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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110호] 공부하는 사람

박승일 기자

공부하는 사람은 다를 줄 알았다. 착각이다. 대학원도 예외는 아니어서 어딜 가나 존재하는 꼰대들이 그들의 꼰대 근성을 교묘하게 가린 채 학자연하며 여기저기서 훈수를 둔다. 추레한 욕망이 드러나지 않게 주위를 살피면서, 고도의 정치적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마치 모든 것에서 초탈한 마냥 뒷짐을 지고 헛기침을 하면서. 그리고‘선생’이라는 이름으로 이를 합리화한다. 교내 민주화를 위해 뭐라도 할라치면 핏대를 세워가며 교권에 대한 위협이라고 분기탱천한다. 해가 바뀌어도 달라진 것 없는 강의와 정확히 딱 그만큼의 깊이는 현실의 복잡함은 외면한 채 항상‘기본’이라는 말로 정당화된다. 하지만 그들의‘제자’인 우리는 잠자코 침묵해야 한다. 잘 참는 자만이 애제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제자는 선생이 가르친 바를 그대로 닮는다. 한국 대학 사회에서 선생의 과오를 비판했다가 몰매를 맞는 경우는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다. 성희롱을 해도 선생은 건재하게 자리를 지킨다.

공부하는 사람은 다를 줄 알았다. 역시 착각이다. 선생을 비판하던 제자들은 거기서 한 치도 나가지 못 한다. 선생의 이삿짐을 나르고, 선생 자녀의 과외를 도맡아 하고, 밤새 선생 이름으로 출판되는 책의 번역을 하고, 선생의 개인 비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동안 어느새 얼굴 언저리에 꼰대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리고는 후배에게 말한다. 네가 뭘 잘 모른다고. 공부하려면 다 이렇게 해야 한다고. 선생 눈밖에라도 나면 인생종치는 거라고. 대학원 사회의 수많은 권력관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배움으로 포장되는 현실 속에서 학생들은 체념하고 머물거나 거부하고 떠나는 것 이외의 선택권이 없다.

공부하는 나는 다를 수 있다고 믿었다. 역시나 착각이다. 선생의 눈을 바라보기가 힘들다.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를 한다. 얼굴은 이미 웃음을 띠고 있다. 현실에 분노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반복되는 경험은 몸속 깊숙이 아로새겨진다. 어느새 신입생에게 거들먹거리는 걸 발견하는 것도, 선배에게 굽실거리는 걸 발견하는 것도 그리 낯설지 않다. 나이가 들면서 현실적 고려 앞에 이상을 내려놓고, 그 무기력함을 위무하고자 처세를 말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처세를 말할 때조차 이것이 최선이었노라고 자위하는 비루함을 버리지 못한다. 이제는 화도 안 나고 한숨만 나온다. 공부하는 사람은 다를 줄 알았지만 그렇게 우리는 한통속이 되어 간다. 젠장


“몸이 늙는 건 숙명이지만 정신이 늙는 건 선택이다. 대개의 사람들이 조금씩 하루도 빠짐없이 신념과 용기와 꿈이 있던 자리를 회의와 비굴과 협잡으로 채워갈 때, 그런 순수한 오염의 과정을 철이 들고 성숙해 가는 과정이라고 거대하게 담합할 때, 여전히 신념과 용기와 꿈을 좇으며 살아가는 늙은청년들이 있다.”<김규항의 B급 좌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