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획

[110호] 존경과 존중 사이


배호남(중국 옌타이대학교 한국어학과 외국인교수)




대학원 내에 공고히 자리 잡은 권력 관계를 들추어보고 이를 통해 몸 속 깊이 기입된 권력의 작동을 낯설게 보고자 한다. 대학원 사회는 선생과 제자, 박사와 석사, 남성과 여성, 제단과 학생, 전임과 시간 강사, 유학파와 국내파 등 수많은 권력관계들이 고착화 된 공간이다. 이러한 고착화를 발본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결국 대학원 구성원들이 이들 권력관계에 공모하거나 혹은 이를 내재화했기 때문은 아닌지, 정치성이 실종된 대학원 사회에 대한 필자의 날 선 비판을 들어보자.

대학원 석∙박사 과정에 다니다 보면,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한 친구들로부터 부러움 섞인 푸념을 종종 듣게 된다.“좋겠다. 너는 아직 학교에 다니니까. 밖의 세상은 얼마나 힘든지…….”필자 역시 이런 말을 자주 들었다. 그때마다 마음속으로 눌러 담았던 말.‘대학원 역시 하등 다를 것 없는, 또 하나의 사회다.’ ‘대학원과 권력관계’라는 주제로 원고청탁을 받고 나서, 무슨 내용으로 글을 쓸까 고민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보고 듣고 겪은 불합리한 사정들을 하나씩 밝힐 것인가. 그랬다가 뭔가 불이익이라도 받으면 어떡하나. 게다가 이 불합리는 공공연한 비밀이나 다름없다. 대학원을 1년 이상 다닌 사람이라면, 조교 근무를 1학기 이상 해본 사람이라면, 시간강사에 오를 때까지 대학원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다 알고 있다. 이 공공연한 비밀을 대학원 신문에 글로 쓴다고 해서 얼마만큼의 반향을 얻을수 있겠는가. 이런 회의 속에서 필자는 이 글의 초점을, 대학원의 권력관계를 받아들이는 학생들의 체념적 태도에 맞추어 쓰기로 했다.

체념적 동조와 권력의 내면화

대학원은 학문 탐구를 위한 공간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공간에 권력관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학문 탐구’라는 이 숭고한 목적이 실재하는 권력관계를 은폐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권력이 존재하되 그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없다. 바로 이 지점이 대학원 내 권력관계의 모든 불합리가 시작되는 곳이다.

대학원생들의 술자리에는 안주가 필요 없다는 말이 있다. 교수들과 선배들의 뒷담화를 나누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울분은 언제나 뒷담화에 그치고 만다. 공개된 자리에서 대부분의 대학원생들은 공손한 제자나 후배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이런 이중성 밑에는 ‘괜히 나서서 득 될 것 없다’는 자기 보신주의와,‘나서서 말한들 뭐 하겠어’라는 무기력한 체념이 깔려 있다. 침묵을 통해 대학원생들은 대학원 내 권력관계에‘참여’한다. 이제 그들은 일방적인 피해자도 아니며, 무기력한 방관자를 넘어 은밀한 동조자가 된다. 대학원의 권력관계는 ‘교수일반’으로부터‘학생 일반’에게로 향하는 단순한 구조가 아니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박사과정과 석사과정, 선배와 후배, 본교생과 타교생, 남학생과 여학생 사이에 다양한 권력관계가 존재한다. 학위논문을 쓰는 선배를 위해 국회도서관에 몇 차례씩 자료를 찾으러 가야 하는 후배들이있다. 이런 개인적인 심부름이 스스럼없이 행해지는 이유는, 앞서 언급한 침묵을 통해 학생들 사이에서도 권력이 내면화되기 때문이다.‘이 정도 일 쯤이야’라는 생각 밑에는‘난 예전에 더한 일도 했는데’라는 보상 심리마저깔려 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대학원이 군대인가?

이러한 불합리를 개선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 대학원생들 스스로 침묵을 깨고‘발언’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발언은 공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개인적인 울분이나 넋두리가 아닌, 제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한 수단을 대학원생들은 이미가지고 있다. 대학원 내에 존재하는 여러 자치단체들 말이다. 대학원의 구성원은 학교(사립대학들의 경우 재단),교수, 학생이다. 대학원 총학생회를 비롯한 자치단체들은 학생들의 의견을 공적인 목소리로 바꾸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현재 여러 대학들에서 대학원생들의 자치단체는 본연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무기력한 대학원 사회, 정치적인 것들의 상실

필자가 석사과정에 입학한 1999년도에는 여러 대학원의 총학생회가 나름의 역할을 일정 부분 수행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총학생회가 각 학과나 단과대 대학원생 대표들과 지속적인 의견 교환을 나눴으며, 이런 소통을 바탕으로 학생들의 다양한 의견을 학교와 교수단체 측에 제시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대학원 총학생회의 큰 중점 사업 중 하나는 학기 초마다 진행되는 등록금 협상이었다. 짧게는 보름에서 길게는 학기 중간까지 총학생회는 지속적으로 학교 측과 등록금 인상률에 대해 협상했고, 그로 인해 무리한 등록금 인상분에 대한 철회를 이끌어내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이런 성과는 공손하고 예의바른 자세를 통해서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몇몇 대학원 총학생회는 등록금 납부 거부 운동이라는 다소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으며, 이런 선택의 배후에는 대학원생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의사개진이 있었다. 당시에도 대학원의 총회는 한학기에 한 번뿐이었지만, 필요하다면 임시 총회를 열어서 라도 대학원생들의 의견을 수렴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총회에 임하는 학생들의 태도 역시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각 학과나 단과대 대표들뿐 아니라 많은 수의 일반 학생들도 참여하여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그 결과로 학교 측으로부터 등록금 인상분의 일정 금액을 학생들의 개인 통장으로 돌려받기도 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대학원생들이 공론의 장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귀찮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대학원 총학생회가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몇몇 대학에서는 총학생회의 등록금 협상 참여가 구색 맞추기에 불과한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협상 과정에서 아예 배제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런 사정의 이유는 지금의 총학생회 임원들이 무능력하기 때문이 아니다. 총학생회가 대학원생들의 지지와 관심을 받지 못하고, 그럼으로써 그 대표성을 상당 부분상실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박사 과정 중 마지막으로 참석했던 대학원 총회의 모습이 꼭 그랬다. 각 학과나 단과대 대표자들은 더 이상 선출되지 않아 대학원 조교들이 보고자의 입장에서 참석했고, 일반 학생은 서 너 명만이 참석했을 뿐이었다. 총회를 주최한 인원과 참석 인원이 엇 비슷했던 모습은 대학원 총학생회가 그 대표성을 얼마나 상실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여러 대학원의 학술단체들은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이고 있다. 양적인 면은 물론 질적인 면에서도 뛰어난 학술특강이나 학제간 연구, 소규모 그룹 세미나에서부터 다른 대학과의 연계 프로젝트까지 다양한 기획과 지원을 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학술단그러나 학술단체의 성장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성격을 지닌다. 과거에는 총학생회의 분과 업무로 취급되던 학술단체 기획 지원은 이제 독립된 기구와 활동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럼으로써 대학원생들의 자치단체 활동을 학술적인 영역에만 국한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대학원 내 학술단체의 성장은 그 자체로는 반겨야할 일이지만, 그 성장이 다른 자치단체들의 정치적 역할을 반감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조교와 박사학위를 받지 않은 시간강사는, 대학원생이면서 동시에 학교로부터 급여를 받는 직장인이라는 이중의 정체성을 지닌다. 이 이중성 때문에 조교와 시간강사 영역은 대학원 내 권력관계의 불합리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이기도 하다. “조교는 코끼리도 냉장고에 넣을 수 있다”는 자조 섞인 농담도 있거니와, 특히 박사학위가 없는 시간강사의 처우 문제는 최근 ‘비정규직보호법’ 개정 논의와 맞물려 주요한 이슈로 떠오르기도 하지 않았는가. 필자는 조교 근무 시절, 모든 학과 조교들을 대표하는 자치단체인 ‘조교협의회’ 결성이 추진되다가 무산됐던 과정을 지켜본 적이 있다. 지금은 과연 몇 개의 대학원에 조교들만의 특수성을 대변해줄 수 있는 자치단체가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시간강사의 경우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현재 ‘한국비정규직교수노조’에 분회를 두고 있는 대학은 경북대를 비롯해 8개 대학뿐이다. 어떤 대학의 시간강사 대표단체가 위의 노조에 가입하느냐 마느냐는 그 단체의 구성원들이 상의해 결정할 문제다. 그렇지만 한 대학에 시간강사들 스스로의 대표단체가 아예 없다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은가. 그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한 논의의 장은 열어두어야 한다.

몫 없는 자들의 발언이 필요할 때
 

랑시에르는 그의 저서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에서 공동체 내에서 스스로의 권리를 갖지 못한 자들을 ‘몫 없는 자들’이라 부른다. 그는 ‘몫 없는 자들’이 권리를 찾는 방법은 공론의 장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발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대학원 내의 권력관계에서 대학원생들의 처지 역시 이와 같다. 한국의 대학 진학률이 80%를 넘어섰다지만, 대학원 진학률 역시 2000년 이후 꾸준히 증가해 왔다. 대학원 학생 수는 증가하는데 대학원생들의 권리는 줄어드는 이유가 뭘까. 대학원생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을 귀찮고 쓸모없고 두려운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몫 없는 자들’로 만들기 때문이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한다. 가르치는 분에 대한 존경은 우리의 미덕이다. 그런데 우리가 누군가를 존경할 때는 그 상대가 우리를 존중해줄 때이다. 대학원의 권력관계 속에서 학생들은 존중받지 못하면서 존경을 강요당하는 처지에 있다. 이 불합리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대학원생들 스스로의 권리와 주장을 여러 자치단체에 대한 참여와 관심을 통해 공론의 장에서 발언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