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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110호] 냉소와 열망 사이: ‘88만원 세대’, 불안 속에 머물다


<조난 프리타, 遭難 フリーター, A permanent Part-timer in distress, 이와부치 히로키, 2007 >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와부치’의 기상시간은 6시 반. 불 꺼진 방에서 밤새 명멸하던 TV 화면은 이른 시간에 켜진 형광등의 새된 빛에 그 고즈넉함을 잃는다. 식사를 하며 뉴스를 좇는 졸린 눈도, 이를 비추는 캠코더의 화면도 명징한 초점 없이 부유한다.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생경해 보이는 이 아침풍경의 주인공은 분명 그이지만 또한 그가 아니기도 하다. 마리오네트 marionette (*실로 매달아 조작하는 인형극)처럼, 그의 일상은 대부분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움직인다. (출퇴근용인 자전거조차 그의 소유가 아니라 회사의 물건이다!) 물론 완전히 타의라곤 할 수 없다. 줄을 끊는 과감함을 선택하는 대신 줄이 끊기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버텨내기로 결정한 사람은 분명 그 자신이므로.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전적으로 탓할 수도 없다. 자신의 의지로 수렴될 수 없는 모종의 체계 하에서 오롯하게 자족하기란 쉽지 않은 - 가능하기는 한가 - 일이므로. “난 누구에게 지고 있는 걸까?” 그 답은 질문하는 자의 혼란만큼이나 불투명하다.

그 누구에게로 책임을 전가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차라리 그는 웃는다. 하지만 그 웃음은 차갑다. 캠코더로 찍힌 거친 색감의 영상에는 사회에 대한 냉소가 묻어난다. 영화를 이끄는 두 가지 원동력은 전체 비정규직 비율이 30%에 육박하고 20대에 한정할 경우 50%를 넘어서는 일본의 사회구조에 대한 ‘불만’과 이러한 구조가 바뀌지 않으리라는 ‘체념’이다. 따라서 그는 젊음의 특권인 저항권을 방기하지 말라고 채근하는 어른들과 감싼 동정의 시선을 활성화하는 매스컴들을 향해 냉소한다. 당사자들의 삶을 현실적으로 개선시키지 못할 바에야 외부인들의 변죽울림은 자기충족 이상의 것이 못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시린 것은 외부를 향한 냉소가 아닌 내부를 겨냥하는 냉소, 뼈 속까지 파고드는 자괴감이다.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실제로 노력이나 해봤냐는 정규직 고교동창의 날 선 비난 앞에서 그는 침묵한다. 매스컴을 통해 사회의 모순에 맞서는 투사로 비춰졌지만 그의 솔직한 심정은 제대로 된 대우를 받는 직업, 즉 비정규직이 아닌 정규직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일견 모순적이지만, 사회에 대한 냉소가 자신에 대한 냉소로 전이되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사회에 대한 불만의 한편엔 그런 사회로 어떻게든 편입되고 싶어 하는 체념적 욕망이 스멀거린다. 그리고 그 욕망은 냉소의 방향을 역전시킨다. 냉소가 세상을 향할 때 인간은 적어도 자존감을 지킬 수 있다. 세상을 향한 냉소가 마냥 긍정적이라고 할 순 없지만 나를 지킬 수 있는 최소의 방어기제임에는 확실하다. 반면 냉소가 자신을 향할 때, 더구나 그 냉소가 세상의 시선을 내면화한 냉소일 경우 인간의 자존감은 허물어진다. 그 자리엔 자신을 스스로 패배자로 규정하는 자학만이 남겨진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자신을 아직 철저히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언젠가는 잡지를 만들고 싶고 “많이많이 사랑하며 많이많이 웃고 싶다.” 무기력한 삶보다는 변화무쌍한 삶을 살고 싶고 ‘오랑우탄도 할 수 있는’ 단순 노동보다는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다. 그렇다. 그에게도 꿈과 욕망이 있다. 다만 그 꿈과 욕망이 구체적이지 않고 모호할 뿐이다. 이런 그를 사회는 공상가 내지 철부지로 단정한다. 그리고 그 스스로도 그 평가를 뼈아프게 인정한다. 시골 고향을 떠나 굳이 외지에서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가 결국 도시적 삶이 주는 ‘자극’ 때문 아니냐는 어머니의 핀잔은 정확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자극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을 향한 냉소를 그나마 버텨낼 수 있는 이유는 가슴을 부글거리게 하고 머리를 뜨겁게 하는 어떤 열망 때문이다. 나만이 할 수 있는,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열망은 비루한 삶을 버텨내도록 하는 원동력이자 자존감을 가진 인간으로 남아 있게 하는 버팀목이다. 비록 그 열망 또한 언젠가는 냉소에 의해 싸늘히 식어버리고 마는 것일지라도.

소위 ‘88만원 세대’라 불리는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사회에 향한 냉소와 자신을 향한 냉소 사이를 하루에도 몇 번씩 오락가락하고, 해야만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그의 모습에선 어떤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는지. 일본 청년 이와부치의 삶은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가까운 미래, 어쩌면 이미 현재의 모습은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영화 을 통해 던져졌던 물음은 지금-여기서 현재화 된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많은 이들은 사회를 향한 냉소를 자신을 향한 냉소로 전이시키지 말고 사회를 향한 열망으로 순치시켜야 한다고, 즉 정치적 단결을 통한 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이 주장에 깔려있는 당위적 요청, 즉 정치적 투쟁에 선뜩 동참하지 못하는 ‘소시민적 망설임’들에 대한 계몽주의적 요청마저 전적으로 옳은 것일까.

투쟁을 요구하는 수사들이 풍기는 단호함은 피를 끓게 하는 화려함을 있을지언정, 88만원 세대가 갖고 있는 불안감의 정체를 면밀히 살펴보는 세심함은 결여하고 있는 듯하다. 불안은 분명 냉소와 열정 사이를 오고가는 방황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방황은 유별난을 있 아니다. 역사상 모 방젊음은 이런 종류의 방황을 통해 성장 해왔고 더구나 그것은 젊음의 특권이라 여겨져 왔다. 그러므로 방황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현재 88만원 세대가 직면하고 있는 불안의 특유함은 외려 ‘방황할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 상황, 이것과 저것 중 빨리 하 현재선택하라는 재촉에서 비롯한다. 개인들로 하여금 각자가 직면하는 불안감의 정체를 충분히 사유할 수 있는 여유를 허락지 않는, 효율성과 목적성 위주의 분위기가 문제인을 있을지언사회적 투쟁에로의 촉구그러므뜩찮은 것@결여하고 러한 식의 비쁽들이불안에 대한 각 개인들 스스로의 숙고과윕 결누락될 여지그러크기 때문이다. 과연 개인적 열망 결즉시언사회화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있 비록 개인적 열망들의 분출을 근원적으로 보장키 위한 ‘과윕’일지라도줬언사회적 열망만이 답이자 최우선이라는 주장들이 다소 폭력 자체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개인적 열망들의 이질성을 이질성으로 남겨두는 것, 그리고 그 이후에 사회적 열망을 접속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느리지만 올바른 순서가 아닐까. 비록 불안 속에 머물지라도 그 누구의 삶이 아닌 나만의 삶을 끊임없이 열망하는 이와부치‘들’의 존재가 절실하다.

곽성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