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04 18:48


홍성일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운영위원)



MB 시대 디렉터스컷 혹은 딕태이터스컷

영화 연구에서 가장 활발한 연구 분야 중 하나는 작가주의 연구이다. 작가주의는 불어인 오떼리즘(auteurism)을 번역한 것으로 작가, 저자라는 뜻의불어 auteur에서 유래하였다. 대체로 영화 연구자들은 일련의 시간의 누적 속에 지속적으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펼친 영화감독에게 작가의 칭호를 부여하곤 했다. 새롭게 작가를 발굴하거나 기존 작가를 재조명하기도 했다. 영화를 산업이 아니라 예술로 격상한 이로,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창조한 이로 작가를 평가했다. 작가의 존재로 인해 영화 매체는 음악, 문학, 미술과 같은 다른 예술 매체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제작자의 상업적 통제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레 자신의 창조성을 관철한 이에게 존경과 경외의 헌사가 쏟아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작가주의가 소수의 작가 감독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DVD가 등장하며 일반화한 디렉터스컷은 작가가 되고픈 모든 감독의 욕망을 잘 드러낸다.DVD는 디렉터스컷까지 동시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저장 공간이 충분하였고, 음성 코멘터리와 삭제된 장면 추가 등과 같은 하이퍼링크적 속성은 감독이 극장판에서 못 다한 이야기를 다시 말 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꼭 작가로 칭송받지 않더라도, 제작자와 험한 말을 섞지 않더라도 감독은 창작자로서 자신의 영화를 통제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제작자 입장에서도 DVD의 디렉터스컷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이미 극장판을 통해 일정한 수익을 달성한 만큼 디렉터스컷의 추가는 또 다른 수익을 더하면 더했지 마이너스가 되지는 않았다. 디렉터스컷은 새로운 부가수익상품이었다. 영화의 완성본을 놓고 돈을 댄제작자와 창작을 한 감독이 벌이는 상업성과 예술성의 지루한 실랑이는 DVD 속에서는 행복한 화해를 맺은 것처럼 보인다.

허나 이것으로 문제가 종결된 것일까? 대규모 상영을 목적으로 하는 상업적 매체이며 동시에 촬영, 조명, 음향, 연기와 같이 집단 창작 매체이기도 한 영화 매체에 창조자로서의 작가 개념이 적합한 것일까?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제기해보자. 제작자와 감독의 다툼 사이에서 정작 영화를 관람하고 즐기는 수용자의 입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작가주의는 수용자의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 것 같다. 수용자는 작가주의에 노출되는 대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크다. 그 반대 입장도 마찬가지이다. 제작자의 상업주의 역시도 수용자를 티켓 구매자로 한정할 뿐이다. 그렇기에 DVD 속 디렉터스컷을 통한 해피엔딩은 실상은 그들만의 것일 가능성이 크다. 상업성을 매개로 한 제작자와 감독의 해피엔딩 속에는 수용자를 배제한, 즉 반민주주의의 위험이 놓여있을지도 모른다. 수용자가 빠진 디렉터스컷(director’s cut)은 자칫 감독의 입장만을 강변하는 딕태이터스컷(dictator’scut)으로 변질될 수 있다.

영화 연구와 유사하게 대중문화물을 주요한 연구 대상으로 삼는 문화연구가 작가주의 영화 연구와 미묘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지점이 이곳이다. 문화연구자들은 반복적으로 단일한 근원으로서의 저자, 작가의 자리를 최소화하고자 했다. 텍스트는 어원 그대로 수많은 코드의 직조물이기에 이를 작가의 창작력으로만 환원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텍스트 속에는 작가로 아우를 수 없는 한 사회의 지식의 틀, 생산 관계, 기술적 하부 구조가 있기 마련이다. 해독 또한 마찬가지이다. 수용자 역시도 그를 넘어선 한 사회의 지식의 틀, 생산 관계, 기술적 하부구조에 따라 다양한 해독을 수행한다. 생산과 수용의 비대칭성은 문화 연구자들이 오랫동안 천착한 분야였다. 어떤 이는 아예 저자의 죽음을 선포하기도 했다. 수용자는 텍스트의 중심에 있는 단일 기원으로서의 저자의 자리에 사회 문화적 맥락(con-text)을 부여하거나, 텍스트를 사유화하여 그와 함께 하기도 한다(com-text). 문화연구는 보다 민주주적인 방식으로 대중문화물을 위치시키고자 했다.

문화연구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기나긴 혁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예술가는 외로운 탐험가가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의 목소리이다…….소통 수단의 발견은 공동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며, 여러 사회에서 예술가의 기능은 이러한 의미를 계속해서 경험하고 활성화하는 수단에 능통해야 하는 것이다.”그의 입장을 우리의 논의로 옮겨보자. 디렉터스컷이 딕태이터스컷으로 변질되지 않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작가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사회의 목소리를 체현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주문이겠다. 부유하는 일상적인 사회적 의미를 직조하는 일이 작가의 역할인 셈이다. 이차적으로 작가는 이를 소통 가능한 형태로 탈바꿈시켜야 한다. 소통은“독특한 경험을 공동의 경험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일상적인 사회적 의미를 작품을 통해 사회에 되돌려줌으로써 공동체를 형성케 하는 것이 예술가의 책임이자 권리이다. 그렇다면 작가주의를 꼭 텍스트의 단일한 저자로서 한정할 이유가 없다. 사회적 작가로의 확장은 작가주의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제공한다. 그가 얼마만큼 공동체와 호
흡하며 소통하려 했는지가 작가를 평가하는 주요한 기준으로 부상한다. 그로 인해 공동체가 얼마만큼 소통 가능해졌는지가 중요해진다. 이 때 디렉터스컷은 딕태이터스컷의 위험에서 벗어나 데모크라틱컷(democratic cut)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윌리엄스의 책 제목처럼 단박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기나긴 혁명’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장황하게 디렉터스컷에 담겨 있는 딕태이터스컷의 위험을 이야기한 것은 최근 방송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흐름 때문이었다. 살펴보면 우리 시대의 많은 감독들이 숨 가쁘게 각자의 디렉터스컷을 제작중이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감독관은 정권에 비판적인 방송이 불공정하다고 하며 방송을 순치하는데 사력을 다하고 있다. 심지어 검은 옷을 입어 불경하다며 주의를 주곤 한다. 사법 감독관은 정권에 비판적인 방송을 한 이들을 구속하거나 긴급체포한다. 노종면 기자, 이춘근 PD, 김보슬 PD에 뒤이어 4월 28일에는 무더기로 네 명의 작가, PD를 긴급 체포하였다. 방송사의 사장 교체도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YTN과 KBS의 사장을 정권의 코드에 맞는 이들로 교체하였고 MBC의 경우에는 민영화를 들먹이며 조직 자체에 균열을 가하고 있다. YTN과 KBS의 새 감독관은 정권의 이해를 충실히 반영하며 비판적인 내부 인사를 솎아내는데 한참이다. 새 정부 들어 위기에 처하거나 사라진 방송 또한 한 둘이 아닌데, <시사투나잇>, <미디어 포커스>, <시사기획 쌈>, <PD 수첩>, <지식채널 e>, <돌방 영상>, <추적 60분> 등이 이에 해당한다. 가수 윤도현, 앵커 신경민, 토론 프로그램 진행자 정관용 등은 석연치 않은 이유로 프로그램에서 하차해야만 했다. 감독관들이 자르고 없애며 고함만 질렀던 것은 아니었다. 연쇄 살인자 이슈를 부각시켜 용산 참사를 덮으라는‘생산적’지시를 하기도 했고, 최근에는 아예 봄철 개편을 맞아 KBS에 정부의 정책을 홍보하는 프로그램 <5천만의 아이디어로>를 편성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모든 감독관의 감독관 대통령은 한결 국민과 가까워졌다. 우리는 KBS를 통해 대통령이‘안면도 국제 꽃 박람회’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는 장면을 생방송으로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급격한 변화가 가리키는 것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는 방송가 디렉터스컷의 무한 확장이다.기획의 중심에 있는 감독에게는 새로운 디렉터스컷이 흡족하며 조화롭게 보일 것이다. 허나 이 와중에 수용자의 입장은 과연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물어보자. 디렉터스컷은 우리의 일상적인 사회적 의미와 함께 하고 있는가? 감독관은 우리 사회의 목소리를 체현하고 있는가? 그리하여 이를 통해 우리의 소통의 욕구가 활성화되며 공동체 의식이 커가고 있는가? 오히려 우리의 소통욕구는 겁에 질려 움츠러들었고 공동체 의식은 금이 가고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적대하는 실정이다. 소통은 불통이 되기 십상이었다. 새로운 디렉터스컷은 감독 자신과 감독의 이해와 같이한 이들에게는 흡족할망정 대다수의 수용자들에게는 불만족스러울 뿐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데모크라틱컷이 아니라 딕태이터스컷이다. 고압적으로 단일한 기원의 자리를 차지해 수용자들을 훈계하는 디렉터스컷 말이다. 반민주적인 딕태이터스컷의 과잉 속에서 한국의 방송과 공동체는 급속히 황폐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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