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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112호] 자본의 흐름, 사유의 정지

곽성우 기자

신체적 허기는 정신적 빈곤을 초래한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낫기야 하겠지만 배고픈 체 소크라테스가 되는 일이 말처럼 쉽진 않다.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를 진단하며 미래를 전망할 수 있다. 이조차 허락되지 않은 이에게 마냥 소크라테스가 되라고 말하는 것은 기만을 넘어선 폭력이다. 다시 말해 경제적 기반은 단지 먹고 사는 문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사유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현실은 다분히 편향적이다. 경제적 양극화가 그 어느 때보다 가열 차게 진행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소크라테스 되기를 선택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사유가 곧 사치인 절박한 삶들의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는 삶이란 사유의 빈곤을 물질적 사치로 은폐하는 삶들인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후자의 삶을 끊임없이 욕망하는 대다수의 삶들이 요동한다.

물론 일반적인 평가대로, 이는 가지면 가질수록 보다 더 많이 갖고 싶어 하는 인간의 소유욕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부동산 시장을 들끓게 하는 과도한 열기, 빚을 내서 산 주식의 등락을 바라보는 핏발 선 눈빛들, 새벽을 꼬박 밝히는 입시학원과 영어학원의 점멸하는 형광등, 이 모두가 단순히 인간의 과도한 욕심을 동력으로 삼는 것일까. 과도한 경쟁사회의 질주에 덩달아 액셀을 밟아대며 동참하는 우리는 과연 단순히 더 많이 가지려 이러는 것일까. 

상황은 미묘하다. 표면적으로 우리는 분명 더 많이 가지려한다. 그러나 이를 순수한 축적의 욕망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이 과도한 축적 행위들이 현재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유연화하고 유동화 하여 ‘자본화’ 해야 하는, 그리고 이것이 혁신과 진보의 조건으로 예찬되는 신자유주의 경제 메커니즘 하에서, ‘현상유지’는 현상유지가 아니다. 현상유지는 자산의 상실을 의미한다. 예전처럼 쌓아 두기만 한다고 능사가 아닌 시대인 것이다. 언제고 자신의 자산이 ‘평가절하’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번 획득된 재산을 쪼개어 끊임없이 ‘굴리고’, 그로 인해 획득된 이윤 또한 재차 자본화하여 투자한다. 하지만 그 결과란 예측불가능한 주식시장의 등락과도 같은 투기적 삶이다. 언젠가 상한가를 치리라는 막연한 기대 하에, 하지만 반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고, 우리는 투자라는 형식으로 투기를 일삼는다.

이 보통의 이들을 탐욕의 주체라 평가절하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분명 이들은 탐욕의 주체이지만 동시에 생존에 대한 불안과 몰락에 대한 공포에 항시 노출되어 있는 겁에 질린 주체이기도 하다.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대로, 적당히 가진 사람은 적당히 가진 사람대로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쓴다. 이들의 마음을 부단히 옥죄고 있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적 게임의 룰, 즉 개인의 모든 삶의 영역을 자본화하도록 추동하는 체제의 논리이다. 게임에 참여한 대다수가 피로감에 허덕이고 멀미를 느끼면서도, 오히려 그곳에서 튕겨나지 않기 위해 ‘가속도’에 몸을 내맡기는 그 게임 말이다. 

유명한 경구처럼, 배고픔만큼이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배고픔과 불안이라는 두 축을 기반으로 하는 이 막강한 영혼잠식 프로그램, 즉 신자유주의적 프로그램 안에서 이에 저항하는 사유를 요청하는 것은 그래서 진정으로 폭력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사유를 멈춰버린다면,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통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핀마저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완전한 통제까지는 아닐지라도 현재의 가속도를 감속시킬 수 있는 제어장치로서의 사유는 부단히 요청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가. 비록 그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난망한 일이지만, 자본의 흐름에 의해 정지되고 있는 사유가 다시 흐르길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