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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109호] '말하는 입과 먹는 입' 저자 김항을 만나다

‘종언의 시대’의 종언과 새로운 사유의 모색

 

"이 책에서 시도하는 것은 이들의 사유를 통해 자연 상태를 먼 과거나 밀림의 오지로 내쫒아 현재의 법-권리-국가를 투명하고 완결한 것으로 상상하려한 근대의 인간학을 뒤집어보는 일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이 뒤집기에는 국적이 있을 수 없다. 여기에 선보이는 글들이 씨름하고 있는 사건이나 텍스트는 물론 특정한 '국가'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거기서 추출된 것은 '인간'을 둘러싼 '정치적인 것'의 구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국민'인 한에서 '인간'일 수 있다고 전제하고 있는 근대적으로 분식된 정치사상은 여기에 들어설 자리가 없는 셈이다."


우선 선생님께서 책을 쓰시게 된 동기를 듣고 싶습니다.

일본 유학 중에 독특한 경험을 했어요. 독일이나 프랑스에 유학을 가면 그곳 말을 통해서 그곳의 철학을 하잖아요. 반면 아시다시피 일본에서의 공부는,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이론이 수입 되서 한 번 번역과정을 거친 것들에 대한 공부들이죠. 말은 일본말로 하는데 텍스트는 외국어인. 근데 저는 한국 사람이잖아요. 이런 식의 경험을 하게 된 거죠. 그때 생긴 문제의식이 비서구지역에서 서양이론을 공부하는 이 기이한 현상은 뭘까, 이것의 역사적 계보 같은 것은 뭘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서구화의 문제라고 얘기할 수 있을 텐데, 인문학 분야의 서구화 혹은 서구 이론의 수용, 다른 언어체계들 사이의 만남, 이런 것들을 경험했던 거죠.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나 벤야민 같은 사람들을 읽고 이것을 현재의 현실에 적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구나. 어디까지나 동시대적으로 호흡하고 번역해야 하는 문제이지, 이론이 있고 그 이론에 따라서 현실을 재단하는 방식은 아니겠구나. 말하자면 그 전과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된 거죠.

말씀하신 다른 생각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2,30년대 일본에서 독일사상이 읽혔던 맥락을 보면, 일본은 당시 근대초극이라는 키워드가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였어요. 근대초극은 쉽게 말해서 서구적인 보편주의를 넘어서는 세계질서를 구축 혹은 구상할 수 있느냐의 문제인데, 어떻게 보면 앵글로색슨적인 보편주의에 대한 안티테제로 등장하고 있던 나치즘, 소비에트 등 변형하는 형태의 새로운 지역질서에 대한 구상이었던 거죠. 그렇게 봤을 때 과연 이들이 독일 철학을 단순히 수용했던 것일까. 애매하다는 거예요. 제 생각엔 마루야마 마사오가 칼 슈미트를 읽으면서, 예를 들어 우리가 지금 촘스키를 읽는 것과 똑같은 감각으로 읽었을 거 같아요. 우리가 촘스키를 읽을 때 서양이론이라고 읽진 않잖아요. 촘스키의 미국 비판이나 911에 대한 글은 한 지성이 세계의 정세를 바라보는 글에 가깝거든요. 마루야마 마사오가 칼 슈미트의 책을 그런 식으로 읽었다는 거죠. 마루야마 마사오가 갖고 있던 감각은 굉장히 동시대적이었던 거예요. 마루야마 마사오의 칼 슈미트 뿐만 아니라 미키 기요시의 하이데거, 쿄토 학파의 헤겔철학도 말하자면 서양 이론과 대결하고 이 철학을 넘어서는 뭔가를 구축하기 위한 대상으로 읽어낸 결과들이라는 거죠. 하고 싶은 말은 일본이 대단하다는 게 아니라 사상사라는 것, 특히 동아시아에서의 서양이론 수용을 다른 식으로 볼 수 있는 역사적 단초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서문에서도 썼듯이 이론의 수입, 수용 등 이런 말들을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유에 국적이 없다는 건 우리의 존재 자체,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가 질서 지워지고 분란이 일어나고 해소되는 이 전체의 상황을 정치라고 부른다면, 이를 사유하는 데에는 국적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거죠. 물론 역사적 맥락을 다 부정하자는 의미는 아니고요.


이 책에서 어떤 정치적인 구체성은 언급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1992년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 즉 냉전 종식 이후에 미국적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궁극적으로 승리했고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역사철학적 비전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했죠.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가정하고 있는 보편적 인류라는 개념 이상으로 인간이 더 행복해 질 수 있는, 인간이 자신을 더 실현할 수 있는 역사적인 비전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얘기한 거예요. 그런데 이 얘기나 나왔을 때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좌파들은 통속적인 이데올로그라고 야유를 했어요. 근데 저는 이 얘기를 좌파들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 정말 그렇거든요. 좌파가 보편적 인류라는 개념에 기반한 자유, 평등을 넘어서는 인간 실현의 이념, 목적, 의미라는 것을 보여준 적이 있냐는 거예요. 예를 들어, 911 테러가 발생했을 때, 하버마스하고 데리다가 프랑크푸르트 신문에 기고를 합니다. 유럽적 보편주의에 기초해서 대테러전쟁에 대한 비판을 하거든요. 거기서 드러나는 것은 하버마스와 데리다가 손을 잡았다거나 결국은 둘 다 유럽 중심적이라기보다는 좌파들도 결국에는 보편적 인류의 행복이라는 것에 기대서 미국을 비판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미국도 세계 평화와 보편적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대테러전쟁을 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전쟁을 하는 쪽이나 전쟁을 비판하는 쪽이나 모두 보편적 인류라는 것에 기대지 않으면 비판이 불가능하다는 거죠. 그러니까 후쿠야마가 얘기했던 것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강력한 이야기였던 거예요. 후쿠야마는 미국이 승리한 후 역사적 투쟁이 끝날 거라고 얘기했던 게 아니에요. 다만 지금까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 뒤에 존재하는 다른 목적(goal)이라고 생각되어왔는데, 후쿠야마는 이제 자유민주주의 이상의 목적이 없다고 선언을 한 거지요. 마라톤으로 비유하면 선두주자가 들어오고, 4-50명이 더 들어오잖아요. 역사를 방송 중계로 비유한다면 방송은 1등이 들어오는 순간 끝나지만 2등부터 50등 까지는 방송 후에도 계속 들어오는 거예요. 92년 소련의 붕괴 이후에도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지에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최종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4-50등들의 경주가 계속된다는 거예요.

사회중의 붕괴 이후의 좌파 이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91년도 이후의 이론이 스탈린주의만큼의 실제적 정치 조직체를 구성하는 역할을 못했다고 생각해요. 즉 자본주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근원적 모순을 지적하고 그것을 전복하는 하나의 원리를 정립하려 할 때, 91년도 이후에 등장한 이론들은 아무런 힘을 못 가졌다는 거예요. 스탈린주의는 하나의 세계가 어떻게 구성될 것이고 이 구성 위에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지침들을 줬다면, 그 이후의 이론들은 명확하지가 않고 굉장히 어려워졌어요. 역사를 다시 구성해야 하고, 인간에 대한 이해, 국가에 대한 이해를 다시 해야 되기 때문이에요. 푸코를 보면서 권력에 대한 개념들을 바꾸고, 데리다를 통해서 서구의 보편주의를 다시 생각해 보고, 라깡을 통해서 인간 주체라는 것을 근본적으로 의심하는. 흔히 우리나라에서 새로운 정치철학이라고 얘기되는 사람들의 논의가 왜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와 닿는가. 왜냐하면 여전히 스탈린주의를 읽었던 감성으로 읽기 때문이에요. 뭔가 지침을 주지 않을까. 흔히 말하잖아요. 대안이 뭐냐. 대안이 있을 리가 없죠. 대안이라는 게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체제와는 다른 방식의 삶을 보여줄 수 있느냐는 것인데, 없는 거죠. 이 이론들이 그런 얘기들을 안 한다는 거예요.

민주주의가 법치주의로 흡수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치를 회복하기 위해 법의 공정성을 완성해야 되는 건가요?

용산참사를 예로 들면, 검찰은 경찰의 공권력이 정당하고 합법적으로 집행되었기 때문에 농성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행위는 형사처벌의 대상이 아니고, 진압과정에서 기동대원이 죽은 것은 공권력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자 공공질서를 어지럽힌 행위기 때문에 형사처벌의 대상이 된다고 하잖아요. 근데 이 사건에 대해서 분노하거나 허탈해 할 수밖에 없는 게, 실제로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러면 현실적으로 이에 대해서 어떻게 항의를 하고 어떤 식으로 시정을 요구할 것인가라고 할 때, 몇 가지 방법이 있어요. 첫 번째는 법 집행의 정의가 없었다는 걸 밝히는 거예요. 법이 담보해 내야할 정의가 완전히 상실됐다는 것이죠. 두 번째는 검찰이 수사과정에서 자료들을 선별적으로 취하거나 은폐했음을 폭로하는 것이죠. 따라서 이에 대한 대응은 법집행의 공정성과 정의를 회복해라는 식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정부는 뭐라고 합니까. 이 모든 것들이 합법적 절차와 적법성을 가지고 집행되었다고 하잖아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사항들을 전부 사법부에서 처리해야 될 문제라고 말한다는 거죠. 그렇다면 이제는 거리에서 아무리 시위를 해도 아무런 정치적 힘을 못 갖는 거예요.

법을 넘어서는 정의를 구축해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합법의 이름으로 모든 권력들이 행사되는 한 그것이 아무리 정의롭지 않게 보일지라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요. 그런데 이것이 80년대와 다른 이유는, 당시에는 법 자체가 부당하다는 전제가 있었다는 거죠. 즉 80년대에는 법을 넘어서는 정의가 있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87년 이후의 민주화체제는 법치의 정당성, 즉 대한민국의 실정적인 통치체제가 합법성과 정당성을 합치해서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더 골 때리고 답답한 거죠. 시쳇말로 얘기하면 MB를 우리 손으로 뽑았으니 할 말이 없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거예요. 그랬을 때, 우리가 물어야 하는 건 공권력의 과도한 행사에 대해서 정의 혹은 보편적인 가치설정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 그 정의는 무엇을 담보해야 하느냐라는 거죠. 지금의 체제를 전(全)부정할 수 있는 정의의 이름이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고요. 지금 그럴 수 있는 정의의 이념이 등장할 수 있느냐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현대정치철학자들의 논의가 갖는 함의는 무엇인가요?

여기서 현대정치철학자라고 하는 랑시에르나 아감벤 등은 자유 평등이라는 이념 자체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지 않느냐, 즉 역사적 목적이라고 했던 것들, 정의에 기초에 세워졌다는 이념들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물음을 던집니다. 정의를 추구하는 게 과연 좌파들이 할 일인가라고 묻는 거죠. 다시 말해, 지금의 체제를 넘어설 수 있는 하나의 다른 실정적인 체제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지금 우리가 비전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냐 하는 물음인 거죠. 무슨 말이냐 하면, 용사참사의 경우 국가권력이 행사되어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는데, 이는 법이 정의를 담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집행 상의 오류가 아닙니다. 아감벰이나 랑시에르가 보기에, 법의 행사라는 것은 원래 저런 거라는 겁니다. 혹은 저런 행사의 양식이야말로 법 행사의 최소단위라고 얘기를 하는 거죠. 가장 원형이라고 얘기하는 것이고요. 정당성 없이, 목적성 없이 행사되는 것이야말로 법의 가장 원초적 형태라는 거죠. 벤야민이 폭력비판론에서 얘기했던 신화적 폭력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입니다. 국가, 주권, 인민, 권리 등 은 근대 정치의 전개과정에서 항상 획득되어야 할 것 성취되어야 할 것으로 파악되어 왔는데, 그것이 성취되었다고 선언된 순간 과연 이 언어들이 어떤 내실을 가질 수 있냐는 물음을 던지는 겁니다. 아감벤은 이를 환상과 변명이라고 불러요. 말하자면 근대적 정치 이념을 통해서 구축되어온 실정적인 정치체제가 계속 이 운동의 방향대로 나갈 것이냐, 후쿠야마는 더 나아갈 곳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고,  아감벤은 이 체제를 인정하고 이 안에서 무엇을 할 것이냐가 아니라, 과연 후쿠야마와 소비에트체제 를 포함해서 과연 근대적인 정치체제가 자유와 평등과 인권이라는 이념이 실행되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왔느냐하는 물음을 던지는 겁니다. 아감벤은 법과 폭력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는 거예요.

법과 폭력, 그리고 정치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말씀이신데요.

용산참사 얘기로 돌아가서, 과연 그렇다면 이런 정치 이론들이 현실 속 사건들과 직면했을 때 어떤 이야기들을 던져줄까. 저는 오히려 단순한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용사참사를 이해하기 위한 또 하나의 사례로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 있는데요. 우리나라 헌법에서 대통령 탄핵이 의회에서 발의되면 헌재로 가게 되죠. 이게 심각한 문제라는 겁니다. 국회의원이든 대통령이든 선출된 권력이잖아요. 그런데 선출된 권력을 비선출된 권력이 궁극적인 최종 심급으로서 결정한다. 이 말은 재판관의 개인적인 판단에 맡기겠다는 겁니다. 근데 아시다시피 재판관이 사람인 이상, 범박한 이야기이지만, 어떻게 맡기겠습니까. 신영철 같은 사람도 있는데. 그런데 어느 정파를 막론하고 헌재가 올바른 결정을 내려주기를 기대했다는 건데, 이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국민들이 선출한 최고의 권력을 사법부가 판단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법에 의해서 판단하는 것이 정치의 공간을 말살하고 있다는 겁니다. 헌재에 판단을 위임하는 형태가 반복된다면 굉장히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거예요. 따라서 그것이 거리의 정치이든 의회의 정치이든, 쉽게 말해 정치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죠. 그래서 아감벤이나 랑시에르 등이 얘기하는 것은, 법치라는 것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 하나의 커다란 메시지라고 저는 파악하고 있습니다. 즉, 법이라는 것이 항상 잠재적인 규칙의 체계이지 사람들의 삶을 질서지우는 지고의 힘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법에 우선하는 정치는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가요?

어떻게 설정하느냐의 문제겠죠. 정당 정치와 거리의 정치 중 어떤 게 더 필요하냐. 의회가 힘이 없어서 거리로 나오든 의회와 거리가 연합하든 어떤 정치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법이 전권을 휘두르는 것은 시정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법이 정치적으로 인권, 평등, 자유 같은 것들을 성취해나가는 수단이었다면, 지금의 법은 자유와 평등과 인권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거꾸로 통치해나간다는 거죠. 자유, 인권, 국가 등의 근대적인 정치이념이라는 것이 과연 그렇게 정의로운 것인가, 이 말은  그것과 정의가 불변하는 형태로 결합되어 있을 수 있냐는 것을 묻자는 것이죠. 이러한 물음의 메시지는 현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비추어 보았을 때 명확합니다. 결국 법치라는 것을 얼마나 상대화 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공권력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이 법이 정당하게 집행되지 않았다 혹은 이 법이 정의를 담보하지 못했다는 논리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법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보다 철저하고 더 근본적인 정치적 원리를 확립해야 한다는 겁니다. 법에 대한 정치의 우위가 중요하다는 거죠. 이건 국가에 대한 사람의 우위라고 말해도 되고요. 행정력에 대한 의회의 우위라고도 볼 수도 있고요. 좌파이론이 지금의 법이 기초해 있는 이념이 아닌 다른 이념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법이 기초해 있는 이념과 표리부동하게 결합해서 그 어떤 실질적인 정치의 공간도 만들어 주지 않는, 오히려 정치의 공간을 옭죄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타파할 것인가가 지금의 문제라는 것이죠. 이것을 위해서 거리가 필요하냐 의회가 필요하냐는 전술이나 전략의 문제인 것 같고요. 촛불의 가능성이라는 것은 그런 거에 있었던 거죠. 굉장히 원리적인 문제였던 것이고요. 법은 언제든지 거부할 수 있고, 그런 이념조차도 거부할 수 있다는 거죠. 다르게 얘기하면 법이나 이념들은 잠정적인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네요. 이것이 아마 지금 새로운 정치철학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정치는 법이 당연시 하고 있는 전제들의 영역까지 확장되어야 한다는 건가요?

확장되어야 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거기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거죠. 아감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인간이 인간이 되는 것이 정치의 가장 최소단위이다. 동물이 어떻게 인간이 되느냐, 이 과정이 뭐냐는 거예요. 인간은 동물이기도 한 거잖아요. 그러면서도 동시에 동물이 아닌 것이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동물에서 인간으로 이행하는 혹은 동물의 상태와 인간의 상태가 중첩되어 있는 이 상태가 어떻게 인간이라는 형태로 삶을 구성하게 되느냐고 물었을 때 지금까지는 계속 인간이라고만 얘기해 왔다는 거죠. 인간이기 때문에 동물적인 행태를 해서는 안 된다고만 얘기해 왔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아감벤이 볼 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동물에서 끊임없이 인간으로 되는 과정이라는 거고, 바로 이게 정치라고 말합니다. 이를 제 책에서는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이라고 얘기 했던 거고요. 아렌트 같은 경우에는 이를 오이코스하고 폴리스라고 얘기할 테고, 홉스 같은 경우엔 자연상태와 국가라고 얘기하겠죠. 아까 식으로 얘기하자면 법과 정치의 공간이 되겠죠. 결국 한 짝의 대당들이 딱 결정되어 있는 이 상태를 벗어나야 된다는 겁니다. 인간은 동물임과 동시에 인간이다. 즉 잠정적이라는 거예요. 이 잠재성, 포텐셜이 없으면 아무런 가능태가 안 생긴다는 거예요. 이미 인간인데 더 할게 뭐 있어. 후쿠야마를 비판적으로 독해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죠. 넌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인데 더 추구해야할 게 뭐 있니.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민주주의를 창안해야 되는 건가요?

중요한 것은 이것이 법을 어떻게 변화시키느냐 입니다. 아까 새로운 정치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전혀 새롭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아감벤은 그런 의미에서 사회주의나 구좌파들이 얘기했던 것들을 환상과 변명이라고 부르고요. 오히려 가장 원리적인 정치적 행위, 형태는 사회주의나 아니면 여러가지 이념들이 환상과 변명이 되어서 분식해오고 망각해왔던 것들이에요. 따라서 근원적인 정치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감벤의 논의에요. 


“더도 말고 딱 한 가지 일을 해보고 싶었다. 이 이름들이 어떤 전망을 보여주고 어떤 실천적 지침을 마련해주는지가 아니라, 누구나가 뛰어들어 본 전망이나 실천적 지침의 일면성과 한계 영역을 어떻게 지적해주는지를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이다. 즉 ‘~주의’, ‘탈주’, ‘다중’ 등의 의장(의장)들을 걷어내고, 정치적인 것에 대한 사고가 마주해야 할 최소단위를 추출해보고자 했던 셈이다.”


인터뷰 및 정리 박승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