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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108호] 길 위에서 함께 배움을 청하며

『추방과 탈주』의 저자 고병권을 만나다

『추방과 탈주』의 저자 고병권을 만나 현 한국 사회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보았다. 길 위에서 함께 배움을 청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고, 탈주에 대한 구체적 실천 지점을 함께 사유해 보고자 한다.


이 책은 어떤 계기로 쓰게 되셨나요? 제목이 많은 말을 하는 것 같은데요.

사실 이 제목은 2006년 가을쯤에 결정된 제목이니까 책으로는 2년 반 만에 나오게 되었네요. 원고는 매번 필요할 때마다 쓴 것이라서 사실 2년 반 동안 연구했다는 것은 거짓말이고요.(웃음) 책 앞에 썼지만 2006년 초반에 우리사회에 있었던 새만금 문제, 대출이 미군기지 건설, 노대통령의 한미 FTA선언 등을 보고 뭔가를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거든요. 그래서 그냥 걷자는 제안을 했는데,기왕 걸을 거면 좀 멀리 걷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근데 걸어보자는 이야기를 할 때 어떤 뉘앙스가 있었냐하면 한편에서는 참을 수 없으니까 뛰쳐나가는 측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 자신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알고는 있는 건가에 대한 생각이 들어서기도 해요. 한 2주 정도 걸으면서 지역 사람들과 매일토론회나 세미나를 열고 다시 걷고, 동네에 도착하면 세미나하고 걷고 하면서 매일 세미나를 열었어요. 그 와중에 이 책에 있는 첫 번째 원고, 국가의 추방하고 대중의 탈주를 떠올린 거예요. 2006년 4월에.

안산에서 만났던 이주 노동자들, 개화도에서 만난 어민들, 산에서 만난 농민들, 미군기지가 들어설 대추리에서 만난 주민들, 미군폭격지가 있는 매향리에서 만난 사람들.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람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있어요. 정치라는 것이 일종의 언어문제이기도 하거든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동물로서의 목소리(음향)가 언어(로고스)로 변해가는 것이 폴리스인데, 이 사람들은 정말 목소리로 존재하는구나 이 사람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른바 여론을 매개하거나 정치적 의사를 매개하거나 운동을 매개하는 모든 기구들이 작동하지 않거나 혹은 이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있었던 거죠. 자기목소리를 전달할 통로가 없을 때, 초대 받지도 않고 자격도 없는 사람이 말하려고 끼어드는 게 난입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첫 번째 글엔 그런 뉘앙스로‘탈주’를 썼는데, 솔직히 이때 탈주의 의미는 뭔가 약간 좀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어요. 매개가 작동하지 않을 때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는, 어떻게 보면 불가피하게 강제되는 부분인 거지요.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느낌도 들었거든요.‘탈주’라는 것의 다른 가능성이랄까? 우리의 삶이 돈이나 권리로 환원되기 이전의, 일종의 백그라운드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질서로 다시 구축될 수 있을까.


추방됨과 탈주함의 복합적 작동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지금은 삶이 이루어지는 어떤 관계망이 붕괴되어 버렸어요. 개화도에서 바다를 막으면서 붕괴된 것은 사실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거든요. 이젠 돈이랑 매개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도시나 농촌이나 마찬가지죠. 어떤 의미에서 관계망의 붕괴는 한 개인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에 불안을 조성하거든요. 모든 책임에 개인에게 귀속되고 개인은 극도로 고립화 되지요. 어부 한분이 저한테 지나가면서 슬쩍 말했어요. 왜 농사를 짓는지 물었더니 우리는 악착같이 살아야한다고, 그때 얼핏하는 말이 농부가 돼서라도 어부가 돼야 한다고. 그 말이 저한텐 굉장히 세게 와 닿았어요. 삶을 계속 확장시키려는, 다시 구축해 나가려고 하는 노력이 있잖아요. 어부가 어부이려면 농부라도 돼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떠나야 하니까 악착같이 버텨야한다고. 그런 가능성 속에서 새로운 삶의 구축이라고 그럴까요? 극히 어렵고 낮은 가능성이지만 그런 힘들을 봤거든요. 탈주가 갖는 굉장히 중요한 가능성이라는 느낌, 복원 돼야할 것이 뭐고 창조 돼야할게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됐지요.

두 종류의 탈주가 있어요. 하나는 불가피한 형식. 작년인가? 홍세화 선생이 어떤 칼럼에서 우린 어떤 아노미를 강요받고 있다고 썼어요. 그런데 정말 맞아요. 어떤 적대적 실천으로써가 아니라 불가피한 실천으로써의 탈주들이 일어나고 있잖아요.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긍정적 형식의 탈주가 있어요. 이렇게 내쳐진 김에 오히려 뭔가 새로운 실험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죠.


"추방, 그것은 지난 십여 년간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일을 말해준다. 탈주, 그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의 전조이다. 길 위의 무수한 대중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느가' 에 대한 증언이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에 대한 예언이다. 아직은 웅성거림이고 아직은 머뭇거림이지만, 소삭임의 말들은 급속히 처져나가고 있다. 그러나 여러 말들이 갑자기 하나의 언어로 짜이는 순간이 올지 모른다. 그때 대중은 더이상 속삭이지 않고 명확한 언어로 말할 것이다. 이제 때가 되었다고"


현재의 정치체제에서 어떤 방식의 탈주가 가능한가요?

저는 이제 최장집과 백낙청 선생의 문제틀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고 생각 합니다. 우리가 좀 더 성숙한 민주주의를 가져야 할 문제인가 아니면 이제 다른 민주주의가 필요한 것인가에서 전 약간 후자 쪽으로 기울어 있어요. 어떤 참된 민주주의 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80년대의민주주의가 있었고 이젠 다른 민주주의가 필요한 게 아닌가하는 거죠. 기존 민주주의의 심화∙확장∙발전 이라는 틀이 아니라요. 가령 이주노동자에 대한 예를 봐도 알 수있어요. 최장집 선생은 민주주의를 정당이 다수의 이해에 호응하려고 노력하고 서로 정책 경쟁을 하는 체제라고 정의하시는데, 그 속에서 배재되는 소수자들은요? 공론장이라는 영역은 상식과 통념이 지배하는 영역이에요. 그런데 거기서 배재를 경험하는 사람, 즉 대의 과정에서 대의라는 형식 자체가 배재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가령 여기서 삶을 살아가는 이주노동자는 이 삶에 대한 결정권을 가질 수 없거든요. 시민권을 안 갖고 있어서요. 다시 말해 민주화 과정이 다른 한편으로 배재가 공고화되는 과정일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투표권주고 대표를 뽑으라고 하면 풀 수 있는 문제인가에 대해선 회의적이에요. 이주노동자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전혀 상반되는 질문을 던지는 거지요. 기존의 민주주의를 확대 심화시키는 문제가 아니라 다른 민주주의를 상상할 수 없는가하는 문제 말이에요.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뭔가라는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질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대표적인 두 분을 상정하고 말했지만 좀 더 넓게 보면 80년대 민주화 운동이 이제는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되어
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지점이 있나요?


탈주를 정의하는 맥락이 긍정이든 부정이든 간에 낯설어 지는 것이 필요해요. 국가에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을 불안해하는 대중이 있고 그 대중을 불안해하는 권력이 있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굉장히 낯설어지고 있죠. 그런데 권력은 그 낯설음을 깨서 투명하게 만들려고 하는 대낮에 대한 열망이 있다고 할까요? 환하게 봐야겠다. 복면 같은걸 벗겨서 어떤 놈인지 봐야겠다고 하는 욕망이 있죠. 그러나 역설적으로 대중은 더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어요. 추방되고 배재되니까 자기를 설명할 틀과 언어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웅성거림 속으로 계속 밀려나는데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만약에 탈주의 어떤 실천적인 지점을 상상할 수 있다면 이러한 상황을 더 가속시킬 필요가 있다는 거죠. 익명성을 더 강화해야 된다는 겁니다. 서구철학에서는 익명성을 자꾸 어디 숨는 거나 감추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진정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대중에 휩쓸리는 건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고, 개인의 얼굴이야말로 진정한 얼굴이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대중이란 존재가 있다면 그의 얼굴은 참 익명적일 거라고 생각해요. 익명성은 감춤의 양식이 아니라 드러남의 양식이거든요. 뭔가드러나는 거. 그래서 대중이 하나의 힘으로 작동할 때, 가령 미네르바가 대중의 얼굴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복면을 벗겨보니까 전문대 졸업생이니 뭐니 하면서 변변치 못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복면을 벗김으로써 밝혀낸 건 실체가 아니라 대중의 힘을 잃은 한 사람의 얼굴에 불과하거든요.


익명의 얼굴이 어떤 정치적 효과를 가질 수 있나요?

저는 대중들이 더 노골적으로 복면을 써야하고 더 익명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국가나 기업에 확실히 파악되지 않는 말이나 삶의 여지가 더 있어야한다는 거죠. 은밀한 네트워크, 더 은밀해지고 밖으로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곧바로 간파되지 않는 것 말이죠. 예전에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어요. 왜 미군이 베트남전에서 패배했을까. 베트남 사람들이 너무 은밀했다는 겁니다. 저 꼬마아이가 베트콩에 미군들 위치를 알려주러 가는지 그냥 어린애인지 알 수가 없었다는 거예요. 실제로 아이들 중에 그런 아이들이 있었거든요. 구부정하게 걸어가는 노인네가 스파이인지 아닌지 모르잖아요. 그런 경우에 권력은 굉장한 불안을 느끼는데 가장 두려워한 건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죠. 여기서는 하나의 정책밖에 없어요. 몰살. 그래서 미군들은 인민을 다 몰살해 버렸다는거예요. 모르겠으면 죽여 버리면 확실하니까. 그런데 그것이 결국 미군이 승리할 수 없었던 이유에요. 은밀하게된 대중을 이겨낼 수 없다는 거지요. 힘이 없는 사람이 자기를 말해야할 때 전 얼굴을 가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해요. 칸트의 예를 들면, 친구가 집에 숨었을 때 경찰이 친구가 집에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진실을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말하지 않을 권리가 있는가하는 겁니다. 민주주의는 말하지 않을 권리, 거짓말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감출 권리,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 내가 내 신체 부위를 가릴 권리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민주주의 아닌가요. 대중들은 더 은밀해져야하고 삶의 다른 여지들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은밀하다는 게 꼭 반체제적이라는 게 아니라 국가권력이나 자본에 투명하게 노출되지 않는것이거든요.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봐요.


오히려 법은 익명성을 금지하는 방향으로 제정되고 있잖아요.

최근에 한국 민주주의가 법치주의로 흡수되는 느낌이 있어요. 법 안 지키는 사람들은 민주주의 사회에 살 자격이 없다는 거지요. 마치 민주주의가 법치주의인 양. 그래서 지금 민주주의가 법과 제도의 형식인지 아니면 삶의 양식인지 다시 한 번 물어보고 싶은 거예요. 어떤 문제가 법으로 제정되지 않았으면 막 싸울 수 있는데, 일단 국회에서 통과가 되면 백분토론 같은 데서도 법은 지켜야 되지 않느냐고 말하잖아요. 그럼 할 말이 없어요. 저는 우리가 이 두 가지 차원을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법대로 사는 것과 사는 법을 배우는 것. 이 둘은 완전히 다르거든요. 법대로 사는 것은 다만 초월적인 명령, 규칙들을 따르는 것에 다름 아니지만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차원이 달라요. 삶을 구축하는 면에 있어서 조금 배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법대로 살기 이전에 사는 법이라는 차원에 대한 환기가 필요하고요. 가령 교사라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학생들과 다른 방식의 소통을 할 필요가 있고, 주민이라면 등산모임을 만들거나 다른 지역주민들하고 다른 뭔가를 함께 할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이게 퍼져나가면 이 정도로 우리가 불안해하지는 않을 거란 말이에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차원이에요. 만약에 탈주에 관한 긍정적 가능성을 말할 수 있다면 살아가는 법이나 우리식의 질서를 만들어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거예요. 이 얘기를 책에 쓰면 좀 허망해질까봐 문제를 제기하는 선에서 끝냈지만 속마음은 진짜 탈주라고 하는 것이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 게 아니라 자기 삶으로 돌아가는 거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거든요. 자기가 좋은 삶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 국가에 살기 좋게 해달라고 빌잖아요?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탈주'를 시작해야하나요?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작은 실험국가로 존재해야 돼요. 니체가 철학한다는 거에 재밌는 정의를 내린 적이 있어요. 얼음밖에 없는 산에 혼자 살고 있는데 배가 너무 고픈 거예요. 그런데 저기 생전 처음 보는 동물이 쪼르르 기어가요. 그러면 어떡해야 할까요? 당장 잡아야죠. 징그럽다고 쳐다만 볼 수는 없잖아요. 만약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버섯이 있다면 그냥 지나가야할까요 먹어야할까요. 물론 그걸 한 번에 다 먹으면 죽을 거예요. 정말 모 아니면 도죠. 그럴 때 어떻게 하냐면 쪼금 떼어가지고 먹어보는거예요. 배가 아파서 미칠 것 같으면 그만둬야겠지만 바로 포기해야할까요? 아니요. 바로 포기하긴 너무 일러요. 한번 삶아 봐야죠. 그리고 또 조금 먹어야 돼요. 무슨 말이냐하면 탈주하는 것은 없는 것에서 부터가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에서부터 점진적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거예요.

아직도 국가는 중요해요. 국가가 담당하는 부분이 있고 시장이 작동하는 부분도 있어요. 그런데 그게 타도한다고 없어질까요? 필요가 존재하는데요? 저는 국가가 거추장스러워지면 그때 파괴될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당장 국가가 없어지는 건 불가능 하거든요. 탈주도 마찬가지인데, 탈주라고 하는 게 떠나게 되는 걸 전제하거든요. 하지만 그냥 신경질적으로 뛰쳐나가면 탈주가 아니라 자살이고 도피에요. 탈주는 도망칠 때조차도 뒤쪽에서 쫓아오는 적들과 싸우고 있어야 해요. 그리고 나아가면서 길을 개척해야 하고요. 그래서 탈주를 한다는 것, 다른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지금과는 다른 삶에 대해 뭔가를 실험하는 것이지 밑도 끝도 없는 신념에 기반하는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른 삶, 다른 민주주의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서 그게 뭘까 실험해봐야 한다는 거예요. 지금-여기서 조금이라도 그런 삶을 시도하는 게 굉장히 중요한 실험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여러 이유 때문에 탈주를 할 수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되는지 묻거든요. 저는 그 말 때문에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해요.

“배후에 절망감을 둔 단호함도, 배후에 소심함을 둔 소박함도, 좋은 선택지가 아니다. 승패를 확정하려는 열망은, 우리가 지금‘과정’중에 있으며, 앞으로도‘과정 중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태도, 더 정확히 말하자면‘과정을 빨리 끝내고 싶은 ’피로감의 산물이다.”


촛불에 대한 국면적 분석이 새로웠습니다. 특히 사제의 개입에 대한 지적은 굉장히 날카롭던데요.사제의 개입은 촛불의 의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어요. 마지막에 가서 사제들에게 호소했다는 것 그리고 사제들이 그 임무를 자처했다는 것, 그 과정에서 구호들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가 돌연 승리가 선언됐다는 것. 그건저한테는 좀 심하게 말하면 낡은 것이 돌아왔고 우리에게 너무 익숙했던 것 우리가 넘어서려고 했던 것들이 다시 돌아와 버렸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요. 그 자리에서 필요했던 건 우리를 대신해서 말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다시 말해, 우리를 보호해 줄 방패가 아니라 그 국면을 돌파해줄 창이 필요했던 거라고 생각해요. 이런 경험을 했거든요. 촛불 집회 중에 한 대여섯 명쯤의 학생들이 전경들쪽으로 돌멩인가 뭔가를 던졌나 그랬어요. 뭘 던지니까 전경들이 그 대학생들 주변을 완전히 둘러싸버린 거예요.굉장히 위험한 순간이었는데, 그때 교수들 몇 명이 전경들을 뚫었어요. 교수들이 학생들 몇 명 데리고 전경들 사이를 뚫었던 거예요. 전경들도 막 당황하더라고요. 자기의 제자들이라고 말하면서 애들을 내보내는 거예요.

저는 그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아 누가 뚤어줄 수 있는구나.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이 누구를 대편해주는게 아니라 아니라 뚫어줄 수도 있구나. 사제의 개입 지점도 어쩌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위험한 상황으로부터 지켜주고 대신 말해줌으로써 상황을 종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막힌 국면을 돌파함으로써 상황을 새롭게 전개할 수는 없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비폭력 직접행동, 직접적인 폭력을쓴다는 게 아니라 폭력에 굴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개입 할 수 있는 구체적 지점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해요.


연구자 대중이란 무엇을 의미하나요?

연구자가 대중이랑 다를 게 없다는 거예요. 농민 대중,노동자 대중처럼 연구자 대중이 있다는 거지요. 연구자가 뭘 가르치나요? 우린 서로가 서로를 배우게 한다고 생각해요. 가령 농민의 어떤 삶이 노동자에게 생태적 배움을 줄 수도 있어요. 노동자의 생산 활동이 예술가에게 영감을 줄 수도 있고요. 예술가가 만든 어떤 영화나 작품이 연구자에게 어떤 영향을 주기도해요. 가르친다는 말을 너무싫어해요. 계몽 개념에서 나온 거잖아요. 누구의 삶을 대신 살아보고 가르쳐줄 수가 없어요. 다만 우리의 어떤 활동이 다른 사람들을 배우게, 깨닫게 할 뿐이지요. 그래서 위대한 교사란 배우게 하는 자라고 생각해요. 가르치는자가 아니라 새로이 배우게 하는 자가 아닐까요?


이 책에는, 비록 내 짧은 지식과 둔감한 신체 탓에 제한되기는 했지만, 앎의 장소, 앎의 신체가 있다. 문장들 속에서 나는‘거기’와‘그들’을 떠올릴 수 있다. 문장들 속에서 나는‘여기’와‘우리’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인터뷰 및 정리 박승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