 받아들인다는 명분으로, 또 다시 사랑을 순전히 육체적 사건이며 물리적 사건이라고 후퇴하지 말기를 바란다. 아 잠깐, 물론 너는 그렇게 후퇴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너는 철저한 유물론자가 되면 되니까. 이 세계에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이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것은 오직 물리적 사건뿐이라고 전제해도 좋다. 사랑이든 희망이든 모든 심적 사건은 이름에 불과하다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네가 철저한 유물론자가 아니라면, 그래서 자유로운 심적 사건들의 존재를, 지향적이고 의도적인 사건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그리고 사랑이 그러한 범주의 사건에 속한다고 생각한다면, 너는 네 사랑에서 신체 내부의 신경생리학적 과정 그 이상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심적 사건은 물리적 시공간에서 벌어진다. 그래서 심적 속성은 항상 물리적 속성을 통해 실현된다. 의도적 행위는 신경생리학적 과정과 근육의 움직임을 동반한다. 사랑 또한 우리 신체 속에서 벌어지고 신체를 통해 구현되는 것이 확실하다. 유전자와 호르몬과 신경회로가 작동하지 않고서도 사랑할 수 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말은 사랑을 신경생리학적 과정과 동일시하거나 그런 과정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심적 사건이 물성에 의해 실현된다고 해서 심적 사건이 곧 물리적 사건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하려는 나의 의도는 물리적 속성으로 환원할 수 없다. 만일 사랑이 모종의 의도적 행위라면 우리는 사랑이 단순히 유전자의 명령이라거나 호르몬 분비의 결과라고 말하는 데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내 속에서 벌어지는 자극작용과 신경세포와 화학적 프로세스를 감지하지 못한다. 만일 페로몬이 너에 대한 내 사랑을 야기했다면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생각은 페로몬의 기만이다. 만일 유전자가 내 사랑을 야기했다면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생각은 유전자의 기만이다. 나를 움직이는 것이 오직 이것들뿐이라면 나는 페르몬과 유전자의 매트릭스에 갇혀 사랑하고 기뻐하고 그리워하고 쓸쓸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일어나는 심적 사건을 나는 감지할 수 있다. 나의 쓸쓸함, 나의 그리움, 나의 두려움, 나의 슬픔, 나의 분노를. 내가 이것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나의 신경회로와 호르몬과 유전자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심적 사건은 단순히 전자기파, 음파, 분자, 압력 등 수많은 자극들,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각적 수용기들, 전기화학적 신호 전달, 그것을 전송하고 처리하는 실타래처럼 얽힌 신경세포들, 이 모든 것들이 복잡하게 서로 작용하는 프로세스의 복합이 아니다.


모든 욕구와 행위는 기본적으로 쾌락, 즐거움, 기쁨, 행복을 증대하려는 간접적 또는 직접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 사랑이 모종의 행위라면 사랑 역시 행복을 증대하려는 욕구에서 출발한다. 누구의 행복이며 누구의 쾌락인가? 오직 나의 쾌락만을 추구한다면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를 이용해서 나의 쾌락을 증대하려는 노력에 불과하다. 사랑하는 이는 사랑받는 이의 쾌락에도 관심을 가진다.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이가 누리는 쾌락의 합이 일정할 때 사랑받는 이가 누리는 쾌락의 총량이 크면 클수록 사랑하는 이의 사랑이 크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사랑하는 이의 쾌락은 없고 오히려 고통이 증가될 때 너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 경우 사랑받는 이가 받고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분명 쾌락의 공정한 분배이다.

네 생각이 옳은지 모른다. 그러나 사랑에서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사랑이 어떤 행복의 증대, 어떤 쾌락의 증대를 의도하는가 하는 것이다. 너는 사랑에서 필수적인 것이 성적 쾌락의 증대라고 말했다. 분명 성적 쾌락은 즐거움과 행복의 모든 것이 아니다. 서로의 성적 쾌락을 증대한다고 해서 그것이 항상 사랑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쾌락이 감소한다면, 삶의 다른 영역에서 불쾌감이 증폭된다면, 아무리 성적 쾌락이 크다 하다라도 너는 나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나아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항상 서로의 성적 쾌락을 증대하려고 의도하는 것도 아니다. 성적 쾌락은 사랑에서 항상 필요한 것도 항상 충분한 것도 아니다. 사랑은 서로 좋은 것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분명하지만 그 좋은 것이 반드시 언제나 성적 쾌락일 필요는 없다.
나는 너에게 가장 드라이하고 가장 쿨한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다. 한 자세, 한 욕구, 한 행위가 사랑이 되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필요조건을, 개별 사랑의 특수성이 아니라 모든 사랑들이 공유하고 있는 어떤 것을, 이성애 동성애 우정 모성애 부성애 형제애 자매애 사제의 정 동료애 인류애 동정 자기애 등 사랑의 가능한 모든 자세들이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을. 이것이 결여되면 사랑이 되지 않는 것, 이것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강한 사랑이 되는 것, 나는 그것을 가지고 너를 사랑하고 싶다. 나는 너에게 그런 사랑을 받고 싶다. 식지도, 변하지도, 사라지지도, 끝나지도 않는 그런 사랑을.


나는 한갓 영혼 없는 자동기계로 태어나 생각하는 자아에 이를 때까지 성장해 나간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누군가 나를 축하했다. 그녀는 내가 자기와 같은 시공간에 거주하게 되었다는 점을, 같은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점을 축하했다. 그녀는 내가 세계의 진정한 거주자가 되기를, 공동체의 진정한 일원을 되기를 희망했다. 내가 세계 내에 있는 사물들을 지각할 수 있기를, 내가 타자를 인식할 수 있기를, 가치들을 지향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내가 참된 믿음을 가지기를, ‘참되다’라는 개념을 가지기를, 그리하여 그 개념을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내가 ‘좋다’라는 개념을 가지기를, 내가 ‘아름답다’라는 개념을 가지기를 희망했다. 그것은 그녀가 나에게 베푼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본질적인 사랑이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네가 나와 함께 사물과 가치와 목적의 세계를 공유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너를 이 세계의 공동 거주자로서 너를 수용한다. 사랑은 자연세계와 공동체를 공유한다고 믿거나, 공유하기를 의도하고 공유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는 열정이다. 사랑은 점령과 점유와 독점과 복속의 야욕이 아니다. 사랑은 국경선을 초월한다. 사랑은 월경한다. 사랑은 공동의 시공간과 가치를 만들기 위해 손을 마주 잡는다. 동행하고 동역하고 약속하고 합심한다.

나는 네가 잘못에 빠질 때 결코 기뻐하지 않는다. 네가 좋은 것을 행하고 아름다운 것을 만들 때 너보다 더 크게 기뻐한다. 네가 표현하는 것, 네가 재현하는 것, 네가 만드는 것, 네가 행하는 것, 네가 말하는 것, 네가 믿는 것이 이 자연세계와 잘 어울리기를, 마음들의 공동체에 잘 어울리기를 희망한다. 그리하여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참됨과 선함과 아름다움의 추구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사랑은 세계를 참되게, 좋게, 예쁘게, 표현하고 표상하고 재현하고 구현하기 위해 너와 협력하는 것이다. 사랑은 너를 위해, 너를 통해, 너와 함께 코스모스를 발견하고 코뮌을 만들려는 욕구이다.

사랑하는 이는 사랑받는 이를 사물이 공유되는 자연세계와 서로의 가치가 공유되는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 여기고 실제로 그렇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사랑은 인간 육체에 정신이 깃들게 하는 원초적 힘이다. 이 사랑은 그저 그런 물리적 사건들에 불과한, 육체들 속에 일어나는 신경생리학적 과정들과 저기 바깥의 열역학적 소란들을 결집하여 하나의 심적 사건을 만들어내는 중력이다. 이 중력이 약할 때 유전자와 호르몬과 페로몬의 매트릭스 속에서 끊임없이 기만하고 기만당하고 상처주고 상처받는다. 사랑의 중력은 물리적 사건을 넘어선 어떤 것이 출현하는 곳으로서 세계를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들은 세계를, 그 속에 있는 자신을, 타자를, 영혼들을, 사물들을, 이념들을 더 깊게, 더 넓게, 새롭게 인식한다. 이 차가운 사랑이 가장 뜨겁게 달아오를 것이다. 붉은 입술의 고운, 너를 향한 불멸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