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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10호] 학문적 대안공동체는 물론 가능하다. 그러나...




임옥희 (여성문화이론연구소 대표)


어떤 영역이든 신자유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현재의 상황에서 대학원이 학문 공동체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지, 있다면 어떤 형태로 가능하고 없다면 왜 그러한지에 대해 살펴본다. 돈 되는 학문만 육성하는 대학원 정책, 취업을 위해 잠시 머무르는 학생들, 어떤 대안적 담론도 생산해내지 못하는 학문, 분과 학문의 경계를 고착화시키는 학진 등. 이처럼 많은 요소들이 대학원을 기능적 공간으로 전락시키고 있기에 대학원‘바깥’에서 학문 공동체를 모색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다년간 여이연(여성문화이론연구소)에서 대안적 담론을 만들어 온 필자를 통해 대학원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대학 안에서도 ‘찬밥’신세인 인문학이 미래의 비전과 삶의 지혜를 제시할 수 있을까? 혹은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시대에 돈 되지 않는 인문학적인 가치와 지혜를 원하기나 할까? 대학의 인문학이 제공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학문적 대안공동체는 제공해줄 수 있을까? 그보다 학문적 대안공동체가 가능하기나 할까? 이처럼 거시적인 문제들을 근시안인 필자가 논할 능력은 없지만 그래도 인문학 분야와 관련하여 고민은 해보고자 한다. 요즘 대학 내에서는 몇 년 전과는 달리 인문학의 위기담론은 슬그머니 사라진 편이다. 인문학이 발등의 불은 끈 것처럼 보인다. 그 대신 인문학의 콘텐츠화, 인문학의 사회적 역할과 과제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다. 

한국의 인문학은 어떠한가?

존 쿳시의 소설집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에는 <아프리카에서의 인문학>이라는 장이  있다. 얼핏 보면 제목부터가 단편소설이라기보다 학술논문처럼 보인다. 존 쿳시가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노벨문학상) 작가이자 케이프타운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쳤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가 왜 이런 제목의 소설을 썼는지 수긍이 갈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인문학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존 쿳시의 페르소나인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소설 속에서 늙은 페미니스트 작가로 등장한다. 그녀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한 교수를 만난다. 그 교수는 아프리카에서 인문학은 '대학의 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대학은 거세되었고, 학문은 돈벌이의 장일 따름이다. 요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하루에 50명이나 총질에 사망하고 강간은 다반사고 대다수는 기아에 허덕인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인문학이 상아탑 바깥에서 무슨 소용에 닿겠는가라는 회의가 들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인문학은 어떤가? 한국사회에서 인문학은 출발부터 대단히 도구적이었다. 인문학의 목적 자체가 벼슬길에 나가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과거제도는 신분상승의 조건이었다. 사서삼경을 읽고 해석하려는 노력이 입신양명에 있었고, 벼슬을 하면 가족 전체가 경제적 혜택을 누렸다. 부모들은 경, 대부와 같은 아들의 벼슬에 맞춰 대접받았다. 개인의 영광은 가문의 영광이었고 입신양명은 효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인문학 교육이 계층 상층의 사다리였던 시절은 지났다. 대학 학력은 보편화되었다. 고등학생의 84.5%가 대학에 진학하며, 대학교육이 의무교육이 된 지 오래다. 대학졸업장이 별다른 혜택은 주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없을 때 상대적으로 엄청난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는 불안이 우리 사회 전반에 깔려 있다.     

이런 상황이므로 대학 인문학도 시장논리에 맞춰서 일자리를 창출하고 생계수단을 만들어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전사회가 자본의 논리에 복종하고 있는 시대에 인문학의 경쟁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인문학은 분명 위기에 봉착해 있다. 지금 강단 인문학이 자체 위기를 극복하는 방식은 비인문학적인 방법으로 지식생산을 계량화하는 것이다.  
 
온 사회가 한 목소리로 사교육 시장을 비판하는 척하지만 대학의 인문학은 사실 사교육이 없으면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 사교육의 온상이라는 점에서 학원과 대학은 그다지 다를 바가 없다. 대학의 인문학과는 사교육의 활성화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살아간다. 인문학과 졸업생들이 가장 ‘만만하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곳이 온갖 형태의 학원들이다. 학원시장에 인력을 공급할 수 있는 자격증을 배타적으로 보유하기 위해 인문학과들끼리의 다툼이 치열하다. 고학력 실업시대에 인문학의 최대목표는 스스로가 생산성과 경쟁력이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학진과 인문학의 역설적 관계

대학에는 대학교육의 소비자들로서 학생들뿐만 아니라 학과와 학문의 재생산에 필요한 연구 인력들이 있다. 요즘 그들은 학술진흥재단(이하‘학진’)프로젝트로 살아간다. 학진의 장기 프로젝트는 10년이다. 그 이후에는 연구원 자신과 인문학 자체가 자생력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하려면 시장논리에 부응할 수 있도록 인문학을 사회 자본화 혹은 산업화하는 방식으로 나가야 한다. 그런데 인문학이 속도와 양으로 승부하자면 시장경쟁에서 이기기 힘들다. 그럼에도 인문학적인 가치를 양화시켜서 어떻게 하든지 시장에서 팔릴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 지금 인문학이 처한 딜레마다. 인문학이 교환가치의 회로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 연구자들이 연구하면서 살 수 있는 한 가지 현실적 대안은 대학 연구소가 학진과 같은 국가기구로부터 연구지원금을 얻어내는 방식이다. 인문학과가 배출한 실업자 구제책의 하나가 학진 프로젝트 인문학 사업들이다. 학진 인문학 프로젝트들은 시간강사들에게 일자리를 창출해주는 것이며 학과로서는 자기 학문의 재생산을 위한 인력의 재생산을 가능하게 해준다. 대학의 유령으로 떠도는 시간강사들이 연구원이라는 안정적인 신분으로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학진의 프로젝트는 대부분 한 10년짜리다.국가기구로부터 또 다른 지원을 받지 않는 한, 그 다음부터 인문학은 대학이 아니라 경쟁의 무풍지대인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런 시장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인문학의 콘텐츠화가 될 것이다. 사실 콘텐츠라는 표현은 수천 년의 역사적 경험, 문화적 내용과 이야기들, 은유들을 돈을 지불하고 구입해야 하는 상품으로 만들어 되파는 것이다. 모든 연구소들이 인문학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인문학의 자본화에 자발적으로 공모하고 있다. 그 결과는 인문학을 살리기 위해 인문학의 모든 것을 자본의 논리에 맡김으로써 인문학이 실종되는 아이러니에 빠질 수도 있다. 학진은 아이러니하게도 인문학의 위기를 지연시킴과 동시에 인문학의 위기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대안적인 학문적 코뮨은 가능한가?

그렇다면 대학제도 바깥에서 학문 대안공동체를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문학 본연의 복고적인 사용가치를 복원하는 길이다. 인문학 자체를 취직이 아니라 취향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그 말은 인문학 박사가 즐겁게 환경미화원(그것이 엄청난 뉴스거리가 아니라)을 하면서 남은 시간에 시를 읊고 동네아이들 모아놓고 철학을 논하는 것이다. 혹은 환경미화원이 벽화를 그리고, 홈리스가 저자거리에서 철학을 논하고, 저자거리에서 콩나물 파는 할머니가 인생을 노래할 수 있도록 인문학이 거리의 학문으로 나가는 방식이다. 그것이 인문학이 가진 사용가치다. 이런 사용가치에 충실하다면 대학바깥에서의 학문공동체가 가능할 수 있다.  

인문학은 환급작물처럼 재빨리 돈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 인문학은 수요보다 공급이 넘쳐난다. 그 점을 받아들이고 가난하게 사는 대신 자유로운 시간에 쿵푸하자는 것이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인문학 자체가 귀족학문이다. 성격이 운명이라고 하지만 학과가 운명인 시대다. 귀족이 아니면서 귀족학문인 인문학을 선택한 것에 대한 나의 책임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학문적인 대안공동체를 상정하려면 일단은 대학주변에서 자리잡겠다는 귀족적인 열정을 ‘열정적으로 체념’할 필요가 있다. 교수, 연구원이 될 가능성에 목매고 대학 안에서 유령적인 존재로 10년, 20년을 보내는 것은 대단히 소모적이기 때문이다. 가난해지는 대가로 값비싸게 구입한 자유 시간에 공부하고 그렇게 공부한 것을 지역사회에 돌릴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하고 그러고도 남는 시간에는 그런 공동체 창출을 방해하는 힘들과 즐겁게 맞서 싸우는 것이다. 이처럼 가난한 유한계급을 꿈꾼다면 대안적인 학문적 코뮨은 가능할 것이다.      

문제는 자본이 모든 가치를 제패한 사회에서 자본의 욕망과 유혹에 저항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는 점이다. 전지구가 돈의 욕망으로 획일화된 시대에 다른 가치가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그에 따라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고 고민하면서 사는 것은 인문학 본연의 사용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지상명령인 ‘소비하고 즐겨라’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정언명령에 따르는 것이다. 그런 명령은 이론적인 정합성, 설득력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삶의 가치를 추구하겠다는 실천과 믿음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결국은 의지와 결단의 문제다. 그러니 쉽지 않은 길이다, 그래도 결심이 굳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남들에게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몸소 보여주는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