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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09호] 지젝과 해방정치의 시차적 전환


한보희 (연세대 비교문학 강사)





주식회사 대한민국, 이 경제 일원론의 시대는 성공과 동시에 붕괴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경제다!”라는 구호는 더 이상 경제적 구호가 아니라 정치적 구호로 반전된다. 게다가 그 경제-정치적 구호에서는 묘한 종교적 근본주의의 냄새가 난다. CEO 대통령 이명박은 ‘생필품의 물가를 국가가 직접 관리하라’는 개발독재시대의 명령을 내리고 (‘부시-너머’가 아니라 그저) ‘부시-이후’임이 나날이 뚜렷해지는 오바마는 시장주의 경제를 국가-시장주의 경제로 다시 쓰는 일에 매몰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민의 죽음으로부터의) ‘정치적인 것’의 재탄생

이 ‘되돌아온 중세’적 세계―신으로서의 자본-권력과 종교로서의 자본주의 체제―의 법은, 마치 카프카의 법정처럼, 삶에 대한 직접적 명령처럼 하달되나 어디에서도 그러한 명령의 실체가 발견되지 않으며, 따라서 사후적 책임의 주체도 찾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타자들과의 이해관계의 조율의 장이라는 근대정치의 공적, 공식적 공간이 소멸된 이상한 세계와 마주서 있다. 그 탈-정치적 정치, 탈-경제적 경제의 세계는 이명박이 ‘경제는 심리다’라고 말할 때의 그 ‘심리’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그것은 ‘생각대로 하면 되고…디비디바비디부’라는 유아적 자폐증의 신화적 세계이다. 이러한 자본-권력의 자폐증과 짝을 이루는 것은 소위 ‘사회의 허리’라 불리는 중년층과 그들의 세계인 중간계급적 우주―오이코스―의 붕괴이다. 이 붕괴로부터 남겨진 것은 쓰레기가 되는 삶들, 공포에 휩싸인 사회의 잔여들이다. 오늘날 해방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은 바로 이 잔여들―모두에 잠재돼 있는 유령적 주체로서의 ‘호모 사케르’―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의 새로운 주체로, '새로운 역사의 행위자'로 현행화(actualize) 시킬 수 있는가?

적대, 혹은 ‘윤리에서 정치로’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치적 판본에는 두 개의 유형이 있다. 하나는 차이와 다양성을 관용하는 진보적 시민 도덕이고, 다른 하나는 무관심(indifference)으로 표현되는 탈-정치 문화이다. 전자가 참여적 개혁주의라면 후자는 수동성으로의 퇴행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서로 상반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 두 경향은 공히 탈-정치(post-politic)이다. 어째서인가? 정치적 무관심이 '정치'가 있던 자리에 행정이나 치안 서비스가 나타나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면, 차이와 다양성의 정치는 ‘정치’를 도덕이나 윤리로 치환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본연의 정치란 어떤 것인가? 라클라우와 무페는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에 관한 칼 슈미트의 규정―적과 동지의 구분―으로부터 ‘적대(antagonism)’라는 개념을 끄집어내 이를 보편성을 둘러싼 ‘헤게모니 투쟁’으로 전환시킨다. 바로 이 적대의 재발견에 최근 좌파 정치학의 공유지(common)가 있다.

정치적인 것의 요체는 통합과 안정이라는 ‘무덤의 평화’가 아니라 적대를 파고드는 자유의 동학(動學), ‘궁극적 평화를 향한 투쟁과정으로서의 삶 자체’이다. 사회적인 것의 고유한 불가능성―사회란 이름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다수자들의 삶과 그들을 하나로 셈하는 주권권력 사이의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할 뿐이다―을 은폐하고 봉합하려는 시도가 소위 통합과 안정과 질서의 정치, 즉 치안(police)이며 치안(공안)은 사회로부터 정치적인 것, 즉 생동하는 사회적 삶 자체를 제거하려는 노력이다. 그러면 이에 맞서는 정치적 주체화의 투쟁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바틀비’

슬라보예 지젝은 최근 ??시차적 관점??에서 멜빌의 소설「필경사 바틀비: 월-스트리트 이야기」의 주인공인 바틀비(의 거부적 몸짓의 표현인 ‘I would prefer not to')에 대한 해석에서 그 가능성의 윤곽을 그린다. 지젝은 ’거부는 해방정치의 시작‘이라는 네그리와 하트의 바틀비 해석에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결정적인 대목에서 반전을 시도하는데, 요컨대 바틀비의 거부는 해방정치의 출발점이 아니라 근원이며 목표로 간주된다. “하트와 네그리에게 바틀비의 ‘안 하는 쪽으로 하겠다’는 말하자면 단지 식탁을 치우는, 기존 사회의 우주로부터 거릴 획득하는 첫 번째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그 후 필요한 것은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는 공들인 작업으로의 이동이다. (…) 그러나 우리의 시각에서 이것은 정확히 피해야 하는 결론이다: 그 정치적 양식에서 바틀비의 ‘안 하는 쪽으로 하겠다’는 그 후 기존 사회의 우주에 대한 ‘규정된 부정’의 끈질긴 긍정적 작업 속에서 극복되어야 하는 ‘추상적 부정’의 출발점이 아니라 일종의 아르케(arche), 전체 움직임을 지탱하는 근본적인 원리이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건설 작업이 그것에 몸체를 부여한다.”(시차적 관점 747쪽)

지젝에게 바틀비의 거부는 행위의 수동적 거부(‘하지 않겠다’)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적극적인 행위(‘안 하는 쪽으로 하겠다’)이며 바틀비는 그저 ‘~하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 아니라, ‘~하지 않기를 원했던 것’이다. 바틀비는 죽음에 이를 만큼 강렬하게 무언가를 원했고, 그러한 충동을 삶의 공준으로 삼았다. 그게 무엇일까? 지젝은 바틀비에게서 자폐적 절망이나 ‘죽어버리자’는 자살욕구가 아니라, 존재론적 부정성의 간극을 찾아낸다. ‘바틀비의 물러남’으로부터 ‘새로운 질서의 구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바틀비의 물러남’을 ‘새로운 질서’의 구성적 규준으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요컨대, ‘바틀비를 넘어서!’가 아니라 ‘바틀비를 향해서!’가 우리의 방향이다.

이때 바틀비는 ‘모든 것을 거부한 채 죽음을 향한 한 길을 가는 자’라는 그의 외적 행로를 말하는 게 아니다. 바틀비는 우리가 불가피한 ‘현실(reality)’이라고 여기는 이 분명한 세계 전체가 실은 한낱 허깨비들의 밤에 불과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캄캄한 번갯불’의 내리침이며, 어떤 것(something)과 다른 어떤 것 사이의 중간단계가 아니라 어떤 것과 그것의 자리이자 공백인 아무 것도 아닌 것(nothing) 사이의, 이를테면 1과 0 사이의 간극이다. 경제와 정치의 경계, 법과 삶의 경계가 형해화된 이 신화적 탈-정치의 시대의 극복은, 물질적 현실과 보다 ‘고차적인’ 다른 현실의 차이를 이 현실과 그 자체의 공백 사이의 내재적 차이?간극으로 환원하는 것, 다시 말해 “물질적 현실을 그 자체로부터 분리시키는, 그것을 ‘비-전체(non-all)’로 만드는 공백을 구별하는 것”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바틀비의 거부의 몸짓은 이 내재성으로의 초월, 지젝이 ‘시차적 전환’이라 부른 유물론적 메타노이아(metanoia)를 가리킨다.

시차적 전환, 또는 유물론적 메타노이아

이 복잡한 얘기의 핵심은, 어찌 보면 아주 간단하다. 자본주의는 지구적 차원에서 양극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한편에 고등의 문명적 삶을 향유하는 소수의 부유한 인간들이 있고, 총체적으로 악화되는 삶 속에 속절없이 죽어가는 다수의 인간-이하들이 있다. 인간-이하로 추락 중인, 따라서 기존의 체계에선 점점 셈해지지 않게 되는 이 다수들―그것이 대중(Demos)이든 다중(multitude)이든―이 집합적 정치행위로 나아가느냐 그렇지 못하고 동물적 수준으로 추락해 새로운 노예제 사회가 공고화 되느냐가 문제다. 이 투쟁은 새로운 보편성의 이념을 필요로 하며, 그 이념은 이미 다수의 불만 그리고 사실상 이 세계적 문명의 실체인 다수의 역능과 저항들 속에서 성장하고 있다. 이제까지 자신의 선조들―피억압자들―이 투쟁 속에 성취해온 모든 문명적 가치들을 죄다 몰수당하고 있는 이들이 그러한 박탈의 고통 한복판에서 자신의 역사와 존재 의미―역사의 이념적 성좌배치(constellation)―를 기억해낼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이것은 일국적 차원을 훌쩍 뛰어넘을 것이며 그 공격 목표는 위계적 권력구조와 자본주의적 착취 체제 일반이 될 것이다. 오늘날 억압된 ‘정치적인 것의 귀환’이 가리키는 바는 바로 이러한 과제에 대한 주체적 각성이다.

포스트모던의 정치적 교착상태를 넘어서려는 지젝의 도전

여기서 현대 해방정치가 처한 지적, 실천적 교착상태를 극복하려는 지젝의 시도, 혁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라 할 만한 ‘바틀비적 전환’의 요점은 우리의 주관적, 내면적 각성을 뜻하는 것(회심)이 아니라―그것이 아닌 것도 아니지만―, 혁명은 이미 시작되었고 앞으로도 삶의 모든 자리에서 계속되어야 한다는 행위에의, 영구혁명적 요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어떤 행위인가? (언제나 주권권력과 자본의 코드로 환원되는) ‘현실’이라는 환상을 몰아내는 행위, ‘어둠(실재)의 빛’으로 ‘빛(현실)의 어둠’을 몰아내는 계몽의 행위, 바틀비적 거절의 행위, 촛불의 행위이다. 우리는 바로 그 무위의 행위, 무욕의 욕망의 자리를 고수해야 한다. 그것은 벤야민이 ‘진보의 태풍에 저항해 역사의 잔해를 향하는 천사의 날개짓’이라고 묘사했던 것인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은밀한 목록을 간직한) 과거를 향해 내딛는 호랑이의 도약’에 가까울 것이다. 해방의 정치는 이제 발전적 미래가 아니라 억압된 과거를 향해 전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