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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111호] 에로스의 에토스, 혹은 경계의 심연에 뛰어든 자들을 위한 엘레지

 

한보희 (연세대 비교문학 강사)


티모시 트래드웰이라는 남자가 있었다. 곰을 너무나 사랑했던 이 남자는 매년 여름 알래스카 국립공원 내 회색곰 서식지에 무단으로 들어가 몇 달씩 곰들과 함께 살았다. 그는 ‘친구’이고 ‘이웃’이었던 여우와 곰들에게 이름을 붙여 말도 걸고 함께 놀기도 하면서 태초의 인간인 아담을 흉내 냈다. 한때 배우를 꿈꿨던 트래드웰은 곰들과의 생활을 셀프카메라로 찍어 사람들 앞에 내놓았고, 이내 유명인사가 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야단스러운 자기현시, 일종의 쇼였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처음 시작될 때는 그런 기미가 보인다. 그러나 이 괴짜 환경보호운동가의 ‘곰들과 함께 춤을’이 13년 만에 끔찍한 비극으로 막을 내렸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쇼일 수가 없었다. 2003년 가을, 트래드웰은 여자친구와 함께 다시 알래스카를 찾았고, 자신의 낙원에서 곰의 습격을 받았다. 공원관리인은 텐트 주위에서 두 사람의 찢겨진 신체 일부를 찾아냈고, 사살된 곰의 뱃속에서는 티모시의 손목시계가 나왔다.

뉴저먼 시네마의 명장(明匠) 베르너 헤어조크(Werner Herzog)가 이 특이한 사건에 사로잡힌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트래드웰이 남긴 수백개의 비디오테이프와 주변인물 인터뷰를 교차 편집해 완성한 헤어조크의 <그리즐리 맨 Grizzly Man>(2005) 포스터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자연에는, 경계가 있다. 한 남자가 그 경계를 가로지르는 데 13년의 생애를 바친다.”

헤어조크는 넘지 말아야 할 경계, 또는 한계상황에 빠져들어 자멸해가는 자들을 다뤄왔다. 대표작 <아귀레, 신의 분노>(1972)는 16세기 스페인의 정복자 아귀레가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리며 안데스산맥을 넘고 아마존 강을 거슬러, 마침내 밀림 속으로 소멸해가는 이야기다. 아귀레는 복귀를 명하는 상관을 죽이고 부하와 원주민들을 무의미하게 희생시키며, 마치 불로 뛰어드는 나방처럼 죽음을 향해 돌진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귀레는 원숭이 떼로 뒤덮인 뗏목에 홀로 남아 광기어린 눈빛을 번뜩이며 이렇게 외친다. “나는 신의 분노다!”

아귀레의 분노는, 동일한 모티브를 가진 조셉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연Heart of Darknese'에 나오는 정복자 쿠르츠의 마지막 대사 “무섭다, 무섭다horror, horror…”와 함께 읽어야 한다. 요컨대, 분노의 이면은 공포이며, 원숭이와 신 ‘사이’에 놓인 인간 아귀레는 ‘신의 분노’이자 ‘원숭이의 공포’이다. 카메라―신의 응시(gaze)―가 패닝(panning)기법으로 뗏목 주위를 조롱하듯 빙글빙글 돌 때, 아귀레는 갑옷과 투구를 걸친 ‘특이한 원숭이’처럼 보이며 ‘자연’이라는 육체와 ‘신’이라는 영혼으로 갈라진 세계의 간극을 형상화하는 아귀레(클라우스 킨스키)의 광기어린 눈빛은, 갈라진 두 힘 의 긴장을 소용돌이치게 하는 중심에 자리한다. 이런 맥락에서, 곰(자연)과 인간(문명)의 경계에 자신의 생을 풀어놓았던 트레드웰은 또 다른 아귀레였다.

사람들은 트래드웰이 안전수칙을 무시한 대가를 치렀으며, ‘죽으려고 환장했던’ 트래드웰의 삶은 그에 어울리는 죽음을 갖게 됐을 뿐이라고 쉽게 결론짓는다. ‘곰과 사람 사이에는 경계가 있다. 그 경계를 함부로 침범하면 안 된다. 그건 곰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곰의 본성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트래드웰은 동물사랑이나 자연보호를 빙자해 곰의 세계에 침입한 불청객이었다. 그가 곰에게 쏟은 사랑도 실은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실패자의 뒤틀린 자기애였을지 모른다. 그보다는 곁에 있다 애꿎은 죽음을 당한 여자친구가 동정의 대상이 될 만하다. 저나 죽을 것이지 여자친구까지 사지로 끌어들인 트래드웰의 무모함은 도덕적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맞는 얘기다. 헤어조크는 트래드웰에 대한 세상의 비난을 반박하지 않으며 그의 감상적 동물애호에 동조하지 않는다. 함께 동물보호운동을 했던 동료들조차 점점 종교적 신비주의에 빠져드는 그를 걱정했었다. 그의 비극적 죽음은 ‘올 것이 오고야만’ 것이었고 그가 남긴 마지막 비디오들을 보면 누구보다 자신이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곰은 곰, 사람은 사람’이 트래드웰 사건이 남긴 교훈의 전부일까? ‘곰의 것은 곰에게, 사람의 것은 사람에게!’라는 이 안전한 경계가 마지막 진리일까?

헤어조크는 이 괴짜가 남긴 촬영물들이 직업적 자연다큐 작가들이 찍은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을 알아본다. 그것은 훨씬 더 생생하고(곰들이 싸우며 똥을 지리는 장면), 훨씬 더 아름다우며(여우와 곰과 트래드웰이 함께 노니는 풀밭 장면) 한층 더 슬프다(숫컷 곰들이 잡아먹은 새끼곰의 뼈를 발견한 트래드웰이 새끼곰의 이름을 부르며 오열하는 장면). 왜 그럴까?

어느 해 여름 가뭄이 들어 강의 수위가 낮아지자 연어 떼가 곰 서식지까지 올라오질 않았다. 연어는 곰의 주식 중 하나다. 트래드웰은 라디오에서 비가 올 확률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난생 처음 신께 기도를 드린다. 비가 오지 않아 사랑하는 곰들이 죽어가고 있으니 제발 비를 좀 내려달라고. 애원으로 시작한 기도는 협박으로 바뀌었다가 분통을 터트리며 발광을 하는 몸부림으로 이어진다. 다음날 새벽, 놀랍게도, 기상예보에 없던 폭우가 오직 그 지역에만 쏟아진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아니면 기적적 은총이었을까? 헤어조크는 단정 짓지 않지만, 거기서 트래드웰의 영상이 지닌 독특한 아름다움과 생동감의 비밀 한 자락이 살짝 드러난다.

직업 작가들이 찍은 영상에서 자연과 동물들은 타재적(他在的) 대상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카메라와 피사체의 경계는 확고부동하다. 그러나 트래드웰의 카메라는 그의 삶과, 또한 그가 속한 세계와 일체가 되어 돌아간다. 그 세계는 주관적 욕망의 투사(投射)가 아니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허물어진, 실재하는 꿈의 자리로 화한다. 트래드웰의 ‘곰들과 함께 춤을’은 여기서 쇼에서 삶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쇼인 채로 그의 삶이 된다. 삶이 오직 신만을 관객으로 하는 연극(‘쇼’)이라면, 신도 배우가 되는 트래드웰의 영상에서는 삶과 쇼의 경계가 사라진다. 

에로스의 에토스, 혹은 ‘더불어 삶’의 심연
  

나는 이 영화를 EBS의 국제다큐영화제에서 보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올해 이 영화제의 표제는 “지구, 더불어 사는 곳”이었다. 그리스어 에토스(ethos)는 보통 윤리(ethics)로 번역되지만 원래는 서식지(habitat, ‘사는 곳’)를 뜻했다. 곰의 서식지에 들어가 곰을 사랑하다 곰의 먹이가 된 남자의 ‘에토스’는 무엇이었을까? 사람을 잡아먹기도 하는 곰과 기꺼이 함께 살고자했던 이 사람의 ‘서식지’(ethos)는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같은 영화제에서 상영된 곤잘로 아리온 감독의 <안데스산맥 조난기Stranded: I’ve Come from a Plane That Crashed on the Mountains>(2007)에 우연찮게도 이 문제를 푸는 실마리가 들어있었다. 이 다큐는 1972년 비행기 추락사고로 안데스산맥에 조난(stranded)되었다가 극적으로 생환한 사람들의 회고담이다. 눈과 바위로 뒤덮인 고립무원의 산악지대에서 45명의 탑승객 중 16명이 기적적으로 생환했다. 그런데 그들이 구조된 직후, 자연스럽고도 난처한 질문이 제기됐다. 풀 한 포기 없는 혹한의 오지에서 어떻게 70일 넘게 살아있을 수가 있었는가? 도대체 뭘 먹고 살아남았나? 영화는 당시의 기자회견 장면을 보여준다. 한 생존자가, 모두가 예상했지만 누구도 감히 직접 듣기를 원할 수 없었던 바로 그 답을 일러주었다. 인육! 사람이 (비록 시체였다고는 하지만) 사람을 뜯어먹고 살아남았던 것이다. ‘생존의 윤리냐, 윤리의 생존이냐?’, ‘야만이냐, 문명이냐?’ 대혼란의 심연에 기자회견장이 삼켜져버릴 듯한 위기의 순간에, 마치 이런 때를 위해 존재해왔다는 듯, 성자 예수가 나타나 그들 모두를 구원했다. 생존자는 인육을 먹었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최후의 만찬’을 묘사한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 “받아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이것을 다 마시라,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리하여 생존자들은 사람고기를 뜯어먹고 생명을 부지한 ‘괴물들’이 아니라, 친구들이 전해준 마지막 선물(살과 피)로 자신의 생을 이어간 ‘인간들’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같은 사태를 그럴싸한 미문으로 다르게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최후의 만찬이란 그저 말의 성찬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트래드웰이 곰의 ‘특별한 저녁식사’에 자기 육신을 공양했을 때, 곰은 ‘최후의 만찬’에 참석했던 예수의 제자들이 그랬듯이, 그의 메시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적어도 헤어조크는 그렇게 믿는다. 트래드웰은 웬일인지 죽기 며칠 전부터, 자신을 잡아먹게 될 늙은 회색곰을 집요하게 카메라에 담았는데 헤어조크는 화면에 잡힌 곰의 무심한 눈동자―그 황갈색 심연(!)―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저 눈에서 그저 먹이를 바라보는 권태로움밖에 볼 수 없는데, 티모시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트래드웰이 그 눈동자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눈이 영혼을 들여다보는 창일뿐만 아니라 영혼을 비춰보는 거울이기도 하다면, 트래드웰이 곰의 눈에서 보았던 것이 권태롭게 반복되는 생존의 먹이사슬, 무심한 필연의 왕국만은 아니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가 남긴 최후의 기록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곰의 습격 당시 우연히 캠코더가 작동 중이어서, 비록 영상은 없었지만, 처절한 상황이 담긴 녹음기록이 남았다. 이 녹음에는 트래드웰에 대한 손쉬운 평가와 비난을 무색케 만드는 어떤 것이 있다.

곰이 물어뜯는 동안에도 트래드웰은 특별한 저항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그는 생전에 ‘곰이 나를 잡아먹더라도 그 곰을 절대 죽여선 안 된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여자친구에게는 마지막 힘을 다해, 달아나라고(그래서 너는 살라고) 비명을 질렀다. 허나 여자는 경고와 애원이 뒤엉킨 남자의 울부짖음에 아랑곳없이, 프라이팬을 휘두르며 곰에게 달려들었다. 다 큰 회색곰은 키가 3미터에, 몸무게 400kg에 육박하는 괴물이다. 여자의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동면을 앞둔 곰의 ‘특별한 저녁식사’가 되었다. 트래드웰이 곰에 미쳐 아예 곰의 일부가 되고자 했다면, 여자는 생과 사가 교차하는 끔찍하고 긴박한 순간에 꺼져가는 트래드웰의 생명 속에 자신을 던져 넣는 치명적 결정을 내렸다. 왜 그랬을까?

곰이 남자를, 남자가 여자를 삼키는 이 사슬은 이중으로 꼬인 나선(double stranded helix)이다. 그 한 가닥이 생존이라는 육체의 행렬―먹는 입의 주이상스―을 타고 내려간다면, 다른 한 가닥은 사랑이라는 언어의 행렬―말하는 입의 에로스―을 타고 올라간다. 여자는 남자를 남자는 곰을 사랑했다. 제 생명을 그것의 생명을 (비록 잠깐일지라도) 연장시킬 제물로 바칠 만큼!

조르쥬 바타이유가 말했듯이 에로스가 “죽음까지 파고드는 생”이라면, 두 사람을 삼킨 것은 곰의 입이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에로스의 심연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중성에 의해 ‘…그래서 너는 살아’라는 트래드웰의 외침도 두 개의 방향을 갖는다. 그 메시지는 곰에게는 그의 육신을 통해 (저항 없는 순한 몸짓으로) 전해졌고, 여자에게는 그의 격렬한 말을 통해 전해졌다. 곰과 여자는 그 전언에 꼭 맞게 반응했다. 육신으로 전한 메시지는 다른 육신(곰)의 주이상스가 되었으며, 그 육체의 행렬에서 트래드웰의 몸은 곰의 몸으로 이어졌다(연속). 그러면 말로 전한 메시지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의 말은 여자에게서, 마치 나르시스의 언어가 에코에게서 그러했듯이, 반복되었고 그녀는 자신의 내면에서 반복된 그 말―“달아나, 그래서 너는 살아”―의 울림에 따라 행동했다. 곰과 싸우려는 그녀의 무모한 행동은 “그래서 너는 살아”라는 말이 육화된 몸짓이었다. 에로스 속에서, 그녀는 신화 속의 에코처럼 그의 언어로 변했던 것이다. 그녀는 그의 말이 지시하는 바에 ‘따라’ 움직인 것이 아니라(그의 말과 지시하는 바와 반대로 움직인 것도 아니라) 그의 말이 ‘되어’ 움직였다. 곰을 공격해 그를 구하려는 그녀의 무모한 행위는 “달아나, 그래서 너는 살아”라는 말의 신체적 번역이었던 셈이다. 그녀의 몸은 그렇게 그의 말을 모방(미메시스)함으로써 그가 지시했던 바와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그러나 본질상 동일한 내용을 반복했다. 똑같은 몸짓이 외견상 정반대쪽으로 이뤄지는 거울에서처럼 말이다.

최후의 순간에 곰과 인간 모두를 사랑했던 트래드웰은 그 사랑의 표현으로, 곰에게 자신의 몸을 주었고 여자에게 자신의 말을 주었다. 곰은 그 사랑의 몸을 받아들여 그와 ‘한 몸’이 되었고, 여자는 그 사랑의 말을 받아들여 그와 ‘한 말’이 되었다. 하여 동물과 인간의 경계 자체가 되었던 트래드웰은 에로스의 몸짓 속에 소멸함으로써 경계도 지워버렸다. 그것이 서로 다른 서식지를 갖는 곰과 인간의 경계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는지, 우리에게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그가 최후의 순간에 몸과 말, 육체와 언어, 물질과 정신이라는 통일될 수 없는 두 행렬이 하나로 꼬여드는 자리에 스스로를 조난시켰다가 구원했다는 사실이다. ‘그리즐리 맨’은 경계가 되어, 자신과 함께 경계를 소멸시키는 자의 (마치 예수와도 같은) 운명을 보여준다. 거기서 비참하게 찢겨진 육체와 비명만을 보든, 자신의 죽음을 지복의 순간으로 승화시킨 숭고한 몸짓을 보든, 그건 각자의 몫이 될 것이다. 

최근의 다큐영화인 <세상 끝과의 조우Encounters at the End of the World>(2007)에서 헤어조크는 남극을 찾아간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이 세상 끝에까지 흘러들어왔는지 찬찬히 살피며 대화를 나누던 그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이 생긴 펭귄 한 마리와 조우한다. 펭귄은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먹이를 찾아 바다로 향하는 자신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극지 쪽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리로 가면 추위와 먹이부족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 보다 못해 녀석을 잡아 무리 속에 돌려놓아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펭귄은 다시 무리를 벗어나 고집스레 극지로 향한다. 한 늙은 연구자가 헤어조크에게 충고한다. “지켜볼 수 있을 뿐, 돌려세울 수는 없습니다.”

사실 그런 “지켜보기”야말로 헤어조크가 내내 해온 작업일 터이다. 그러나 헤어조크 영화의 매력은 냉정한 “지켜보기”에 있지 않다(그런 다큐감독은 헤어조크 말고도 많다). 호기심, 찬탄, 냉소, 유머, 아이러니가 뒤섞인 그의 시선은 지켜보면서 동시에 지킨다. 무엇을 지키는가? 이해할 수도 동의할 수도 없지만, 그것에 의해 사이-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이 지탱되고 지속되는 성스런 것들이다, 그의 영화는 주체를 갈라놓는 경계의 심연 속으로 뛰어들어, 그 경계와 더불어 소멸해가는 영매들(medium)을 위한 애가(哀歌)이다. 그 엘레지를 통해 우리는 저 영매들의 불가능한 에토스를 살아볼 수 있다. 당신 안의 영매가 아직 살아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