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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111호]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의 저자 엄기호를 만나다

신자유주의 질서가 모든 일상의 영역에 깊숙이 스며든 지 오래다. 하지만 과연 주어지고 강요된 삶의 양식이 얼마나 의문시 되고 있을까. 생존에 대한 공포와 변혁에 대한 냉소 사이에서, 다른 사유와 다른 삶의 가능성들은 조금씩 침식당하고 있다.「아무도 남을 돌보지마라」의 저자 엄기호에게 한국의 신자유주의적 삶에 대한 진단과 그가 생각하는 사유와 실천의 관계를 들어보았다.



“2000년 이후 내가 보아 온 이들의 마음은 누구할 것 없이, 몰락에 대한 공포와 타인에 대한 차가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많은 사람이 이제 우리는 탐욕스런 욕망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진단했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탐욕의 이면을 지배하고 있는 힘은 몰락에 대한 공포였다.”


● 국내외에서 수년간 활동가로 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신자유주의 질서에 대해 나름의 문제의식을 갖고 책을 쓰셨을 것 같은데요.

제가 한국에 돌아와서 처음 맡게 된 일이‘하자센터’라는 대안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였어요. 자연히 새로운 페다고지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요. 지금까지 소위 비판적 페타고지라고 불리던 방법론은‘see-judge-act’,즉 사회 현실을 보여주고 비판적으로 판단하도록 한 후 행동을 촉발시킨다는 도식이었어요. 그런데 이러한 방법론이 지금은 처음부터 삐걱거려요. 아이들이 부조리하거나 불평등한 상황 자체를 외면할 뿐만 아니라 그런 상황을 보고도 비판적 의식을 갖지 않는다는 거죠. 강준만 선생님의「사람들은 왜 분노를 잃었을까」라는 책의 제목처럼요. 비판적 진영의 사람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어요. 비참한 현실을 보여주면 응당 분노해야하는데 분노하지 않으니까요. 요즘 아이들이 보수적이라는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에요. 그런데 애들이 단순히 보수적이어서 그럴까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왜 안 보려고 할까. 과연 안 보려고 하는 걸까 아니면 제대로 된 것을 못 보여주는 걸까라는 의문을 품게 된 거죠.

그래서 분노하지 않는 아이들은 어떤 감정과 감수성을 갖고 있는지 세세하게 짚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이 후 애들을 관찰하며 얻게 된 결론은, 비참하고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상황을 보며 느끼는 감정이 분노가 아니라‘공포’라는 것이었어요. 예전에는‘나는 저렇게 안될 거야’라고 생각하니까 분노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나도 얼마든지 저렇게 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드니까 분노보다는 먼저 공포감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예전 방식의 페다고지는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죠. 따라서 새로운 페다고지를 계발하기 위해서라도, 이 공포의 실체는 무엇이고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나아가 신자유주의라는 체계가 어떻게 지속적으로 공포를 확대∙재생산하며 사람들을 포섭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현실이 그처럼 절박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 어느 때보다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자유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봐요. 모든 가치는 도착될 가능성이 있거든요. 자유뿐만 아니라 평등, 정의, 사랑 등등 소위 말하는 대의라는 것들 모두요. 어떤 면에선 지금 신자유주의 사회는 자유가 너무 넘쳐나요. 물론 그렇다고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 자유라는 것이 어떤 자유인가, 도대체 어떤 형태로 도착되어 있는가를 따져봐야 한다는 말이에요. 신자유주의에서 자유의 핵심 논리는 이런 거예요.‘너희 모두는 자유롭다. 그러니 너희가 책임지고 잘 선택해라.’이처럼 자유는 관념적이고 형식적이며 즉각적으로, 다시 말해 선험적으로 주어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선험적으로 주어진 자유 속에서 사람들이 얻게 되는 것 혹은 감당해야 하는 것은 자유에 대한 책임, 선택에 대한 책임뿐이에요. 자유가 선택의 문제가 되어버리면 선택에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파편화된 개인들만 남을 뿐, 공동체는 붕괴해 버리고 말아요. 전통적으로 자유는 인간의 권리, 즉 Human Rights 중 하나였어요. 여기서 인간이란 Human, 다시 말해 인류라는 공동체지요. 그런데 자유가 선택의 자유로 국한되면 Human은 Individual 로, Rights는 Responsibility로 바뀌게 됩니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는 자유라는 이름하에 모든 실패와 탈락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개인이 짊어지게 만드는 시대라는 거예요.

● 그것이 ‘사회적 비용의 외부화’ 내지 ‘자기계발의 강제’로 가시화 되고 있는 듯합니다.

상황은 이렇습니다. 예전에는 자본가의 파산은 자본가가 투자를 잘못해서 일어난, 즉 자본가 개인의 실패였어요. 노동자들이 대량으로 해고되는 것도 예전에는 사장이나 회사가 잘못했기 때문이지 노동자들의 잘못은 아니었거든요. 반면 지금은 구조조정으로 노동자가 쫓겨나면서도 오히려 노동자의 책임이라고 이야기되는 시대예요. 단적인 예가 쌍용자동차 사태입니다. 그 상황에서 몇몇은 쫓겨나고 또 몇몇은 안 쫓겨났어요. 그런데 쫓겨난 사람에게 쏟아진 비난들을 보면 그동안 업무를 잘하지 못해서, 자기계발을 안 해서, 그러므로 남을 자격이 없으니 당연히 쫓겨나야 된다는 식의 논리예요. 운영을 잘못한 회사의 잘못도 아니고 일정부분 책임이 있는 정부의 잘못도 아니고 바로 쫓겨난 사람의 잘못이라는 말이에요. 실직에 대한 궁극적 책임이 이젠 노동자 개인에게 전가된 겁니다.

●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세종시를 보면 기득권층의 이권은 유지하되 나머지 계층은 철저히 배제하는 양상이 엿보입니다.

근대국가가 작동했던 방식은 크게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가 비스마르크식 통치인데, 그 핵심은 국가전체를 철저히 관료제화해서 국민들 중에 소외층이 없게 만들겠다는 것이에요. 누구든지 한 자리씩 차지하게끔 몫을 나누어 주겠다는 것이고, 나아가 이를 통해 혁명을 막으려 했던 겁니다. 애초에 지방 균형발전 차원에서 제기된 세종시 건설 논의도 어떻게 보면 남한 사회 내에 소외되는 사람이나 지역 없이 떡고물을 나누어주겠다는 비스마르크식 통치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걸 도로 백지화 하겠다는 말은 근대국가의 두 번째 선택항, 즉 신자유주의적 전략을 택하겠다는 뜻이에요. 살아남은 사람은 같이 가는 거고 도태되는 사람은 어쩔 없다. 덧붙여 도태되는 것은 전적으로 그들 잘못이라는 전략이니까요.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성채를 만들고 그 바깥은 사람이 죽든가 말든가 내버려두는 건데, 저는 이런 면에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자본주의 초창기로 회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부르주아가 성안의 사람을 의미했던 그 당시로요.

● 배제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는‘국가’내지‘국민’등의 총체성을 겨냥하는 수사가 동반되고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입니다.

우리 가족이 생존하면 우리 마을이 생존하면 우리 민족이 생존하면 나도 생존한다. 이게 상상의 공동체의 핵심이에요. 황우석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고 올해 초 WBC나 김연아 현상도 일정부분 그 연장선상에 있어요. 물론 이러한 현상은 그만큼 위로가 필요한 시대라는 방증이기도 해요. 사는 게 피곤하니까 영웅을 찾게 된다는 말이지요. 이런 걸 볼 때 저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10년, 20년 전으로 돌아간 정도가 아니라 200년, 500년 전으로 돌아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헤겔「법철학」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근대국가가 출현하면 영웅은 소멸한다고요. 영웅은 특수한 의지를 가지고 보편을 감당하는 존재인데, 근대국가의 출현 이후에는 국가 자체가 보편적 의지와 이성을 대표하기 때문에 영웅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지요. 그런데 현재의 상황은 반대에요. 요즘 누가 국가를 믿습니까. 대한민국이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국가가 나를 책임져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가 국가가 아닌 영웅을 찾게 되는 이유예요.

●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것 역시 그런 심리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나요?

그건 또 다른 이야기예요. 물론 김연아나 박태환 같은 인물들을 영웅시하면서 삶의 위안을 얻는 측면이 있어요. 하지만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건 좀 달라요. 앞서 대의가 무너진 시대라고 말씀드렸지요. 대의를 안 믿는 시대의 핵심이 뭐겠어요. 우리 모두가 속물이라는 거지요. 너도 속물 나도 속물 대의를 말하는 놈들도 다 속물. 그런데 이명박은 뭐냐. 속물의 왕인 거예요. 영웅은 남을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 자신의 이해와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다시 말해 이명박이 뽑힌 이유는 그가 영웅이라서가 아니라 대의가 죽은 시대에 이명박이야말로 너무 솔직하게 스스로 속물임을 드러내었기 때문이지요. 저런 속물이 대통령이 되면 노무현이나 김대중처럼 되지도 않는 대의를 말하면서 우리를 피곤하게 하지 않을 거다, 속물이니까 속물의 욕망을 만족시켜줄 수 있을 거라고 사람들이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제가 보기에 이명박이 국가니 민족이니 이런 대의를 얘기 안하고 오히려 굉장히 속물적인 말을 하면 할수록 인기가 올라갈 거예요. 사람들이 그걸 하라고 뽑아준 거니까요.

● 신자유주의의 키워드 중 하나가‘생명정치’입니다. 신종플루 사태도 이와 관련되고요.

아감벤의 생명정치 논의에서 생명은 생물학적 생명과 사회정치적 생명으로 나뉩니다. 그런데 속물들이 바라는 것은 사회정치적 생명을 풍요롭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에요. 먹고 마시고 쓰고살자. 나의 생물학적 생명을 보장해 달라. 이게 속물적인 사유지요. 이 정권이 실패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 생물학적 생명을 지켜주는 것마저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에요. 신종플루 사태만 보더라도 한국은 통치의 무능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어요. 타미플루를 확보하는 등의 실질적인 대응은 찾아볼 수 없고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캠페인뿐이라는 거지요. 그런데 또 그 캠페인의 면면을 살펴보면 어떤가. 이건 제가 직접 경험한 건데, 민방위 훈련에서 사람들을 연병장에‘모아놓고’신종플루를 조심하라고 훈계하는 식이라는 거예요. 정말 상식도 없는 정권인거죠. 당연히 지지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사람들은 자신을 고상하고 교양 있는 존재, 사회정치적인 생명으로 만들어 주기를 바라지도 않아요. 이 정권에 바라는 것은 속물적인 욕망을 충족시켜 달라는 것, 생물학적 생명을 보호해달라는 것인데 이것조차 충족 시켜주지 못하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이 정권이 신자유주의조차도 못 되는 정권이라고 판단하고 있어요. 큰 틀에서보면 신자유주의적 정권인데 운영해 나가는 방식을 보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정권인 거죠.

● 통치의 무능을 드러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생명을 배제하는‘통치의 군사화’전략만은 탁월하게 발휘하고 있거든요. 용산사태가 그렇고요.

맞습니다. 국민을 다스린다는 의미에서 보면 웃기지도 않는 정권인데 빈민, 이주 노동자, 사회운동 등의 세력들과 싸울 때는 너무나 신자유주의적이에요. 미국에서 신자유주의가 득세하게 된 역사적 맥락을 봐도 이주노동자와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이 포함되어 있어요. 이처럼 신자유주의는 적들을 사회 밖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 찾는 게 특징이죠. 한국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 질서와 개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국가는 내부의 사회운동에 대해서 대단히 폭력적인 방식을 취하고 국민은 이런 방식에 암묵적으로 동의해요. 속물들이 지켜지길 원하는 질서란 결국 사유 재산의 보장, 즉 경제 질서이고 국가는 그게 지켜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한 방식으로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에요. 즉 현재의 처벌 메커니즘은 개인을 훈육하는 차원을 넘어 처벌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사람들마저도 훈육하는 방식인 겁니다. 쌍용차 문제가 그런 식으로 결론이 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도 그 이전에 용산 사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용산 사태를 보고 정말 죽을 수도 있구나, 정말 죽이는 구나라고 느끼게 됐다는 말이에요. 이처럼 가혹한
처벌을 공시하면서 사람들을 길들이는 방식은 푸코의「감시와 처벌」1장에 기술되는 처벌방식이에요. 자본주의가 초창기로 회귀한 것처럼 처벌 역시 훈육사회 이전으로 돌아간 셈입니다.

● 결국 새로운 페다고지의 구축이 시급해질 수밖에 없는데요. 그렇다면 이를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가장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의 좌파가 대단히 소비적이라는 점이에요. 좌파 내지 진보라고 하는 사람들이 글을 쓰는 행위를 보면 생산적이지가 않아요. 우리의 현실을 새롭게 이해하는 사유와 태도를 촉발시키기보다는 서구나 제 3세계의 이론을 수입하는데 급급하다는 겁니다. 들뢰즈의「대담」이라는 책엔 이런 내용이 있어요. 들뢰즈는 본인의 책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하는 사람이 제일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해요. 왜 자신의 책을 두세 번 읽으면서 이게 맞는지 안 맞는지를 따지고 있느냐, 내 책은 그냥 한번만 읽고 새로운 감흥과 영감이 떠오르면 그걸 발판으로 삼아 새로운 걸 시작하면 된다는 얘기거든요. 저는 우리나라의 좌파나 진보라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기억해야 되는 게 이 지점이라고 봐요.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영감을 학생들 혹은 독자들에게 촉발시키고 있는지 자문해 봐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질 않으니 페다고지가 안되죠. 좌파지식인들의 핵심 역할은 새로운 앎, 새로운 인식, 새로운 실천, 새로운 반성 등을 촉발하고 격려하는 것임에도 말이지요. 그래서 제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어떤 좌파지식인 이든지 간에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영역, 저 같은 경우엔 수업을 하는 강의실이‘로두스’니까 거기서 치열하게 뛰어야 된다는 겁니다. 자기 학생들도 설득을 못하는데 누구를 설득하겠어요. 그 곳에서 생산 그리고 생성을 해야 되는 거지요.

● 마지막으로 인문학적 사유와 실천에 대한 의견 부탁드립니다.

20대 대학생들이 신자유주의 사회의 모순을 잘 몰라서 문제가 일어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떻게 보면 너무 잘 알아서 문제고 그래서 냉소주의에 빠지는 거지요. 김대중 노무현 10년을 거치면서, 해봤자 소용없고 진실은 타락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이미 체감했다는 말이에요. 저는 이 시대에 사유를 하는 것은 모르는 것을 아는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그보다는 나의 앎이 어떤 태도를 만들어내고 있는가를 되짚어보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런 태도야말로 내가 지금 어떤 방식의 삶을 살고 있는지 묻게 되는 동시에 앎 너머를 사유하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대안이 없지는 않아요. 따지고 보면 대안들은 너무나 많죠. 그런데 그 수많은 대안들이 대안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지금의 태도들이 그것들을 시답잖게 보도록 만들기 때문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사유가 문제가 아니라 실천이 문제라고 말하는데, 현재의 앎과 태도 자체를 의문시 하지않는 한 아무리 새로운 대안과 실천이 제시되더라도 다시 냉소주의에 포획될 수밖에 없어요. 따라서 대안이 마치 도달 불가능한 먼 곳에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는 냉소주의에서 벗어나 지금 존재하는 이 대안들을 대안으로서 바라보는 태도를 촉발하는 것이 핵심적인 사안인 거죠.

인터뷰 곽성우 / 정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