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 2. 4. 20:40

박진우 (파리 5대학 커뮤니케이션 사회학 박사과정)


아감벤 효과

<호모 사케르>라는 낯선 제목의 책 한 권이 처음으로 세상에 던져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이다. 고대 로마법 전통 속에서 ‘희생될 수 없는 존재’ 즉 제의에 바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를 죽여도 어떤 법적 처벌을 받지 않는 이 모순적 존재에 대한 논의는 모두에게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 이탈리아 철학자에게 ‘호모 사케르’라는 범주는 서양 정치철학의 근원적 패러다임을 질문하기 위한 대단히 중요한 도구였다. 주권 권력에 의해 배제됨으로써 주권 속에 포함되는 이 모순적 존재, 이러한 ‘벌거벗은 생명’이 시민, 인권과 같은 서양 정치철학의 핵심 범주라는 주장은, 우리로 하여금 법과 주권, 정치와 근대 민주주의의 관계를 새롭게 사유하게끔 해 주었다. 이 책에 대한 관심을 통해 오랫동안 유럽 내 소규모 지식인 써클 속에서 미학자로 명성을 쌓은, 또한 발터 벤야민 전문가로 기억되던 이 철학자는 그야말로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우리 시대의 가장 독창적인 정치 사상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미국 뉴욕에서 벌어진 테러 사건이 드리운 암울한 그림자 속에서 그는 <호모 사케르> 연작의 또 다른 기획으로 ‘예외 상태’의 개념을 부각시켰다. 그에게 예외 상태란 바로 법의 공백이지만, 그것은 또한 우리 시대 법질서의 핵심이기도 하다. 법보다 “법-의-힘”이 우선하며, 그것은 전체주의와 민주주의라는 20세기 정치사를 특징짓는 두 가지 대립적 견해의 환원 불가능한 차이의 무화를 향해 나아간다. 이것은 <호모 사케르>의 또 다른 변용이자, 새로운 영역에서의 이론적 시도이다. 

“군림과 영광”, 혹은 생명정치의 새로운 계보학

이제 우리에게는 또 다른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벌거벗은 생명’과 주권 권력, 그리고 예외 상태를 거친 다음 저자의 사유는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2007년 그는 <군림과 영광>이라는 제목으로 또 다른 <호모 사케르> 연작을, 그리고 <사물의 서명(Signatura rerum) : 방법에 관하여>라는 조그마한 저술을 우리 앞에 나란히 던져 주었다. 그는 이 두 권이 <호모 사케르> 연작의 마지막 한 권을 향한 최종적인 디딤돌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새 그의 연작은 총 7권이 될 것이라는 소식도 들려온다. 그렇다면 <군림과 영광>은 <호모 사케르>의 전체 구상에서 하나의 거대한 전환기였을까? 혹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의 사유가 어느덧 새로운 목표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 

<군림과 영광>이 다루는 1차적인 주제는 근대 사회에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됨으로써 새롭게 출현한 ‘통치 기계’의 건설 과정에 대한 계보학적 분석이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폴리스)와 가정(오이코노미아)의 구분은 후기 고대에 이르러 기독교 공동체의 성립 과정에서 점차 소멸되어 갔다. 하지만 양자의 새로운 결합이 이루어진 계기는 바로 기독교 신학의 등장이었다. 그것은 신의 고유한 능력을 통해, 신비로운 방식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전작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감벤은 이 과정에서 방대한 문헌학적 지식을 동원하면서 기독교의 ‘삼위일체’의 도그마 속에 신비로운 “하느님의 경제학(오이코노미아)”이 도입되는 과정을 흥미롭게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위계’라는 새로운 요소가 추가된다. 교회의 건설과 함께 천사, 그리고 ‘천사의 왕국’에 대한 각종 신학적 논설들을 살펴보면서, 그는 정치와 경제를 결합시키는 새로운 행정 기구의 탄생이 신학 속에 예고되어 있음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일찍이 단테가 <제정론>에서 기술하였듯, 천사들의 조직과 위계란 곧 하느님의 행정 기구이다.

근본적으로 <군림과 영광>은 생명정치, 계보학, 통치성에 관한 푸코의 널리 알려진 작업들의 연장선상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푸코가 바라본 기독교와 근대 사회의 관계가 아감벤에게 그대로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계보학이라는 동일한 방법론을 채택하지만, 그의 시선은 규율 장치로서의 기독교라는 인식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또 푸코의 강연록 <인구, 영토, 국가> 그리고 <생명정치의 탄생>에 나타난 시장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이념 속에 내재되어 있는 권력 장치들의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히려 근대적 통치성의 각종 장치들과 근원적으로 결합된 신학적 환영의 계보학을 구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현대 사회의 정치가 경제라는 ‘신비로운’ 영역에 자신의 모든 권력을 ‘내어주고’, 정치 스스로는 여전히 다만 우리의 삶에 ‘군림’하고 있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재림하면 천사들은 더 이상 존재 이유가 없어진다. 자유주의 및 시장주의라는 ‘하나님의 경제학’이 완성되면, 더 이상 ‘천사’라는 행정 기구들이 담당한 위계의 기능은 불필요하다. 이러한 역사적 변천 - 그것이 바로 근대 자본주의의 완성이다 - 속에서, 위계는 ‘영광’이라는 새로운 형태를 취한다. 영광이란 모든 것이 경제에 일임된 사회에서, ‘군림’이라는 정치의 존재 방식의 근원적인 ‘무위(無爲)’ - 아감벤은 이것이 바로 서양 정치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 를 우리의 눈앞에서 가려 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현대 사회에서 미디어를 통한 스펙터클은 바로 이러한 형태의 ‘군림과 영광’의 통치 메커니즘을 재생산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오래 전 철학자 기 드보르가 스펙터클 속에서 자본주의 경제와 정치의 결합을 파악하였듯이, 아감벤은 ‘영광’ 속에서 무위, 믿음과 추앙, 그리고 복종이 정치와 결합하는 방식을 파악하고자 한다.

<군림과 영광>이 제기하는 궁극적인 관심사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사실 한국사회는 경제가 정치를 압도하는 근대성 특유의 현상을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으며, 아감벤 또한 이 주제를 푸코의 생명정치 개념에 보다 충실한 형태로 이미 <호모 사케르> 1권에서도 다룬 바 있다. 그러면 이처럼 ‘영광’의 스펙터클과 그것이 가리고 있는 경제 우선의 통치 메커니즘 - 이러한 “군림과 영광”의 사회, 혹은 “스펙터클의 사회” -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과연 어떤 변화의 가능성이 주어져 있는가? <호모 사케르>의 연작이 진행되면서, 그가 가장 크게 시달렸던 질문은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과연 <호모 사케르> 속에서 지금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주체를 찾아낼 수 있을까? 아니, <호모 사케르>가 전개한 수많은 논의들을 거치고 난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변화와 그 주체라는 오랜 패러다임을 현대 스펙터클 사회 속에서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주어진 논의에서 여전히 모호한 상태로 남은 이 물음에 대하여, 다행히도 저자는 우리에게 최종 해답을 전해 줄 것을 약속한다. 그것 또한 그의 <호모 사케르> 연작이 도달할 최종 기점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가 여전히 ‘완성’을 향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 거대한 연구 프로젝트의 종결을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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