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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글

[110호] 대학원, 낯설다



AM 3:19

창문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는 공학관의 불빛이 물에 번진 물감마냥 멍울져있다. 창문을 열어 보니 큰 괴물처럼 눈을 번뜩인다. 다시 창문을 닫는다.

석사 4학기. 논문을 써야하고 진로를 정해야 하고 결혼도 생각해야 하는. 하지만 아무것도 손에 쥔 것 없이 머릿속만 복잡하다. 공부를 시작할 때의 의지와 열정도 현실의중력과 관성에 의해 희석된 지 오래다. 무언가에 쫓기듯 하루를 살아내고 익숙한 일상을 소비한다.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얼치기의 희망도 남들과 다르게 살겠다는 어설픈 각오도 하얀 모니터 앞에 목을 길게 내밀고‘논문’이라는 것을 쓰는 동안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사라져버렸다.


“어렸을 때는 누구나 꿈이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서 현실적 고려 앞에 자신의 꿈을 내려놓고 그 무기력함을 위무하고자 처세를 말하기 시작합니다.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포기하는 그 참담함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자신의 포기가 다른 이의 포기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분명 이기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꿈이 하나의 현실로 수렴되는 것이 사회적 분위기에서 연유하는 것만은 아니겠지만 학창 시절부터 하나의 목표만이 주어지고 사회에 나가서까지 오로지 성공만을 위해 내달려야 하는 현실은 분명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입니다. 오로지 그 길 외에는 행복이 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현실과 타협하길 거부하고 자신만의 길을 나직이 걷는 이가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북돋아 주는 건 사회적 인프라의 구축 없이는 힘든 일인가 봅니다. 한국사회에서 공부를 한다는 건 사회에 나가기 두려워하거나 취직이 안 되는 이들의 유예기간이라고 쉽게 폄하되기 일쑤니까요. 하지만 그러한 불안을 끌어안고 자신의 신념을 견지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야말로 두려움을 이겨내는 정직한 자세가 아닐까요. 두려움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이겨내는 것이니까요.”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기 전 아버지께 드렸던 편지글의 일부>


나는 내가 낯설다. 우연히 2년 전 편지를 꺼내 읽고 묘한 낯섦과 만난다. 이 낯섦은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를 잇는 수많은 일치점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와 결코 같지 않다는 단절감과 마주치게 한다. 그리고 잊혀졌지만 결코 소멸되지 않은 기억 저편의 경험을 지금-여기에서 다시 상기시킨다. 친숙한 일상을 단숨에 낯선 사유로 끌어내는 사건의 침입 앞에서 비로소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이는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거나 추억을 반추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를 불러 현재화 시키는 것, 그때의 나를 현재의 나와 조우하게 하는 것, 그리고 과거 속에서 기억을 구제함으로써 지금과는 다른 현실을 창안해 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로써 가능해지는 것은 낯섦과 마주친 후에 작동하는 사유이자 오래된 습관에 대한 반성일 수 있다.

대학원을 낯설게 보려 한다. 너무 익숙해져서 잠시나마 잊고 있던 2년 전 나를 만나기위해. 그리고 당시의 철없던 내 모습이 지금의 철든 내 모습 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심어린 것이었음을 깨닫기 위해. 나아가 고질적인 문제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만성적인 대학원 사회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기 위해서.

부디 이번 호가 대학원 사회에서 당연시되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을 낯설게 보기 위한 사유의 한 계기가 되길 바라며…….

편집장 박승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