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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111호] '열외인종 잔혹사'의 저자 주원규를 만나다

「열외인종 잔혹사」는 제 14회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발간된 이후 여기저기서 큰 화제가 되었다. 한국 사회가 끌어안고 있는 모순이 폭발하는 상황을 속도감 있고 시의적절하게 묘사한 것이 가장 큰 요인일 것이다. 채용 여부를 저울질 당하는 인턴 여성에서부터 박정희를 목 놓아 외치는 노인에 이르기까지 저자가 한 공간 안으로 밀어 넣은 인물의 군상은 실로 다양하다. 나는 어떤 인물에 해당되는지 생각하며 책장을 넘기다 보면 군중의 혼란과 분노가 종이 너머로 전해져 온다. 스스로“한겨레 아니면 절대 당선되지 않았을 내용”이라며 웃어버리는 저자 주원규는 과연 어떤 사람이고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 걸까.




“건축은 기능적 목적으로 공간을 만드는 예술이다. ... 건축은 공간을 통해 인간의 생활을 재조직하는 작업이다. ... 건축은 인간의 생활을 조직하기 위하여 공간을 조직하는 예술이다.”

● 제목이 독특합니다.‘열외인종 잔혹사’는 천민자본주의가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 나타나는 열외인간들을 묘사하고 있는데요. 열외인종 혹은 열외인간에 대한 나름의 정의가 있을 것 같아요.

1차적으로는 경쟁사회 시스템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경쟁에서 도태된 사람들, 경쟁할 기회조차 잡지 못한 사람들을 의미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경쟁사회 안에서 경쟁하고 활동하고 움직이고 살아가야만 하는 모든 사람들 자체가 열외인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한국 사회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총칭하는 것이죠. 한국 사회 전체가 천민자본주의에 함몰 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이미 열외인종이라고 생각합니다.


● 소설 전반적으로 서울의 공간을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셨는데요. 그 중에서도 코엑스를 굉장히 상징적인 공간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단 코엑스라는 공간 자체가 천민자본주의의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비주의의 양극화 같은 부분들이 완전히 집약되어 있는 거죠. 지하철로도 쉽게 접근이 가능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코엑스 내부는 소위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일반 사람들이 살 수 없는 고가품들로 채워져 있어요. 그래서 제게 코엑스는 소비를 촉발시킬 수 있는 첨단을 지향하는 공간입니다. 롯데리아와 밥 한끼 먹는데 38만원을 내야 하는 디럭스룸이 공존하는 모습이 사회의 모순을 단적으로 나타낸다고 생각했습니다.


● 작품 속에서 김중혁은 이성적인 방법을 통해 위기를 탈출하는 등 광록과 비교해서 노숙자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김중혁이 전세를 역전시키는 핵심적인 인물이 되는데요. 김중혁에게 이러한 역할을 부여한 특별한 의도가 있습니까?

사실 이 작품은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탄핵당하는 것을 보고 구상했어요. 특히 김중혁이란 캐릭터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실제로 보수와 진보 양쪽에서 소외당한, 열외된 사람이었죠. 그런 상황에서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고 자신의 소신을 지키려다 결국 희생되었잖아요. 이 서사를 김중혁이라는 캐릭터에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또한 한국 사회에서 민중의 상황을 묘사할 때조차 노숙자라는 존재는 이와 동떨어져 있는 열외인종이 되고 있는 상황에 주목했고요.


● 많은 사람들이 양머리(십헤드)라는 상징성에 주목하는 것 같습니다. 목자가 없으면 스스로 길을 찾지 못하는 무능한 양으로 민중을 매도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다면 민중을 어떤 식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제가 소설 속에서 사용한 양머리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갈 수 없는 존재, 목자가 인도해야만 하는 존재들입니다. 이는 역설적인 표현이죠. 실제로 민중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것은 지배 세력의 관점이고, 저 자신은 이러한 관점을 해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민중을 양으로 보는 시각에 장점은 있죠. 목자가 이끌어주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목자가 낭떠러지로 우리를 데려간다면? 우리는 아무런 저항 없이 그냥 희생당하게 됩니다. 저는 그러한프레임 자체를 거부하고 싶은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문화∙정치적인 해체가 일어나야 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문화나 의식에 치중하는 한국 교회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지만, 텍스트에 집중함으로써 기독교의 본 취지를 되짚어 보도록 하는 대안이기도 합니다.


●‘분노’가 혁명의 방아쇠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성 혹은 논리가 아닌 감정적인 분노로 인해 사회 모순이 터져 나온다는 발상은 독특해 보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성의 시대니 뭐니 해서 이성을 강조해 왔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성이 정지된 상태가 현재 한국사회라고 생각해요. 제가 이야기하는 분노는 거의 막장에 내몰렸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한 생존 본능으로서의 분노를 말합니다. 반사작용이라는 측면의 분노라는 거죠. 사회가 잘못되었으니까 바꿔야 한다는 혁명적 의식에서 분노하는 게 아니라 내몰린 상태에서 어쩔수 없이 파열되는 현상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한 사태에서 이성을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사치인 시대라고 생각하고요. 이성의 반대편인 감성적 측면이 분노로 폭발함으로써 역으로 이성이 사회의 문제를 자각하는 시스템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더 이상 감정 등의 개념이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시대라고 보고 있습니다. 소설에서도 말이 안 되는 지금 상황을 묘사하고 싶었어요. 감정이 극한으로 몰려있는 상태, 그런 상황에서는 어떠한 논리도 적용되지 않거든요.

● 소설에서처럼 분노가 방아쇠가 되어 혁명이 실제로 일어나야 한다면 그러한 변화는 어떤 모습일까요?

저는 이미 소설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봅니다. 내몰린 사람들의 분노의 폭발은 이미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표출되고 있어요. 저는 혁명이 점조직처럼 흩어진 개인들에 의해 동시다발적으로 무질서하게 일어날 거라고 생각합니다. 주류의 헤게모니가 밑에서부터 와해되어야 합니다. 유교 가부장주의와 미국적 자본주의가 결탁된 한국의 기묘한 사회 구조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작지만 의미 있는 움직임들이 나타나야 되는 것이죠. 이렇게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점조직형태의 혁명이 우리를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최근 한국 사회에서 그러한 희망의 움직임들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별로 보이지 않는 것 같아요. 사실 이는 30대들의 책임이지요. 현재 20대가 일어나서 활동을 해야 하는 시기인데 그렇게 할 수 있게끔 30대가 터를 마련해주지 않고 있어요. 오히려 보다 더 자본주의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지요. 하지만 지금 10대들에게는 희망을 걸어 봐요. 지금 20대들과는 좀 다른 것 같고, 또 혁명에 대한 선입견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가능성이 존재하지않을까 생각하는 거죠.

● 점조직적 형태의 혁명은 희망적으로 들리긴 하지만 실제적인 측면에서 하나의 움직임으로 응집이 되어야만 물리력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저도 낭만적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오히려 기득권을 결속시키는 계기로만 작용할 가능성도 있죠. 하지만 적어도 소설, 영화 같은 문화 영역은 밑에서부터의 혁명을 부르짖는 것이 소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최근 들어‘소통’이 사회 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선생님 역시 소통을 강조하고 계시는데, 현재 한국 사회에서 진정한 소통 혹은 가장 시급한 소통은 무엇일까요?

지금 한국사회는 문제라는 차원을 이미 벗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말하자면 폭풍전야의 상태인데, 어떤 식으로든 다가올 파멸을 유예하는 시기인 거죠. 그런 후폭풍에 어떻게 반응하고 인식하느냐에 따라 파멸에 대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모순들로 인해 분노의 감정이 현실화되었을 때 이러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소통이 필요함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내재화되어 있는 분노를 끄집어내는 소통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현 정부의 상명하달식 소통은 진정한 소통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한 소통은 문제 인식이나 현상에 대한 지적이 이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이죠.

● 작품 속에서도 방금 말씀하신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관계는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 카니발을 주도하는 양머리 집단 사이에도 소통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소통 자체가 안 되는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진정한 소통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현재 어떤 집단이나 사람들 사이에서도 소통이 막혀 있는 상태임을 강조한 것이죠.

● 책이 나온 이후 선생님의 이력이 많은 화제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활동하시는 ‘대안교회’와 활동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십시오.

대안교회란 한 마디로 건물이 없는 교회입니다. 건물 자체가 자본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이렇게 종교가 자본에 예속되면 종교는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인민의 아편이 됩니다. 따라서 적어도 종교인이라면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대안교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대안교회의 활동은 간단합니다. 모여서 함께 성서 원전을 공부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성서도 번역하고요. 한국에 교회가 들어오는 과정에서 본래의 취지와는 다른 지금의 풍토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초기 교인들은 오직 문서만을 읽었습니다.

● 한국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성경이 원래의 기독교 정신과 많이 다른가요?

한국의 천민자본주의 프레임 안에 교회가 들어온 거죠. 70년대 박정희 시대에 급성장한 것이 한국 교회입니다. 성서의 가르침이 천민자본주의와 유교적 가부장주의라는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사회 기득권의 논리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죠.‘잘먹고 잘살자’라는 이야기를 교회에서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해요. 결국 한국 교회는 자본이나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보는 것이죠. 사실 청교도적인 순수성은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거기에 유교적 가부장주의를 끌어와 권위의 위계를 형성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니 토 달지 마라. 이런 식의 논리를 신자들에게 강요하는 형태가 대표적이죠. 이런 부분들을 비판하고 쇄신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 유교 가부장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데요.

유교 가부장주의는 한국 사회의 암이에요. 도려내야 해요. 사실 유교주의 자체가 배척할만한 것은 아닌데,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미국식 자본주의와 섞이면서 부정적인 면으로 키워졌어요. 근대화 과정에서 단추가 잘못 끼워진 거예요. 더 이상 조선시대 때의 그것이 아니고, 권력의 도
구가 된 것이죠.

● 현재 10, 20대의 경우 문자매체보다는 영상매체에 더 익숙합니다. 감수성 또한 이전 세대와는 다를 수밖에 없고요. 문학과 타 매체 간의 연계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가요.

비단 우리 세대만 해도 문학의 언어만을 배우며 자라진 않았어요. 엔터테인먼트 영상 언어의 세례를 받고 자라난 세대이지요. 퓨전이나 크로스오버 등 같은 현상은 나타날 수밖에 없어요. 따라서 타 매체들과 어울리면서도 문학 고유의 정체성을 살릴 수 있는 방향을 지금부터라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문학이 언어라는 재료를 사용하는 데, 이를 살려내면서 크로스오버를 할 수 있는 방안 말이지요. 또, 솔직히 한겨레 문학상이 아니었다면 이 소설은 당선되기 어려웠을 겁니다. 문학 업계가 많이 경직되어 있다는 이야기이에요. 매체 융합의 문제뿐만 아니라 미술이나 문단 등 권력구조의 해체 또한 고민해야 할 듯합니다.

● 대학원생 또한 잉여인간이라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돈이 안 되는 일을 한다는 것이 곧 무능함으로 인식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학문에 정진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우선 학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쏟아지는 선입견, 편견이 없어져야 합니다. 현재는 돈이 안 되는 학문을 비생산적이라고 몰아가고 있는 분위기인데, 이러한 잣대를 만들어낸 것 자체가 구조악이지요. 생산-비생산, 효율-비효율이라는 이분법적 시각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사회적 의미들이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고리를 깨기 위해서라도 지금 학문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기존 헤게모니를 해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항적 움직임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 그렇다면 지금 시대에서 문학의 힘은 무엇일까요? 문학으로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요?

문학이 할 수 있는 것은 센스를 제공하고, 우리가 처한 현실을 느끼게 하며 질문을 던져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제대로 수행함으로써 독자들의 감각을 일깨워야죠. 비판을 하든 긍정을 하든 어떤 식으로든 현실을 수용해서 소통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 문학의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김지현 객원기자 / 정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