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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109호]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박승일 기자

죽음을 말하는 건 항시 조심스럽다. 죽은 이에 대한 예의 때문이 아니라 남은 자에게 지속되는 기억의 고통 때문이다. 그 치유할 수 없는 상흔은 ‘무의지적 기억’ 속에 고이 잠들어 있다가 불현 듯 기억 속으로 소환되어 ‘네’가 죽었음을 지금-여기에서 확인 시킨다. 그 앞에서 남은 자는 말없이 흐느낄 수밖에 없다. 죽음이 슬픈 건, 그 죽음이 바로 ‘너’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너’의 죽음이기에, 정지용 시인의 <유리창> 마냥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림”을 주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의 존재를 공백으로 만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심연 속 허무이다.

헌데 모든 죽음이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죽음은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기억되는 반면, 어떤 죽음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들’의 죽음이 되어 곧 잊히고 만다. 죽음의 의미가 다른 까닭이기도 하겠지만 정확히는 죽은 이에 대한 기억의 공간이 적기 때문이다. 먼 나라 사람들의 죽음이 내게 큰 슬픔이 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죽음이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과 공유하는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3인칭 죽음, 곧 ‘나’와 ‘너’의 죽음이 아닌 ‘그들’의 죽음이다. 문제는 ‘너’의 죽음이 ‘그들’의 죽음이 되는 경우이다.

도처에 죽음이 있다. 용산 참사의 희생자, 비정규직 노동자의 자살, 성소수자의 자살, 이주노동자의 죽음 등 상당 부분 우리와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어쩌면 우리 자신이기도 한 사람들의 죽음이 잇따르고 있다. 헌데 이들의 죽음은 애도될망정 기억되지는 않는다. 죽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이들의 마지막 선택이 허공으로 흩어져 망각되는 것은, 이들의 죽음을 잊는 한에서만 우리가 감당해야 할 슬픔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매번의 죽음을 슬퍼하기에는 우리네 삶이 너무 힘겹다. 하지만 ‘너’의 죽음이 ‘그들’의 죽음으로 3인칭화 되는 순간, 역설적이게도 삶에 대한 질문이 불가능해진다. 그것은 나와 기억을 공유한 ‘너’의 존재를, 내 삶에 침투해 있던 ‘너’의 얼굴을 지우는 한에서만 가능하기에, 그 죽음을 기억하지 않는 순간 나의 삶 또한 그 죽음마냥 쉽게 잊혀질 수 있는 것이다. 용산 참사 희생자의 죽음을 잊는 순간, 그들의 죽음을 ‘너’의 죽음이 아니라 ‘그들’의 죽음으로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순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나’의 삶 또한 기억될 수 없게 된다. 이는 故노무현 前대통령의 말처럼 삶과 죽음이 근원적으로 하나임을 말해준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 ‘그들’의 죽음마저 ‘너’의 죽음으로 현재화하는 것은 모든 죽음에 슬퍼하라는 선험적 윤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과 맞닿아 있는 ‘나’의 삶을 살아내기 위한 살아남은 자의 책무를 말함이다. ‘너’의 죽음이 ‘나’의 삶과 유리될 수 없음을 기억하는 것은 일 년에 한두 차례 지내는 제사나 차례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故장영희 선생님의 삶을 살아가는 것, 故노무현 前대통령의 삶을 살아 내는 것이며, 이로써 그들의 죽음을 우리 삶에서 분리해 내지 않고 영원히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은 자의 삶을 소환해내는 ‘기억의 정치학’이야말로 산자와 죽은 자가 마주할 수 있는 근원적 소통 방법인 까닭이다. 중요한 것은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죽음을 끊임없이 현재화함으로써 지금-여기에서 ‘나’의 삶과 만나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 ‘그들’의 죽음마저도 ‘너’의 죽음으로 마주하는 살아남은 자의 양심인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