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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10호] 대학원과 시장권력, 그리고 나

 

대학원과 시장 권력이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만나는지 그리고 그 만남은 어떤 현실 정치적 지형을 만들어내는지 살펴본다. 시장권력에 포섭되어 가는(혹은 이미 포섭된) 대학원 사회와 이를 인준하는 교수들과 학진, 그리고 여기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대학원생들의 현실에 대해 고민해보고, 덧붙여 절대자본주의 체제라는 압도적인 현실 아래서 어떤 저항과 성찰이 가능한지 나아가 대학원이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지 함께 모색해보고자 한다.



















이명원(문학평론가)



1. 1945년 이후의 대학

오늘과 같은 대학의 시장화를 장기지속적인 구조적 국면에서 진단한 것은 월러스틴이다. 그는 1945년부터 2000년까지를 분절한 후 다음과 같은 7단계의 변화를 지적하고 있다.

1) 1945년 이후 일어난 가장 중요한 일은 적어도 25년에서 30년 동안 지속된 세계경제의 놀라운 확산이다. 서구 지역에 한정됐던 대학이 이 기간 동안 비서구 지역에서 놀랄 만큼 팽창했다.

2) 대학의 수적인 팽창은 교수, 학생, 그리고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들의 수적인 증가를 동반했다. 그 결과 대학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는 민주화됐지만, 지구적인 차원에서의 대학의 서열화 역시 구조화되었다.

3) 대학의 확산은 냉전과 세계적인 기술의 확산과도 일치하고 있다. 엄청난 돈이 대학의 과학기술 부문으로 흘러갔으며, 이에 부흥해 인문학 역시 정부와 기업이 제공할 수 있는 재원을 얻기 위해 점점 더 과학적인 색채를 띠려고 노력했다.

4) 서구에서는 1968년 혁명기에 대학의 지배구조에 대한 논란이 확산됐다. 대학행정가, 학생, 교수들에 대한 질문과 함께, 과학에 대한 관점의 모든 전제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다양한 지식운동이 수립됐다.

5) 그러나 1968년 이후 세계경제는 실질소득 및 실질이윤의 하강에 따른 불황기에 직면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팽창을 거듭한 대학은 1970년에서 2000년 사이에 허리띠를 졸라매야만 했다.

6) 이를 위해 대학의 민영화가 상당히 증대했고 심지어는 상업화도 증대했다. 예산감축은 “교원들을 부수어버렸다.” 학생구성원의 민주화가 종말을 맞이하게 되자 결국 교원의 민주화 역시 종말을 맞이했다.

7) 마지막으로 대학의‘고등학교화’가 구조화됐고, 대학에 대한 국가와 시장 부문의 개입이 노골화됐다. 정치적으로 세계체제의 제도로서 대학이 갖는 중요성은 감소하게 됐다.

월러스틴의 이러한 진단은 한국의 대학제도의 변화에 있어서도 큰 틀에서 유력한 참조점이 될 듯싶다. 식민지기의 경성제국대학을 제외하고 전문학교 체제로 유지되었던 한국의 고등교육은, 해방 직후 경성제대가 서울대학교로 바뀌고 고려대와 연희대(연세대의 전신), 이화여대 등이 1946년을 전후한 시기에 학부와 대학원 교육을 시작한 이래 오늘과 같이 팽창되었다.

한국의 대학은 유럽식의 아카데미시즘보다는 미국식의 국가주의와 시장주의의 흐름에 일찍부터 포섭되어 갔다. 1960년대의 개발독재를 거치면서 한국의 대학은 위로부터의 산업화 논리를 제공하기 위한 미국식 근대화 이론의 수입 및 적용에 힘썼고, 관제화된 사회과학 및 산업부문에 즉각 적용가능한 공학교육의 육성에 진력했다.
 
2차대전 이후의 미국대학이 냉전을 위한 연구에 대거 골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대학역시 군사독재 기간 동안 진행했던 교육과 연구의 많은 부문이 일종의 정책연구의 성격을 띠었고, 국가주의와 결합한 근대화 논리를 체계화하는 데 골몰했다. 한국의 초기교육학은 미국의 피바디 대학출신이, 경제학은 시카고학파가 장악한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일이며, 국가주의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한 국민윤리교육이 철학에서 분리되어 확장되었고, 문학연구는 고전교육에서 충효이데올로기를 강조하고 현대문학 연구에서는 순수문학이 강조되며, 인문사회과학의 방법론 모두가 실증주의를 강조하는 흐름으로 전개되었던 것은 이런 까닭이었다.

유럽에서의 68년을 전후한 시기가 대학의 지배구조와 지식생산에서의 반체제적 혁신이 가해지던 시점이라면, 한국에서는 그것이 1980년대를 거치면서 유사한 흐름이 전개되었다. 대학에서의 민중∙민족적 관점에서의 진보적 학문에의 모색과 함께, 학단협과 민교협 등의 진보적교수∙연구자들의 직능단체가 구성되었고, 대학에서의 학생자치조직인 총학생회가 출범하였으며, 사회민주화와 연동된 대학 민주화의 거센 요구가 교육과정 개편으로부
터 대학의 지배구조, 총장 직선제, 지식생산의 진보적 방법론의 모색에 이르기까지 역동적인 변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199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의 대학은 세계화의 거센 물결 속으로 휠쓸려 들어가게 되는데, 사실 이 시기가 대학이 국가권력의 헤게모니적 통치에 무력화되는 한편, 시장권력의 노골화된 압박에 굴복하게 되는 분기점을 이루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2.‘아는 것이 돈이다’는 구호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구호가 학문지형의 변화에 있어서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이끈 것은 아니지만, 이 시기를 기점으로 민주화 이후 일시적으로 확보되었던 대학의 민주화와 자율적 지식생산의 모델이 난관에 봉착하기 시작한 것은 분명한 일이다. 당시에 지식인들은 세계화의 구호를 막연하게 받아들였지만, 이후 그것이 모든 것을 경제영역으로 빨아들이는 극단적인 자유기업 자본주의를 은폐하기 위한 수사였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는 상황이 이미 늦었던 감이 없지 않다. 

김영삼 정부는 1995년 이른바 5.31 교육개혁을 발표하면서, 고등교육 부부에서의 경쟁력 강화와 수요자 중심의 교육을 천명하고 나섰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그것은 교육의 시장화를 초래했을 뿐이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대학설립 요건이 최소화됨으로써, 고등교육 이수자의 과잉공급 및 부실사학이 양적으로 증대되는 문제를 낳게 된다. 동시에 대학 모집단위에서의 학부제의 실시는 비인기학과의 자연도태 및 구조조정에 따른 인문사회과학의 부실화를 초래했고, 학생들에게는 무한경쟁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특히 이시기를 기점으로 서열화된 대학평가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다채로운 평가·심의장치들이 고안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학술진흥재단이 그간 대학자율로 평가되던 학술지 관리규정 및 교수업적 평가기준을 일괄 설정하고, 이에 따른 학교 간 평가를 토대로 대학에 대한 차별적인 예산지원을 감행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대학의 자율적 연구시스템을 무력화한 제도관리시스템의 구축이 그것이다. 

이것이 김대중 정부에 이르러서는 BK(BRAIN KOREA)21이라는 거액의 국책연구비를 당근과 채찍으로 한 연구비 수주경쟁을 가열시키게 되며, 이후 신지식인 개념의 창안을 통한 지식경제의 제창과 함께, 학문과 돈을 직접적으로 연계시키면서 그것을 국가경쟁력이라는 개념으로 통합시키는 교육정책을 구조화하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교육정책은 노무현 정부를 거쳐 현 이명박 정부에서는 더욱 공세적으로 강화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기존의 과학재단과 학술진흥재단을 통합하여 '한국연구재단'을 설립하고, 확대된 재원을 통해서 '저탄소 녹생성장'과 관련된 노골화된 정책지식의 생산을 연구비 수주를 명목으로 강제하는 등의 양상이 그것이다. 

이러한 학문정책의 변화는 대학의 성격을 나쁜 방식으로, 그것도 매우 급진적으로 변화시켰다. 1980년대를 기점으로 대학의 민주화 및 진보적 지식생산의 자율적 인프라가 확대되던 경향은 일종의 반동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항상 위기를 먹고사는 경제적 불안정성의 확대는 대학생들에게 무한경쟁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여, 그 바깥의 사회적 현실에 대한 의식적인 망각과 주변화를 초래했고, 교수와 연구자들 역시 임박한 연구업적 및 연구비 수주의 압박에 무한 노출되어, 지식인 특유의 사회적 개입과 실천의 공간은 희박해졌다. 오늘의 대학은 과거라면 결코 용인할 수 없었던 대학공간의 상업화 및 대학문화의 시장화를 오히려 반기고 있는 실정이며, 대학의 재단이사회를 장악한 기업계 인사들은 대학도 교육기업에 불과할 뿐이라며 무소불위의 자본과 권력을 활용해 대학을 직업학교로 변질시키고 있다. 놀라운 것은 그런 상황을 오히려 반기고 있는 대학구성원들의 기묘한 노예근성이다.

3. 한국 대학원의 과거와 오늘

지금까지는 자못 구조적인 문제를 중심으로 한국의 대학사회를 진단해왔지만, 이제는 다소 미시적인 관점이 있기는 하나, 필자 자신이 대학원사회를 경험해오면서 실감했던 이런저런 문제에 대해 경험적인 생각들을 피력해 보도록 하겠다. 경험이란 다분히 주관적인 것이지만, 객관적 상황이 삼투된 주관이라는 것을 고려해 보면 일방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대학원교육은 1947년에 서울대학교에 대학원이 설립된 것이 효시이다. 1949년에는 고려대학교에, 1950년에는 연희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에 대학원이 개설되었다. 60여년에 이르는 전통을 자랑하지만 그 전통이 꼭 자랑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실제로 학생들이 대학원을 다니면서 확인하게 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학부 교육에 비해서 매우 혁신적인 체제를 갖추고 있는가를 확인하기 어렵다. 오늘날 전국의 학부 커리큘럼이 모두가 대동소이하듯이 대학원의 커리큘럼 역시 대동소이하다. 이것은 전문교육으로서의 대학원 교육의 학교간 차별성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시킨다.

더 큰 문제는 각 대학원의 교과과정이 사실상 학부 교육에서 진행되었던 교과과정의 별다른 차이 없는 반복이라는 사실이며, 이것은 대학원에 소속된 전담교원이 충원되지 않는 한 앞으로도 큰틀에서의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각 대학은 경쟁적으로 대학원 정원을 확대시켜왔으며, 이에 따라 연구인력의 과잉배출을 수수방관해왔다. 교육의 질은 변화 없이 규모만 양적으로 확대되다 보니, 대학원 교육의 부실은 더욱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대학원이 학문생산의 거점으로서의 성격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것 역시 꼭 지적될 사항이다. 이것은 우리 학문의 대외적 식민성 또는 사대주의적 근성에 기인하는 문제인데, 설사 유수한 한국의 대학에서 우여곡절 끝에 박사학위를 취득한다고 해도 유학파 박사들에 비하자면 비교우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교수와 연구자들이 한국사회에는 유독 많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국문학과 같이 한국이 학문의 본토인 학문 영역에서조차 '외국어로서의 한국어문학 교육'의 필요성이라는 가당찮은 이유로 유학파를 환대하는 경우를 곧잘 볼 수 있다. 자국의 학문에 대한 멸시와 외국의 학문에 대한 선망이라는 이런 이중사고가 약화되지 않는 한, 한국에서 석박사 과정을 이수하고 있는 대학원생들의 연구자로서의 존재감은 갈수록 희박해질 것이다. 



주변국에 비해서도 한국의 대학원생들이 지나치게 고비용을 지불하면서 미래전망이 없는 현실에 매몰되고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는 것도 지적하고 싶다. 가령 일본의 경우만 하더라도 석사과정은 비교적 입학과 학위취득이 용이하지만, 박사과정의 경우는 입학도 어렵고 학위취득도 심각할 정도로 소수에 불과하다. 대신 박사과정에 진학할 학생은 학문적 역량에 대한 매우 세밀한 평가를 진행한 후 입학을 허가하는 대신, 적어도 과정에 있는 한 경제적 비용에 대한 고민 때문에 학문외적 방황을 할 필요가 없는 각종 장학제도는 물론 생계지원제도가 완비되어 있다. 

이에 반해 한국의 박사과정 학생들은 사실상 지도교수가 진행하는 각종 연구프로젝트에 종속되어 등록금에도 채 못 미치는 열악한 연구비를 수주한 대가로 황금 같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각종 번역과 학원강의를 포함한 아르바이트에 종사하느라 정작 해야 될 연구에 투자할 시간을 소모하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건실한 문제의식을 내포한 예리한 논문과 저작이 산출되는 것은 고사하고, 젊음의 치열한 황금기에 학위과정을 끝마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 대학이 박사학위 과정을 학계의 수요에 맞게 적절하게 축소하는 한편, 전업학생인 경우에는 학업을 충분히 지속할 수 있는 수준에서의 조건 없는 연구비 및 장학금을 지원해야한다. 
 
설사 학위과정을 무사히 끝마쳤다고 해도 해당 연구자가 대학의 교원으로서 안정적인 연구환경을 갖게 될 확률은 예측하기 어렵다. 최근의 대학상황을 보면 신규교원의 임용은 축소되는 반면, 오히려 대학의 구조조정에 따라 경우에 따라서는 대학의 폐쇄나 대규모 인력구조조정이 예상되는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특히 지역의 대학들이 처해 있는 위기의식은 매우 큰 상황이다. 과거라면 박사학위과정 중이나 수료 이후에 시간강사 등으로 일하면서 학문의 미래를 모색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대학원생들에게는 이조차도 어려운 실정이다. 연구인력의 과잉 때문에 대학의 시간강사조차 박사급으로 제한되고 있는 실정이며, 설사 과정 중에 강의를 한다고 할지라도 '비정규직법' 등의 문제를 들어 2년 이상의 강의를 위촉하는 것이 금지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교수확보율이 전체적으로는 60%선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대학당국이 편법적으로 비전임교원을 임용해 교원확보율을 올리는 방식으로 교원수급정책을 활용함으로써, 대학연구자들의 고용조건이 불안정화되고 있는 것 역시 커다란 문제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대학사회에서 빈번히 목격하고 있는 대로, 언제부터인가 겸임교수, 연구교수, 초빙교수, 특임교수, 강의교수 등 타이틀은 교수인데, 급여와 근무조건은 시간강사와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교수들이 양적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거기에 전임교원이기는 하지만, 정년은 보장이 안되는 계약제 교수인 비정년트랙 교수들까지 포함하면, 사실 대학이야말로 비정규직으로 가득찬 모순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정이 그렇다고 한다면, 대학의 전임교원들은 단기적인 자신들의 신분보장이라는 이해관계에 무관해 보이는 이 비전임교원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일이 실제로는 학문의 재생산을 위해 매우 막대한 중요성을 갖고 있음을 인식하고 교육투쟁과 대안을 만들기 위한 집단행동에 나서야 한다. 사실 대학에서의 민주화의 종말이 학생 민주주의의 종언에서 비롯된 것이듯이, 교수들의 교권이라는 것 역시 교육자 계층 내부에서의 상호불신과 반목을 조성하는 이 인위적인 연구위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대학원생들의 입장에서도 연구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자치조직 및 연구공동체의 가능성에 대한 공동의 노력을 모색해야 한다. 지도교수-제자로 이어지는 도제식의 연구전통 자체가 완전히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연구의 정신은 결국 그 자신이 속해 있는 독특한 현실의 모순을 자체의 힘으로 극복하려는 의지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런데 1990년대를 기점으로 이러한 공동의 연구공동체가 사라진 것과 함께 창의적이고 대안적인 지식생산의 문제의식과 방법론 역시 소멸되어버렸다. 대학원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인식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모순에도 불구하고 전망을 생성시키려는 자체의 진지한 문제의식이 필요한 것은 그런 까닭이다.     
   
4. 지식인은 꼭 대학에 있어야 하나

그러나 이런 질문도 던져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지식인은 꼭 대학에 있어야 하나. 나 자신 역시 어렵게 박사과정을 졸업했고, 교수생활도 해보았고, 지금은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다. 모든 대학원생들이 거칠 것이 분명한 미래전망의 부재 때문에 학창시절 괴로워해보기도 했으며, 한국에서 인문학을 한다는 것의 무력함에 대해 오늘도 자주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면서도 과거부터 지금까지 품고 있는 한 가지 생각은 참된 의미에서의 학문하는 행위가 꼭 대학만을 거점으로 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었다. 설사 대학이 아닐지라도, 설사 경제적으로 다소 빈곤한 처지에 있다고 할지라고, 설사 지식생산과는 무관한 직업적 상황에 있다고 할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지식생산의 고유한 모델은 없을 것인가. 이런 생각을 자주 했다.

좀 어처구니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나는 세상에 내가 무언가 할 말이 있다고 생각했고, 만일 그 발언으로 인해 내 삶의 어떤 안정적인 가능성이 균열된다고 할지라도, 필요한 발언을 제도적 제약 때문에 삼가야 한다면 그건 지식인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학을 둘러싸고 있는 이런저런 방식의 제도관리시스템에 결과적으로 순응하지 않았다. 

동료들이 학진등재지에 논문을 쓰라고 할 때, 오히려 연구업적과는 무관한 문학평론을 써내려갔으며, 애착이 가는 논문을 썼더라도 엉뚱하게 비등재지 논문집에 게재하는 일을 꺼리지 않았다. 동료들이 학진의 연구공모에 응모하여 연구비를 받고, 그 과정을 당연시하거나 자랑스러워할 때, 그들을 비난하지는 않았으나 오히려 그런 과정 속에서 학문자율성이 손상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쳐보기도 했다. 

한때 바라던 대학교수가 되어 이제는 좀 안정적으로 교육과 연구를 진행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기도 했지만, 사립대학에는 흔한 재단 비리 문제로 재임용에 탈락했을 때도, 언짢은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연구자로서의 내 정체성을 훼손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책읽기와 글쓰기를 더욱 치열하게 전개시키고자 했다. 

그러면서 계속 생각했던 것이 연구자라고 꼭 대학에 있을 필요가 있나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가능할 때는 그래야겠지만, 구조적으로 그것이 제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난관에 봉착했을 때를 직감하면, 연구자들은 남들보다 빨리 다른 길을 모색해보는 것도 지혜라면 지혜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나는 왜 연구자가 되고자 하는가 하는 질문이고, 내가 왜 대학원을 다녀야 하는가 하는 명료한 인식이다. 시간에 떠밀리거나 선택을 유보당해서 그 공간에 남아있게 된다면, 연구 자율성과 독립성을 지키기는 어렵다. 시장권력조차 그런 연구자들의 불안을 먹고 자라니까. 불안을 잘 다스리는 자기에의 배려가 무엇보다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