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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108호] 누구를 위한 서강 50주년인가

박승일 기자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반짝이는 네온사인 간판에 눈이 현란하다. 개교 50주년을 알리는 간판이 길 가는 사람들을 호객하는 잡상인의 몸짓마냥 요란하고 분주하다. 그 요란한 자기과시는 자본의 첨단인 명동거리를 장식하는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불편한 것은 그 형용색색의 형광색이 갖는 촌스러움 보다 50주년을 기념한다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욕망의 현상학이다. 그 간판은 그저 정문 앞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앞을 지나는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개방되어 있으며, 때문에 공간학적 위상을 갖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서강에 대한 광고이기에 독점적 위치를 점할 수 있으며, 결코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우리의 눈을 침범해 들어온다. 그리고는 결코 하나로 수렴될 수 없는 서강인들을 학교의 영광을 재현하는 데 이바지해야하는 순한 양으로 호명한다.

그 간판이 정작 원하는 것은 서강 50주년을 이루어낸 수 많은 얼굴들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대규모 기념식을 광고하고 이로써 얻게 되는 직간접적 수익이 아닐까. 50주년 VIP회원을 모집하고 카드를 발행하는 건 이를 지불할 수 있는 이들만이 서강의 VIP라는 모종의 계약이 아닐까. 높이 솟은 곤자가와 더불어 앞뒤에서 개선 의식을 거행하는 위용이 불편한 것은 비단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 반짝임 앞에 서강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분투하는 졸업생들과 어려운 현실을 이겨내며 공부하는 재학생들은 그저 초라하게 비켜서 있다. 매일같이 오는 문자와 정기간행물은 서강의 어제와 오늘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생략 한 채 전화 한 통에 얼마, 계좌 하나에 얼마라는 시장의 뻔뻔함을 그대로 담고 있을 뿐이다. 그 뻔뻔함에 당황해하지도 무안해하지도 못하고 내가 속한 서강이 잘되는 게 내가 잘되는 것 마냥 위무해왔던 순진함도 통속의 극치를 달리는 간판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다.

물론 50주년은 축하해야 마땅하고 당연히 기념해야 할 행사임에는 틀림없다. 특히 대내외적으로 서강의 위신이 추락한다고 걱정하는 많은 이들에게 아직 서강이 건재함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함 혹은 당혹함을 숨기기에는 욕망의 집어등(集魚燈)이 너무 노골적이다. 그 노골적인 구애 앞에서 서강의 퇴색을 말하는 게 지나친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

다른 방식의 기념은 불가능한가. 서강 50년을 함께한 수 많은 이들을 기억해내는 새로운 기념은 정말 없는 것일까.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하지만 지금-여기의 현실 속에 여전히 침전돼 있는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게 자본의 힘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인가. 오히려 자본이 아니면 불가능해 보이는 기념이야말로 자본의 영역 안에서만 가능한 방식의 기념이 아닐까. 돋보이지만 요란하지 않고,친절하지만 유약하지 않고, 말을 걸지만 일방적이지 않고, 포함하지만 배제하지 않는 식으로 서강을 말하는 것은 서강을 ‘고정된’ 역사로 만들어 ‘그들’이 ‘기념’하는 게 아니라 서강의 50년을 ‘현재적 사건’ 으로 끊임없이 ‘재창조’ 함으로써 과거와 ‘이야기’ 하는 작업을 통해서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작업은 서강의 기억을 간직하고있는 모든 이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 게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