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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109호] 벼랑 끝에서의 추락 - 비정규 교수, 벼랑 끝 32년




전국의 대학들이 공사 중이다. 낡은 건물이 리모델링되고 새 건물이 올라선다. 하지만 새롭게 늘어나는 공간들이 온전히 학문적 목적으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편의시설 유치라는 이름으로 수익시설들이 하나 둘 대학 내에 자리 잡고 있다. 대학의 물리적 확장이 학문의 확장이 아니라 자본의 확장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체계 속에서 대학의 기업화는 가속화 되고 있다.

요란한 공사 터의 가장자리에 소위 시간강사, 즉 비정규 교수들이 비껴 서있다. 비정규 교수란 ‘시간강사를 비롯해 외래, 겸임, 객원, 대우, 강의 전담, 연구 교수 등 정년 보장을 받지 못하고 한 학기 혹은 일정 기간 동안 임용되어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는 소위 임시직 강사’를 말한다. 임시 고용직이기에 이들을 위한 대학 내 공간은 빈약하다. 한 국감자료에 따르면 ‘국공립대학 시간강사의 공동 연구실은 평균 116명당 1개, 사립대학의 공동 연구실은 평균 136명당 1개’라고 한다. 덧붙여 보통 서너 개의 대학을 오고가며 강의를 하기에 이들이 주로 머무는 장소는 대학의 강의실이 아니라 이동 중의 지하철, 고속버스, 혹은 열차이다. ‘보따리장수’라는 자조적인 표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들은 대학 공간의 주변에서, ‘길’ 위에서 서성이고 있다.

대학의 주변인, 비정규 교수

비정규 교수들의 물리적인 주변성은 그 법적 지위에서 비롯한다. 고등교육법 제14조 제2항은 “학교에 두는 교원은 제1항의 규정에 의한 총장 및 학장 외의 교수, 부교수, 조교수 및 전임강사로 구분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조항에 따라 시간강사들은 애초부터 교원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대학의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지만 교원은 아닌 존재. 이처럼 비정규 교수들은 법적으로도 주변화 되어 있다. 물론 1977년까지 이들도 교원 지위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유신 체제에 비판적인 젊은 지식인들을 제도권에서 몰아내거나 순응시키기 위해 박정희 유신정권이 교육법을 개정한 이후부터 이들은 교원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박탈당했다.

교원과 비(非)교원의 차이는 상당하다. 이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된다. 전임교원은 개인 연구실과 정년 보장 등의 혜택을 누린다. 하지만 앞서 서술한 바대로 비정규직 교수들은 대학 내에 개인 연구 공간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서관과 연구 기자재의 이용에도 제한을 받는다. 또한 보통 한 학기마다 구두로 채용이 이루어지는 관행 상 다음 학기에도 강의를 맡게 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어 고용 불안정성이 매우 크다. 기본적인 4대 보험 혜택은 먼 나라 얘기다. 덧붙여 비정규직 보호법의 보호도 받지 못한다. 2년이 지나면 정규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기간제법 제4조 제1항에 “박사 학위(외국에서 수여받은 박사 학위를 포함한다)를 소지하고 해당 분야에 종사하는 경우”가 예외조항으로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현실적인 차이는 경제적인 면에서 드러난다. 비정규직 교수들의 경우 따로 프로젝트에 참여해 학술진흥재단 등에서 연구비를 지원받거나 여타 활동을 하지 않는 한 생계는 오직 강의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서울과 수도권의 시간강사 평균 연봉(평균 4.2시간 강의×30주×3만 7,000원)은 ‘487만 5,000원’이며 전체 시간강사 연봉 추정액(주당 9시간 강의×30주×3만 7,000원)은 ‘999만 원’이다. 이는 전임강사의 평균 연봉 ‘4,123만 8,000원’에 한참 못 미치는 액수일뿐더러, 2008년 4인 가구의 연평균 최저 생계비인 ‘1,519만 176원’에도 못 미치는 액수이다. 물론 이 또한 강의가 보장됐을 때의 얘기이고 여러 대학을 오고가며 사용하는 교통비 등 여타 지출비등 까지 고려한다면 실수입은 훨씬 줄어든다. 비정규직 교수들의 주변적인(marginal) 법적 지위는 이들의 삶을 한계적(marginal)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


권리 없는 의무, 대가 없는 노동

왜 비정규 교수들의 교원 지위는 인정되지 않는 것인가. 전임교원들에 비해 하는 일이 없어서? 비정규 교수들은 전체 대학 수업의 절반 이상을, 전임교원들이 꺼리는 교양수업들 같은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을 도맡아 한다. 수업 준비에서부터 강의, 그리고 학생에 대한 평가까지 수업과 관련하여 전임과 비전임 사이의 업무량의 차이는 없다. 대학이 전임교원들에게 요구하는 연구 성과 또한 비정규 교수들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되고, 외려 전임교원이 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연구 성과를 쌓아야 하는 처지를 고려한다면, 연구 의무를 기준으로 전임과 비전임을 나누는 것도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질적 차이가 있는 것인가. 실제로 ‘모대학교 교무처장’처럼 시간강사들을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이라 평가절하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는 뿌리 깊은 편견과 계급의식의 소산이다. 연구력을 비교해 봐도 그렇고, 강의 평가에 관한 통계를 봐도 ‘교양 강의의 경우 시간강사가 좀 더 높게, 나머지 전공과 교직 강의에선 좀 낮게 평가’되고 있으며, ‘평균 하면 전임과 시간 강사에 대한 수업 평가는 비슷한 것’으로 드러나 전임과 비전임 사이의 차이는 크지 않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대학 내 의사결정 과정에 비정규직 교수들이 참여하지 못한다는, 외려 차별적 차이이다.

이러한 불균형에 일정부분 동의하면서도 국가와 대학은 재정 상태를 이유로 비정규 교수들에게 교원과 전임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에 난색을 표한다. 하지만 갈수록 높아지는 등록금과 늘어나는 수익성 건물 앞에서 돈이 없다는 말은 변명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대학 전체 예산에서 시간강사들의 강의료가 차지하는 비율은 ‘2퍼센트’ 정도에 불과하다. 또한 2009년 주요 사립대학이 쌓아 놓은 적립금만 해도 약 ‘6조원’ 이라고 하는데 이는 시간강사의 연봉을 1,000 만원에서 3,000 만원으로 현실화할 때 20만 명의 신규 인원을 채용할 수 있는 액수이다. 현재 시간 강사는 ‘7만 명’ 정도이다. 이처럼 대학은 전임교원과 동일한 양질의 노동력으로 대학 강의의 절반이상을 충당하면서도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며 합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 있다. 비용효율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매우 훌륭한 경영 수완이라 할 수 있다.


침묵, 대학 내 정치적인 것의 말소

비정규직 교수 7 인의 죽음은 이러한 구조적 모순과 무관하지 않다. 신자유주의의 고용 유연성 기조는 대학의 상업화와 맞물려 비정규 교수의 처우 개선을 가로막는다. 다른 비정규직들과 마찬가지로 비정규 교수들은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려 한계 상황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언제든 대체 가능한 ‘잉여인간’으로 취급받고 있다. 故 한경선 박사가 남긴 유서의 내용처럼, 대학의 부조리와 모순은 ‘열심히 연구와 강의를 하리라는 초기의 순수한 열정’을 ‘이 사회에 대한 환멸’로 바꿔버린다.

하지만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대학 사회의 ‘침묵’이다. 전임교원은 말할 것도 없고 비정규 교수들조차 이 사안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이는 한국의 대학 사회가 여전히 수직적 계급 사회임을 드러낸다. 학문적 성과와는 별개로 ‘대인 관계 부족’이라는 전임교수의 주관적 평가와, 지연과 학연과 파벌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대학 사회 안에서 비정규 교수들은 감히 ‘찍힐까’ 두려워 나서지 못한다. 임용과 관련해 알게 모르게 거래된다는 ‘뒷돈’은 그래서 구조적 산물인 것이다. 전임교수들은 비정규 교수가 생산한 잉여를 누리며 편히 사회의 민주화를 외치지만, 정작 대학 내의 민주화에는 무관심하다. 비정규 교수들 또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쉽게 자신을 합리화 하거나 체계의 논리를 내면화 한다.

이러한 침묵 상태, 주변적인 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언어를 박탈당한 상태에서 다양한 목소리들은 사라지고 오직 하나의 목소리만 단일한 공간을 울린다. 그 과정에서 모든 가능성들은 실현될 기회를 상실하고 정치적인 모든 것은 말소된다. 비정규 교수들의 한계 상황이, 그리고 이 구조적 모순을 자양분으로 삼아 신자유주의 체계를 내면화하는 대학 사회의 모습이 이를 예증한다. 과연 벼랑 끝에서 추락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대학 사회 내부의 자성의 목소리, 그 정치적 실천이 절실하다.

글 곽성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