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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109호] 아내폭력과 『똥파리』



최지나 (여상힉협동과정 석사과정)


양익준 감독의 영화 『똥파리』는 보다 구체적인 방식으로 ‘가족’을 보여준다. 영화 『똥파리』 속 인물들의 가족은, 가족 개개인들이 평생에 걸쳐 지게 될 짐짝이나 다름없는 공포와 상처의 기억이다. 이는 가족이 결코 자원이 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이며, 드러낼 수 없는 금기와도 같았던 ‘핵가족 이데올로기’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적나라한 재현에서도 젠더의 프레임을 적용하면 ‘아내 폭력’이라는 또 다른 문제가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영화 『똥파리』가 저예산 독립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흥행성적을 올리고 있는 것은 ‘가족만이 희망이다, 내 가족밖에 없다’는 식의 한국사회의 가족담론에 균열을 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가족이야기를 재현하는 방식이 극 중 가족문제(가정폭력 문제)의 핵심에 서 있는 매 맞는 여성이 아니라, 부모의 폭력과 고통을 보고 자라는 ‘아이의 시선’이라는 안전하고 천진난만한 말하기를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아내폭력문제에서 사람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직접적으로 매 맞는 아내들의 고통을 말하는 것 보다, 그 가정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범죄자로 성장할지 모른다는 사회적 우려와 불안감을 조성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다. 여성폭력문제에서 여성의 고통, 혹은 남성의 가해를 우선순위로 놓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젠더 권력구조와 결혼제도, 성규범과 가부장제 등으로 겪게 되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문제의 본질은 감추어지고, 여성들 혹은 ‘남성’과 다른 젠더들은 희생된다.

가부장적 시선의 내재화

영화 『똥파리』는 가정폭력과 가난이 빚어내는 폭력의 순환 고리를 그려내며 ‘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어’ 라고 울부짖는 상훈의 갑갑한 현실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 갑갑함의 더 깊은 바닥에는 아버지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고 여동생과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던 ‘리틀 가부장’이 가진 죄책감이 숨어있다. 이 점이 영화 『똥파리』가 재현하는 가족 문제가 여성의 입장에서 마냥 고개를 끄덕일 수 없게 만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상훈이 겪는 아버지에 대한 갈등은, 죽어간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누나나 연희와 같은 다른 생존자 여성의 삶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이다. 이 부분이 바로 감독의 시선을 넘어 아내폭력을 ‘가정폭력’으로 ‘순화시켜’ 바라보려는 사회의 시선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폭력을 일삼던 상훈의 아버지는 결국 아내와 딸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아버지가 교도소에 있는 동안, 상훈은 용역깡패가 되었다. 상훈은 복역 후 돌아온 아버지를 찾아가 그를 구타하는 ‘패륜’을 저지르기도 한다. 하지만 자살기도를 한 아버지를 발견하고는, 그를 살리기 위해 병원에 데려가고, ‘할 수만 있다면 모두 뽑아내고 싶었던 자신의 피(아버지의 피)’를 수혈하여 아버지를 살린다. 또한 상훈은 자신이 아버지를 때리는 모습을 남조카 형인이 목격한 상황에 맞닥뜨려 충격을 받는데, 이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을 지켜보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림과 동시에, 어그러진 부자관계를 그대로 조카(아들)에게 노출시켰다는 ‘걱정’이기도 하다.

상징화되는 여성들

영화 속 여성들은 상훈의 시선에 따라 죽은 어머니와 여동생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로 나타난다. 그를 한결같이 따뜻한 태도로 맞아주는 이복누나는 전형적인 ‘어머니’의 모습이자, 폭력 남편을 피해 아들과 함께 도망쳐온 아내폭력의 생존자이기도 하다. 상훈은 누나에게 자신의 친구인 흥신소 사장 만식을 소개시켜주려 한다. 만약, 상훈의 바람대로 누나와 만식이 결혼하였다면, 누나는 이전과 다른 ‘평안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 어쩌면 감독은 만식이 ‘고아’이기 때문에 가족 폭력의 순환고리에서 유일하게 비껴 서있는 인물로 그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만식은 타인을 폭행한 경험의 몸을 가진 사람이다. 극 전체에 나타나는 상훈의 폭력들과 만식의 사업(흥신소)이 관객에게 어느 정도 용인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깡패이기에 앞서 ‘남성’이기 때문이다. 폭력은 실천과 용인이 가능한 남성성이다. 결국, 남편을 피해 도망쳐와 상훈의 누나가 만날 수 있는 가장 괜찮은 남성이 만식과 같은 사람일 수밖에 없다면, 이야기는 다시 폭력적인 가정의 문제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거침없이 욕설을 내뱉던 고등학생 연희 역시, ‘그냥 맞고만 있을 것 같지 않은’,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맞는 모습을 보여주고만 있을 것 같지는 않은 ‘다른 여성’이다. 그러한 연희는 아버지에게 저항하다 결국 죽었던, 그렇지 않았다면 폭력의 고리 안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여동생의 모습이기도 하다. 연희가 상훈에게도 학교에도 집안에서의 경험들을 말하지 않는 모습은 꽤 인상적인데, 이는 공적인 자리 혹은 남성 앞에선 웃는 얼굴만 보여주며 (신경을 거스르게 하지 않는) 인형 같은 존재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영화 속 진실과 현실의 잔인함 사이

이렇듯 영화 속 여성들의 불쌍한 현실 혹은 죽음에 대해 ‘그 여성들이 왜 그렇게 당해야만 하지?’ 라고 묻고자 한다면 어떤 답을 낼 수 있을까. 남편의 상습적인 폭력 속에서도 아이를 둘이나 낳고 살고 있던 - 아마도 경제적인 부담까지 지고 있었을 - 어머니, 아버지와 남동생의 일상적인 학대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여고생, 남편의 정신분열과 노점단속에 시달렸을 어머니, 남편을 피해 아들과 도망친 여성 등, 영화 『똥파리』 속 여성들은 고문 같은 일상 속에서도 열심히 ‘가정’을 지켜나간다. 가족들을 둔 채 혼자 뛰쳐나갔다면 아마도 천하의 ‘나쁜 년’이 되었을 아슬아슬한 선택의 줄타기를 하고 있는 여성들이다.

고백하자면, 영화에 나오는 남편들의 잔인한 구타장면과 식칼 쥔 손을 클로즈업한 장면들에선, 공포감보다, 영화 밖에 있을 또 다른 그들이 이젠 발각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안도감이 들었다. 그만큼 잔인하고 그만큼 슬픈 것이 아내폭력이다. 어쩌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피가 흥건하고 살이 찢겨나가는 폭력들이 매우 극단적인 사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아왔던 아내폭력 사례들 중 많은 경우의 여성들은 남편에게 당하는 폭력을 살해의 위협으로 느끼고 있었다. 구타는 물론, 칼로 위협하고 연장으로 치고 공기총을 쏘는 장면은 영화에서나 구성될 법한 장면이 아닌, 실제 아내폭력에서 충분히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다. 2009년 초, 부산의 한 남성은 아내를 강간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자 자살하고 말았다. 2006년에는 스토킹(성폭력)하던 여성이 차를 타고 도망가자 그 차에 매달려 쫓아가던 스토커 남성이 결국 차에서 떨어져 사망하고, 도망가던 여성은 살인죄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는 사건이 있었다. 여성에게 폭력을 저지르던 남성들의 한 여성에 대한 (아마도 애정 비슷한 것으로 비춰질) 집요함과 자기위안에 할 말을 잃게 된다. 법에도 호소하고 죽을 만큼 저항했지만, 정절을 지키라는 ‘은장도’의 칼날이 조금이라도 가해남성을 향해 비껴가면 더 큰 죽일 년이 된다는 것이다. 스스로 죽거나 당해야만 하며, 만약 당하더라도 죽을 만큼 저항하지 않은 것이니 ‘너도 즐긴 것’이 된다. 가정폭력의 고리보다 더욱 반복되는 고리가 바로 여성폭력의 고리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질문을 던져야 할 때

영화는 앞서 언급한 가부장제, 남성성, 결혼제도, 성별화된 몸담론 뿐만 아니라 공교육, 빈곤, 신자유주의, 노동시장의 성차별 등등 다양한 사회 문제와 갈등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고 ‘모두가 피해자다’, 혹은 ‘모두가 가해자다’라는 식으로 젠더구조를 탈색시키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가족에게 기대를 하고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 지킬 수밖에 없는 것은 누구보다 여성이다. 기혼여성이고 어머니일 때 안정적인 사회적 위치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진짜 잔인한 현실이라는 말이다.
사적영역으로 분리되어있는 가족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은폐된 폭력들은 결코 끝내기 힘든 문제들이다. 한 사회의 젠더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아내폭력을 비롯한 모든 성폭력은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니 이제는 피해여성들을 향한 원인 유발론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식의 판단들은 사라져야한다. 가정폭력을 바라보는 문제의 초점은 ‘아내폭력’이라는 구체적인 틀로 옮겨가야한다. 더불어 ‘왜 하필이면 폭력의 방식을 사용하는가’라는 가해남성들을 향한 질문도 함께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