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터뷰

[111호] '건축을 묻다'의 저자 서현을 만나다

건축은 그 시대의 가치를 반영하고 사람들의 삶을 형태 짓는, 인간의 삶에 가장 가까이 있는 예술 범주 중 하나이다.「건축을 묻다: 건축, 예술을 의심하고 예술, 건축을 의심하다」는 건축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살피기 위해, 건축이 예술인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예술의 범주에 어떤 것들이 포함되는지, 즉 예술의 분류와 경계를 살핀 후 건축이 그 분류와 경계에 포함되는지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책을 진행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단지 건축 뿐 아니라 예술의 범주 및 역사적 변화 과정도 엿볼 수 있는 교양서의 역할을 한다.
.



“건축은 기능적 목적으로 공간을 만드는 예술이다.... 건축은 공간을 통해 인간의 생활을 재조직하는 작업이다.... 건축은 인간의 생활을 조직하기 위하여 공간을 조직하는 예술이다.”

● 먼저 예비 독자들을 위해 이 책의 핵심 주제는 무엇이고 어떤 사람들을 위해 쓰셨는지 간략하게 말씀해주세요. 
더불어 10년 전에 출간해 좋은 평을 받았던「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와 이 책의 공통점 내지 차이점도 부탁드립니다.


이 책은 ‘건축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요. 이는 제가 가끔 술자리에서 혹은 지금 하는 일이 무엇인지 좌표를 찾기 위해 종종 던지던 질문이고요. 책을 쓰게 된 이유는 바로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예요. 따라서 기본적으로 이 책의 독자로 상정한 사람들은 저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 즉 건축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 있든지 삼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책을 내고 보니 미학을 하는 사람들이나 문화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보는 것 같더라고요.「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와 이 책의 차이라면 바로 이 지점이죠. 이전 책의 대상이 건축에 최소한의 관심을 갖고 있는 일반 대중이었다면, 이번 책은 건축을 전문으로 하는 집단을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공통점이라면, 책 표지에도 썼지만 두 책 모두 인문학적인 접근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기존의 건축 책들에 국한하지 않고 질문에 답이 될 만한 인문학 서적들을 여기저기서 중구난방으로 호출하고 있는 것이고요.

● 건축을 설명하는 방식은 다양할 텐데, 그 중‘예술’이란 범주와 연관시켜 이야기를 시작하셨어요. 이유가 있을까요?

우선 책의 구성적 측면에서,‘건축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효율적으로 답하기 위해 제가 깔아놓은 포석은 이런 거였어요. 건축이라는 개념과, 건축과 연관을 맺고 있는 좀 더 규모가 큰 개념들이나 작은 개념들과의 관계성을 통해 답을 제시하자는 것이었지요. 그 개념들이란 예술, 기능, 구조, 테크놀로지 같은 것들이었고요. 그런데 그 중에서 특히 예술이 이야기를 풀어나가기에 적합한 개념이었어요. 예를 들어 기술로 시작하면 나머지 개념들과 함께 이야기를 풀어가기엔 부족한 점이 있는데, 예술로 시작하면 나머지 개념들과 연관을 지으며 이야기를 풀어가기에 훨씬 더 수월하다는 얘기입니다.

● 예술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범주였다는 말씀이신데,‘예술’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인간이 가진 상상력의 한계, 그 지평을 넓히는 역할을 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가치가 없다면 예술이 아니지요. 예를 들어‘패션이 예술인가’라고 물었을 경우, 상상력의 한계를 확장했다면 그것은 예술이라고 할 수 있어요. 가령‘이세이 미야케(三宅一生,Issey Miyake)’가“패션의 가치는 신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옷감에 있다.”,혹은“신체는단지 texture를 가진 옷감을 걸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말을 통해 패션이 작품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의 전환을 갖게 했다면, 이때 이세이 미야케는 예술가라고 불릴 수 있어요. 다시 말해 예술의 가치는 딱 하나, 우리 상상력의 지평을 넓혀주는 것이고 그랬다면 그것은 예술이에요. 그렇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한‘쟁이’의 취미생활 혹은 직업에 머무르는 것이겠지요.

● 건축의 역사를 인문학적 지식과 함께 설명하시면서 많은 철학자와 건축가들을 소개하셨는데요. 
그 중 특히 좋아하는 인물이나 독자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인물이 있나요?

건축가‘르코르뷔제(Le Corbusier)’입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건축가라고 생각해요. 사실 그가 중요한 건축가라는 사실은 누구나 동의하지만 이 사람이 건축사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갖는지에 대한 가치판단은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 르코르뷔제는 수많은 건축가들 중 조금 뛰어난 건축가 정도가 아니라 기원전부터 지금까지의 건축가들 중 가장 위대한 단 한 명의 건축가라 생각해요. 제가 이런 확신을 갖는 이유는 그가 건축의 근본을 바꿨다고 평가하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음악에서 베토벤처럼 말이지요. 모짜르트 등 이전 시대까지의 음악가들은 그저 고용된 존재였던 반면 베토벤은 인쇄소를 통해 자신의 새로운 생존방식을 개척했어요. 또한 음악이 예쁘고 좋은 소리만 내는 것이 아니라 폭력적이고 압도적인 방식을 통해서도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음악에 새로운 존재가치를 부여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건축에서 르코르뷔제가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건축가는 건축주를 위해 집을 지어주는 사람이었는데 르코르뷔제는 건축가들에게“당신들은 앞으로 이런 세계에 살아야 됩니다.”라고 큰 목소리로 이야기했고, 또 그것을 구체적인 건물과 계획안을 통해 보여준 첫 번째 사람이었단 말이지요. 쿤의 표현대로라면 패러다임을 바꾼 사람이고, 패러다임을 바꾼 사람을 천재라고 한다면 가장 위대한 건축의 천재는 르코르뷔제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거죠. 그 정도로 건축의 가치를 바꾼 사람은 없었다고 봐요.

● 책 내용이 한국의 예들 보다는 유럽의 역사와 건축물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이유는 오늘날 한국의 건축이 일본과 미국을 거쳐 전해진 유럽 양식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겠고요. 
 그렇다면 한국의 건축양식에 대한 평소의 입장은 어떠신가요?

한국이라는 문화적 공동체가 어떤 건축을 이루었고 또 앞으로 이룰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관점은 일반적으로 두 개의 상반되는 방식이 있다고 봐요. 하나는 과거 지향적인 방식인데, 우리의 한옥은 어떻게 생겼었다는 식의 설명이지요. 그리고 두 번째는 현재 진행형인 방식인데, 현재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더 강조하는 입장이에요. 저는 이 둘 중 현재 진행형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어요. 현재의 한국 사회는 서양과도 다르지만 과거의 조선 시대와도 분명 다르기 때문이지요. 물론 현재 한국 사회가 허공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적어도 한국의 전통적 양식이나 서양의 양식을 잣대로 현재의 한국 건축을 들여다보는 것은 한계가 뚜렷해요. 대표적인 예로 아파트, 찜질방, 노래방, 러브호텔, 예식장 등이 있어요. 이들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한국만의 독특한 건축 현상이에요. 현재 한국 사회와 연관시켜야만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건축물들이라는 거지요.

● 책에도 그러한 예들이 몇 가지 등장합니다. 대표적으로 어떤 건축 양식이 있을까요?

찜질방을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서양의‘room’은 벽을 통해 구분이 되는 반면 한국의‘방’은 벽 없이 바닥만 있으면 되지요.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는 유일한 요소는 신발을 벗느냐 신고 있느냐고요. 이처럼 서양의‘room’은 벽을 통해서 구분되기에 그 안에서 어떤 기능이 실현되는지에 따라 다시 구분됩니다. 손님을 맞는 방은 응접실이라는 식으로요. 그런데 한국은 전통적으로 그냥 방이 있고 그 안에는 여러 기능들이 혼합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같은 방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자고 고스톱도 치는 식이지요. 이것이 한국의 전통적인 공간 구성 방식이에요. 찜질방 역시그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규정되어 있지 않아요. 그 안에선 독특한 공동체가 형성되지요. 찜질방을 혼자 가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거예요. 항상 몇 명이 모여서 가는데, 거기서 밀도가 높아지면 모르는 사람 옆에서도 마음대로 자고 사람을 그냥 넘어 다니고, 옆에 있는 사람이 10분 전에 베고 있던 베개를 그냥 가지고 가서 베는 식의 행동들을 해요. 저는 이것이 한국 사회의 농경사회 공동체가 찜질방이라는 건축 양식을 통해 재조합된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즉
서양의 어떤 사회에서도 일본에서도 불가능하고 오직 한국에서만 구현이 가능한 건축 양식이라는 거지요. 그리고 한국이 제안한 이 새로운 건물 양식을 외국인들은 매우 신기하게 바라보고있고요.

● 도서관, 학교, 은행, 시장, 아파트, 부엌 등에 대한 상반되는 배치의 예들이 나옵니다. 
그 중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훈육으로 이루어지는 학교와 토론으로 이루어지는 학교의 건물배치가 분명한 차이를 갖는다는 점인데요. 한국의 교육 공간 배치에 대한 의견은 어떠신가요?

학교 건물 배치에 있어서 한국은 그 태생이 비극적이에요. 병참기지의 한 부분으로 잠재적인 병력을 양성한다는 것이 오늘날 학교의 모습을 구성하게 된 시초이지요. 지금 학교의 모습들도 병참기지와 썩 다를 것이 없어요. 새로 짓는 학교 건물들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고 해도 여전히 교실이 있고 한쪽에 복도가 있고 벽 옆에는 운동장이 있어야 해요. 건축은 변화하고 있지만 21세기의 학생들을 포용하기에 한국의 초/중/고등학교 건물들은 여전하지요. 그래서 저는 학교 공간이 건물들이 마구 흩어져 있는 형태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견 불가능할 것 같지만 가능합니다. 다만 가장 큰 문제는 운동장이 좁아지거나 없어진다는 점인데요. 한국에는 학교에 축구 같은 운동을 할 수 있는 큰 운동장이 있어야 한다는 선입견이 있어요. 물론 운동장이 있으면 좋지요. 하지만 운동장이 조례 등 일방적인 훈육이 주로 이루어지는 공간이자 전체주의적 인간을 양성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는 공간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운동장은 포기될 수도 있겠죠. 이처럼 운동장 문제가 해결되면 학교의 교실들을 마구 흩뿌려 놓는 것이 가능하고 또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건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역사와 사회가 무엇인가라는 근원(arche)에 대한 성찰의 결과를 구조체(tecture)로 만든 것이 건축(architecture)이다’라는 답을 제시하셨습니다. 이 답에는 인간과 건축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녹아있는데요.

그때의‘인간’은 한 개인이 아니라 개인들이 연관을 맺고 있는 조직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학교는 학생들이 모여 있는 조직이고 집이라면 가족이 모여 있는 조직이에요. 그런데 조직이 방이란 공간을 통해 특정한 방식으로 나뉘어 표현된 것이 바로 건축입니다. 인간의 조직이 무작위로 조직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들이 생활하는 방들도 무작위적으로 조직되어 있지 않을 테고, 그렇다면 방이 조직되어 있는 방식이 사회가 조직되어 있는 방식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을 테지요. 나아가 인간의 조직이 비합리적일 경우 방의 조직을 적절히 배치하면 인간의 조직을 적절히 조정하는 것도 가능하리라는 신념이 생길 수 있고요.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가령 제가 있는 한양대학교 건축과 대학원 방들은 교수의 방과 대학원생들의 방이 붙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그래서 교수들은 자신들의 방문이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학생들의 방을 거쳐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지요. 이것은 교수가 들락날락하면서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지 하지 않는지를 감시하고 통제한다는 것과 한양대학교의 교수-학생의 관계가 도제식 관계라는 것을 보여주는 예에요. 즉, 사람 사이의 관계가 공간을 사용하는 방식에 의해 구현되어 있는 거지요. 하지만 저는 그런 관계를 그다지 원치 않았어요. 학생들이 언제 학교에 오고 나가는지 별 다른 관심이 없고 단지 학생들이 원할 때 찾아와서 이야기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대학원생들의 방은 제 방에서 멀리 떨어진 끝 쪽에 위치해 있어요. 제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저와 학생들의 관계가 저와 학생들이 방을 사용하는 방식에 의해 표현되어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방식이 확장되어 조직되면 건물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리하면, 인간과 건축의 관계는 공간을 사용 하는 방식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고, 거꾸로 방이 조직되어 있는 방식을 재조립할 경우 인간 사이의 관계도 재조정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리고 이는 건축이 사회적 책임을 자임할 수 있다는 의미도 되고요.

● 건축의 사회적 가치를 말씀하셨는데요. 그렇다면‘청계천’이라는 공간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청계천은 원체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가치를 판단하기가 곤란한 점이 있어요. 일단은 더 무거운, 더 가벼운, 더 빠른 것 등이 최고의 가치인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의 전환이 도시를 통해 구현된 좋은 예라고 생각해요. 청계천 복원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할 아무런 이유가 없지요. 물리적으로 음지였던 공간을 양지로 만들었다는 것은 상당히 큰 가치가 있는 거니까요. 다만 그 과정에서 사회적 음지에 있던 사람들이 사회적 양지에 같이 등장하지 못하고 계속 음지로 밀려나가는 상황은 아쉽지요. 예를 들어 청계천에 있던 상인들이 동대문이나 장지동으로 이전을 했는데, 재정착률이 10%도 안 된다는 건 이 사업이 음지를 양지로 바꾸는 데 실패 했고 단지 양지에 있던 사람들의 영역을 좀 더 확대 재생산하는 정도로 끝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게끔 해요. 그리고 사업이 지나치게 과시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 그래서 펌핑을 통해 물을 흘려보내고 있다는 점은 아직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고요.

● 독자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마지막으로 부탁드립니다.

서강대에는 건축과가 없기 때문에 아마 이 책을 통해 건축에 관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독자는 실패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봐요. 다만 일반 독자들 중 이 책에서 얻어갈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전공이 무엇이죠? (커뮤니케이션입니다.) 그렇다면‘커뮤니케이션이 무엇인가’에 대해 술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겠지요. 그러나 커뮤니케이션이란 이것이다 라고 답을 내리려 하면 아마 대부분 실패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하지만 이 방법을 쓰면 틀림없다고 봐요. 커뮤니케이션과 관련을 맺고 있는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몇 가지 개념들 사이에서 연관성을 찾는다면, 커뮤니케이션을 정의할 수는 없지만 커뮤니케이션을 파악할 수는 있을 거예요. 우리가 커뮤니케이션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이유는 정답을 표현한 한 문장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 부딪혔을 때 가치 판단을 할 수 있는 가치관을 정립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런 질문에 부딪혔을 때 커뮤니케이션이란 개념 하나만 문제인 경우는 없지요. 언제나 그와 관계된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연관 속에서 문제가 생길 거예요. 따라서‘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구체적인 방식을 이 책에선 건축이라는 주제를 통해 제안했다고 생각하고 책을 읽으시면 될 것 같아요. ‘생각의구조’를 제안한 것이라고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인터뷰 곽경윤 객원기자 / 정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