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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12호] 기관(organ)뿐인 사회, 혹은 망각에 잠식당한 신체(body) : 홍형숙의 <경계도시2> 읽기

재현 Representation 을 단순히 가상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이 거듭되는 Re- 행위 -ation 내에 현재 -present- 가 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이 반복적 행위가 현재에 대한 가상을 넘어 시뮬라크르의 차원으로 전도될지라도, 재현에는 항시 현재가 말소된 흔적으로나마 남아있기 마련이다. 물론 이 흔적을 추적하는 것은 이미 포지티브화 된 사진을 보며 그 이전의 네거티브한 필름을 상상해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테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현재의 은폐된 단면을 목도하게 된다. 영화로 재현된 공간에서 영토적 포섭의 결을 읽어내고, 이를 통해 한국 사회의 불편한 기억을 상기하려는 필자의 사유를 따라가 보았다.
 


신이수(영화감독)

<경계도시2>가 다루고 있는 것은 잔존하는 몇몇 기록물에 의지해야만 가까스로 복원해낼 수 있는 먼 과거사가 아니다. 송두율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7년 전, 새 밀레니엄을 맞이하던 호들갑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일어났고, 거의 모든 언론매체가 이 사건을 실시간 헤드라인으로 다뤘다. 다시 말해, 송두율은 현재다. 자못 회고조인 영화의 내레이션은 이 명백한 현재의 사건을 외려 먼발치에 격리시켜 놓고서 바라보게 하려는 감독의 의지다. 이 소격(疏隔)은 거의 읍소에 가깝다. 바라보자. 감독은 바라보자고, 이야기한다. 뒤돌아보자고, 의관을 정제하고, 호흡을 가다듬고, 그 날 그 장소에서 벌어졌던 어떤 카니발을 먼발치서 지켜보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 제안을 받아들인 이들이 가장 먼저 마주치게 되는 것은 창공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야경이다. 남산타워와 63빌딩, 한강대교를 조망하는 널따란 쇼트들이 연달아 화면을 메운다. 이 오프닝은 상징적이다. 그것은 보이저호로 부터 수신된 ‘창백한 푸른 점’으로서의 세계, 을지로의 한 교차로에서 줌-아웃 하여 대기권 밖까지 용솟음치는 구글맵 Google Map 위성의 시점쇼트와 맥을 같이 한다.

이 역설적인 오프닝을 지나 <경계도시2>가 비추는 서울은, 그러나 예외 없이 비좁다. 이 비좁음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혹은 카메라의 동선(blocking)이 확장해 나가려는 시도를 가로막는 요소들은, 두 말 할 여지없이 이 영화가 탐사하는 단 하나의 지점, 송두율로 수렴한다. 이것은 일견 문제적 인물을 전개의 중심축으로 둔 모든 영화에서 공히 작동하는 원칙으로 보인다. 요컨대, “대상이 공간을 제약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계도시2>를 올바로 탐사하기 위해 던져야 할 첫 번째 질문은 이렇게 제기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어째서, 송두율이 거니는 서울은 비좁을 수밖에 없는가?”

한국, 견고하고 비좁은 영토

송두율이 움직여 나가는 물리적 공간을 제약하는 세력은 비교적 쉽게 모습을 드러낸다. 참여정부의 사상검증에 혈안이 되어있던 야당과 보수언론, 그리고 국정원과 검찰에 의해 송두율의 동선은 일부 학술회의를 제외하고는 철저하게 숙소와 수사기관으로 한정지어진다. 천신만고 끝에 선친의 묘소가 있는 광주를 찾지만, 이 시점의 송두율은 이미 피의자 신분이었으므로 여전히 그 제약 아래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 이 풍경은 기시적이다. 체제의 이단아, 앙시앵 레짐에 균열을 일으키는 세력들은 언제나 이와 같은 구속의 절차를 거쳤다.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은 그 배면의 작동논리, 물리적 동선 제약의 컨텍스트에 이르러서이다. 이 대목에서 ‘경계인’을 대하는 체제의 불관용성은 비단 수구보수진영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를 고국으로 불러들였던 진보 지식인 진영이 앞장서서 전향을 요구하고(긴장감이 팽팽하게 지속되던 극장에서 거의 유일하게 폭소가 터져 나오는 장면이다), 호기롭게 ‘감옥갈 일 없고, 가서도 안 된다’라고 격려하던 변호사가 ‘나에게는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라며 그를 몰아세운다. 감독이 최초에 세워두었던 방향성을 잃고 자신이 찍고 있는 대상에 대한, 나아가 그 대상을 찍고 있는 자신에 대한 본질적 의문을 제기하는 지점 또한 이 대목부터다. 감독은 숫제 직설화법으로 자문한다.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와 송두율, 그들은 동일인물인가 아닌가?”

<경계도시2> 속의 군상들은 송두율에게 각자의 진영이 요구하는 기능과 의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해체시킨다. 영토싸움에 골몰한다. 조직/유기체화 되어있는 진영, 그리고 그 주체가 분명한 진영논리는 송두율이라는 부정형의 지표 앞에서 좌우를 막론하고 여지없이 폭력적 불관용을 드러낸다. 들뢰즈를 빌려 얘기하자면, 이 ‘송두율이라는 시약’은 2003년 한국사회 위에 떨어져 고정된 진영(영토)의 기능을 해체하고 탈진영(영토)을 통하여 탈주선을 확보하려했던 ‘기관 없는 신체’에 다름 아니다. 단지 그 자신이 파괴당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만으로, 그 실존의 잠재성만으로, 분열과 대립으로 조성된 세계에 작은 균열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던 한 ‘경계인’이, 진보진영의 훈수와 협잡으로 점철되었던 철야 대책회의 끝에 사실상 전향선언을 하는 장면은 어떤 극영화의 클라이맥스보다 더 참담한 정서적 충격을 안긴다. 그것이 바로 지금 여기의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강력하게 체감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 견고한 비좁음. 스스로의 구속력을 지지대 삼아 더욱 견고하게 구속하려 드는 고국으로부터, 패퇴한 늙은 철학자는 다시금 망명하는 수밖에 없다.

안이한 망각과 불편한 기억 사이


2010년의 송두율은 다시 독일에 있다. 그가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비정했던 시대적 핍박을 받고서, 훗날 다시금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될 지는 그 자신을 제외하고 아무도 알 수 없다. <경계도시2>에 드러난 자기모순적 순간들은 이 고고한 철학자에게 분명 감당하기 힘든 모멸감 또한 안겨주었을 것이다. 그 모멸감이 그가 다시 경계인으로 돌아가려는 시도의 원천적인 걸림돌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송두율이 경계인으로서 마지막 순간까지 자립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기실 우리가 이 사태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여하한 문제들 중 가장 소박하고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송두율 이후에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일련의 드라마틱한 사건들을 우리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누군가는 이제와 허섭스레기 같은 보도블록 몇 조각과 분수대로 망가뜨려놓은, 언젠가 컨테이너 산성이 솟아올랐던 자리에서 촛불을 들고 낯모르는 이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때때로 떠올릴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지금도 주말이면 봉하의 어느 바위에 올라 피우다 만 담배를 내려놓고 올 것이며, 또 누군가는 한동안 용산을 지나칠 때마다 남일당 쪽으로 향하는 시선을 거두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 기억의 유통기한이 얼마나 속절없는 것인지를 부연하기 위하여 굳이 송두율을 소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인류가 지나온 길이란, 지속적으로 실수를 저지르고 그것에 대한 뼈저린 반성과 자기비판을 토해낸 후에 얼마 안 가 그 모든 부침을 예외 없이 망각해버리는 행위의 지루한 반복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찰진 선동 한 번 없이 <경계도시2>가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지점은 송두율 너머에 있다. 망각을 사주하는 이 안온함을 뚫고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불편한 기억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광증에 가까운 이 비좁음에 대하여, 우리는 여전히 어떤 불온한 확장을 요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침묵과 망각의 카르텔을 넘어서

그러한 불온함으로, 나는 머지않은 미래 송두율이 하나의 포스트모던한 패션 아이템이 되기를 소망한다. 수갑을 차고 형무소로 향하는 그의 포토제닉한 한 순간이 반팔 티셔츠의 프린팅 베이스로 제작되어 거리의 레디컬한 청춘들에게 소비되는 모습을 그려본다. 천박한 발상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그가 그런 식으로라도 만세에 남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박제된 그가 표상하는 단 하나의 지점은, 한 사회의 한 시대를 가마솥처럼 달구었으나 이제와 누구 하나 소리 내어 다투지 않는 모든 것들에 대한 우리 모두의 원죄, 바로 ‘침묵과 망각의 카르텔’이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