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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13호] 지젝의 사랑론(論): 쿨한 사랑에서 열외(列-外)하는 열애로!


한보희(연세대 비교문학 강사)

시와 사랑, 그 폭력적 소격효과

로만 야콥슨에 따르면 시적 언어는“일상 언어에 가해진 조직적 폭력”이다. 이 유명한 명제를 살짝 바꾸면, 슬라보예 지젝의 사랑론으로 들어서는 입구로 삼을 수 있다. 사랑이란 일상적 삶에 가해진 조직적 폭력이다.“사랑은 존재의 질서에 하나의 차이를 만들고 균열을 내려는 폭력적 정념, 다른 모든 대상을 희생함으로써 하나의 대상을 특권화하려는 폭력적 정념이다. … 사랑의 선택은 이미 자체로 폭력인데, 그것은 폭력이 사랑의 대상을 맥락에서 떼어내 사물(Thing)의 자리에 올려놓기 때문이다(슬라보예 지젝,『죽은 신을 위하여』, 57쪽).”

사랑은 일상이라는‘자동화된(automatized)’궤도에서 주체를 탈선시키는 삶의 시어(詩語)들이다. 시의 요체인 은유가 기표의 행렬을 탈선시켜‘낯선’기의와의 만남을 창출하듯이, 사랑의 만남은 일상의 껍질을 깨트려 그 안에서 삶의‘낯선’얼굴과 조우하게 한다. 주의해야할 것은 일상적 삶을 낯설게 하는 사랑의‘소격 효과’를 ‘특별한 일상사를 만드는 일’- 가령 연인들의 호주머니를 터는 온갖 이벤트들 - 로 오해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
은 특별한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밥 먹고, 차 마시고, 도서관에 가는 대수롭지 않은 일상이‘갑자기 특별해지는 경험’이다. 특별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속에서 그 사람이 특별해진다. 여기서 핵심은 대상이 아니라 주체의 변화에 있다.

‘사랑이 나를 한다’

흔히 쓰는‘사랑한다’라는 표현은 사랑에 관해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사랑은 ‘나는 공을 찬다, 밥을 먹는다’ 와같은 능동적, 의도적 사태로 이해될 수 없다. 예컨대 남성의 발기 같은 것이나 여성이 운명적 사랑에 빠지는 경우 - 저 악명 높은‘백마 탄 왕자님’- 를 떠올려보자. 그런 장면들에서 사랑은 분명히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나의 의지와 욕구에 따라 자발적, 능동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닌 사태를 가리킨다. 내 안의 나 아닌 힘의
기상 - 정신분석학이 무의식이나 리비도라 부르는 바로 그것(Id)의 작용 - 인 사랑은 타자적인 것(the Other)의 경험이다. 타자는 내 바깥의 객체가 아니라 내 안의 낯선대상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처럼 외밀한(extimate) 타자와의 조우이므로, 사랑에서 주체가 피동성, 수동성을 경험하는 것은 불가결하고 본질적이다. 사랑의 경험은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정도가 아니라 ‘내 마음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사랑의 역설적 힘은 바로 그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마음’이 나를 변화시키고, 그러한 변화가 지렛대가 되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리라 여겨지던 세상’을 바꾸게 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내가 사랑을 한다’라기보다는 ‘사랑이 나를 한다’라고 표현하는 게 비문법적인 문장이긴 해도 사태에 훨씬 더 부합하는 표현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있지 않다
사람이 사랑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다
(이성복,「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전반부)

한데 “사랑이 나를 한다”니,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사랑이 나를 (…) 한다’라는 문형(文型), 즉 사랑이라는 형식 안에 ‘무엇을 어떻게’라는 내용을 채워 넣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동적, 의지적 부분의 전부이다. 그러니 괄호 안에 들어갈 첫 번째 내용은 일단 ‘사랑이 나를 (… 하게끔 유혹)한다’일 것이다. 즉 사랑은 우리가 타자 - 욕망의 원인이자 대상 - 에게 다가가도록, 그에 관해 무언가를 하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최근 <검사 프린세스>라는 드라마에서 심오한 대사 한 토막을 귀동냥했다. 주인공인 ‘서인우’ 변호사는 신참 검사인 ‘마혜리’ - 여주인공이며 서인우의 복수의 대상인 마상태 사장의 딸 - 를 자신의 복수의 도구로 이용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면서 사태가 꼬이기 시작한다. 복수 계획을 돕던 인우의 여자친구 ‘제니’는 그와 마혜리 사이에 사랑이 움텄으며 그로 인해 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됐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인우를 다그치며 묻는다. “도대체 네가 마혜리와 하고 싶은 게 뭐야?” 그는 괴로운 표정은 지으며 대답한다. “아무것도 … 하고 싶지 않아!” 

애무, 입맞춤, 성교 등등을 떠올리던 내 뒤통수를 후려친 이 뜻밖의 대사는 사랑의 무위적(無爲的) 본성을 깨우쳐준다. 그렇다. 사랑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흔히 말하듯, 사랑에 빠진 사람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을 때 본업에 가장 충실하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 사랑의 무위를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사랑을 망치는 한이 있더라도 사랑에 관해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사랑에 관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천박한 오해와 실수는 ‘사랑에 관해 무언가를 하는 것’ 자체는 아니다. 그 ‘무언가를 하는 것’을 사랑과 혼동하는 것, 예컨대 ‘사랑’이라는 단서를 걸고 이러저러한 기대나 요구를 하거나 의무나 권리 등을 내세우는 짓들이다. 이런 유감스런 사태에 대해 시몬 베유는 사랑은 ‘채움’이 아니라 ‘비움’에 가깝다고 말했다. “인간에게 애원하기, 그것은 자기 자신의 가치 체계를 타인의 정신에 억지로 강요하려는 절망적인 시도이다. 반대로 신에게 애원하는 것은 신의 가치를 자기의 영혼 속에 받아들이려는 시도이다. 그것은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가치들을 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며, 내 안에 빈자리를 만드는 것이다(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47쪽).”

사랑은 내 안에‘빈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달리 말해 마음에 구멍이 뚫리는 일이다. 이 구멍을 어찌하면 좋은가? 사랑에 관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사랑이여, 당신은 내게 무엇을 원하는가(Che vuoi)?”지젝은‘케 보이’에 대해, 그 물음은 타자에게도 수수께끼라고 말한다(슬라보예 지젝,『전체주의가 어쨌다구?』, 1장 타자 안/의수수께끼). 사랑은 우리를 타자에게로 이끌지만, 우리를 유혹한 타자조차도 사랑의 내용이 무엇으로 채워져야 하
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정답은 물론이고 대답조차도 갖지 않는 질문이다. 왜냐면 그것은‘엄마의 자지는 어디있지?’라는 아이의 물음처럼, 잘못 물어진 물음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드라마는 그런 실수(miss)에서 시작된다. 오이디푸스 시기의 아이가 엄마를 향해 던지는, 그리하여‘아버지’라는 (오)답을 찾아내는‘케 보이?’는 사실 상 질문이 아니라, 엄마 안의 타자,‘m(other)’라는 견딜수 없는‘벽’을‘문’으로 바꾸는, 혹은 자신이 (기어올라)
가야할‘길’로 만드는 인간의 삶-충동 그 자체를 상징화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다.“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거든, 그가 무엇을 사랑하는지 보라.”거기에 다음과 같은마르크스의 통찰을 덧붙여보자.“그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지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 보라. 그가 행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이다.”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위해 무엇을 행하는가?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해줄 것이다. 그 증명 앞에서는 어떤 신분도, 어떤 지위도, 어떤 정체성도 한낱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 ‘사랑이 나를 (…) 한다’에서 괄호 안을 채우는 궁극적인 말은 결국 ‘사랑이 나를 (나이게) 한다’인 것이다.

주체를 지우는 빗금이자 여는 간극으로서의 사랑

이처럼 사랑이라는 ‘사건’은 소소한 쾌락들로 이뤄진 일상의 질서와 결부된 기존의 정체성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만들며, 자기동일성의 숨겨진 핵심(으로서의 간극과 균열)에 도달하게 만든다. 즉 사랑은 ‘이행적’ 현상이며, 사랑의 대상은 ‘전환기 대상(transitional object)’의 성격을 띠게 된다. 우리는 사랑의 대상을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징검다리로 삼는다. 우리의 발이 징검다리에 머물 때, 그것은 우리의 존재 전체를 지탱하는 사물(Thing)이지만 강 저편으로 건너갔을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기꺼이 누군가의 ‘사랑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지젝의 표현을 쓰자면, ‘소멸하는 매개자(vanishing mediator)’의 지위를 떠맡는 일이다. 김소월의 시에서처럼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라고 노래하는 진달래꽃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것!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쓰라린 이 사태에 관해 한 낭만주의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신비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신비 속으로 사라져야 한다.” 이행이 완료됐을 때, 우리는 우리가 사랑했던 그이가 어디로 갔는지, 우리를 사랑했던 그이가 어디에 있는지 결코 알지 못하리라. 설령 그가 어제와 마찬가지로 내 옆에서 쿨쿨 자고 있다고 할지라도. 

결국 사랑은 타자를 향해 나를 ‘탈주체화’하는 역동적 과정이며, 그러한 탈주체화를 통해 참된 주체(타자, 다른 자로서의 나)가 되는 역설적 사태(ubject)이다. 사랑이라는 사건은 주체 안에 그러한 ‘열림’을 도입한다. 사랑에 의한 열림은 폐쇄된 순환적 전체에 불균형, 불안정, 균열, 분열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일종의 트라우마(상처)이다. 상처 없는 사랑은 없다. 사랑은 주체가 처음 주체로 되었을 때 겪었던 상처의 반복이고, 기억될 수 없는 그 본원적 상처 - 상징화에 저항하는 실재(the Real) - 를 상상적 무대 위에서 재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인간은 자연의 열림이며, 사랑은 인간의 열림이다. 인간은 자연의 존재론적 트라우마를, 사랑은 인간의 실존적 트라우마를 재-상연하며 재-상기시킨다. 트라우마가 사후성(Nachträglichkeit)의 논리 - 이전에 존재했지만 사후에야, 그것도 구성적 과정에 의해 왜곡된 형태로만 발현되는 것 - 에 따른다는 점을 떠올릴 때, 사랑은 앞서 인용한 시의 후반부처럼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목 좁은 꽃병에
간신히 끼여 들어온 꽃대궁이
바닥의 퀘퀘한 냄새 속에 시들어가고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있다 
(이성복,「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후반부)

사랑했던 이는 “어제의 하늘 속에” 있고 우리는 오늘의 하늘 아래를 걷는다. ‘어제의 하늘’과 ‘오늘의 하늘’이라는 이 불가능한 - 어제의 하늘과 오늘의 하늘은 같은 해가 뜨는 동일한 하늘이라는 점에서 보았을 때 - 어긋남(miss)이 사랑의 원천(Ursprung)이며 사람의 거처(ethos)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사랑의 역사(役事)에서 “사랑이란 사람과 하느님과 사람(사람―하느님―사람) 사이의 관계라고, 즉 하느님이 중간규정으로 들어있는 관계”라고 말한다. 지젝의 유물론적 기독교 해석을 통해 이를 보충해보자. “근본적 차이란 일자가 자기와 관계할 때 생기는 차이, 일자와 자기의 불일치, 일자와 자기 자리의 불일치이다. 기독교가 유일하게 진정한 일신교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요, 정확히 삼위일체의 교훈 때문이다. 삼위일체의 교훈은 신이 신과 인간 사이의 균열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 신이 바로 이 균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자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는 균열에 의해 인간과 분리된 피안의 신이 아니라, 균열 자체, 신을 신으로부터 분리하는 동시에 인간을 인간으로부터 분리하는 균열이다. 

사랑이 주체가 자기와 관계할 때 생기는 차이, 주체와 주체의 자리의 불일치, 사람-사람 사이의 균열(에 터 잡는 어떤 것)이라면, 이러한 사랑의 도정 속에서 타자 또한 차이, 불일치, 균열 가운데 존재하는 ‘빗금 그어진 타자()’이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이 주체의 균열을 가져오는 타자와의 조우라면, 이 사건의 이면은 주체가 행위를 통해 그 안으로 개입해 들어가야 할 타자의 균열이다. 사랑이라는 간극 속에서 주체만이 아니라 타자 또한 변화의 운동을 시작한다는 얘기다. 요컨대, 사랑이라는 이름의 이 이행 - 지우는 빗금이자 여는 간극의 운동 - 을 사회 안에 도입하는 일(ociety)은 ‘사랑의 정치화’가 될 것이다.  

사랑의 정치화,
현실을 궤도이탈 시키는 어긋냄의 행위
  
이제 우리는 ‘빗금 그어진 주체()’에서 적어도 세 개의 주제 - 기호의 운동(ign), 주체의 운동(ubject), 그리고 사회의 운동(ociety) - 를 끌어낼 수 있으며 이를 각각 시, 사랑 그리고 정치에 대입시켜볼 수 있다. 가령 언어의 일상적 질서가 무의미한 잡담으로 전락할 때, 시적 언어의 폭력적 개입은 기표들의 자동화된 연쇄를 탈구시켜 기호 바깥의 사물을 향한 그리움(miss)에 들뜬 새로운 기의들을 산출(함으로써 기호를 구원)한다. 또 주체가 기존의 상징계에 순응하는 무력한 종속체(신민, subject)로 머물 때, 사랑은 자아를 분열시켜 타자에게로 개방하는 자기지양의 고통스런 과정으로 주체를 개방한다. 지젝에게 실재로서의 주체란 주체가 오해 속에서 타자를 실현해가는, 또한 타자가 유혹 속에서 주체를 실현해가는 이 변증법적 과정 자체이다. 

한 사회가 그 바깥, 즉 발본적으로 다른 사회를 상상하지 못하는 ‘자동기계(automaton)’ - 모든 차이들이 다원성의 이름으로 그 안에 포섭된 글로벌 컨테이너 - 로 물화될 때, 그리하여 인간이 사회적, 정치적 역능을 지닌 동물에서 그저 사회라는 치안(police)의 우리(cage) 안에 사육되는 동물 내지 유용한 자원으로 활용되다 무용한 ‘쓰레기’로 폐기되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전락할 때, ‘정치적인 것’은 이 상호-관리적인 사육동물들의 공리주의적 질서 안에 - 일상에 대해 시와 사랑이 그러하듯 - 재난과 테러의 외양을 하고 진입한다. 그래서 지젝은 ‘사랑의 정치’가 ‘공포(terror) 정치’와 포개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진정으로 실행해야할 과제는, 순간적인 민주적 폭발로 이미 만들어진 통치(police, 치안)질서의 토대를 침식하는 데 있지 않고, 바디우가 사건에 대한 ‘충실성’의 영역으로 지적한 곳에 놓여있다. 즉, 어떻게 민주적 폭발을 적극적인 ‘통치’ 질서로 전환시키고 그 질서에 새겨 넣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영속적인 새 질서를 사회적 현실에 부과할 것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민주적 폭발에 있어서 정당하게 사유되어야할 ‘공포 정치적’ 측면이다 (로베스피에르: 덕치와 공포, 55~6쪽).” 그러나 사랑의 폭력성에 대한 수긍이 곧 폭력적 사랑의 옹호가 될 수 없듯이, 사랑의 정치에 내장된 테러적 성격에 대한 지젝의 긍정도 테러리즘과 공포정치에 대한 옹호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폭력은 아무런 본래적 가치도 없지만(따라서 파시즘처럼 폭력에 매혹되어 그것 자체를 물신화하고 찬양해서는 안 되지만), 우리의 혁명적 노력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기호로 기능(슬라보예 지젝, 죽은 신을 위하여, 53쪽)”하는 것일 뿐이다. 

사르트르는 문학을 “영구혁명 안에 있는 사회의 주체성”이라고 말했다. 사랑은 그 영구혁명의 근원이며 목표이다. 그런 맥락에서, 지젝이 말하는 사랑의 정치는 시적(詩的) 주체를 산출하는, ‘사랑이라는 구멍’을 지닌 공동체(空洞體)의 도야(陶冶, bildung)이며 현실이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적 구멍마개(stopgap)를 벗겨내 ‘실재’로서의 간극(gap)을 여는 어긋냄의 행위(act)이다. 상처 없는 사랑이 없듯이, 상처(기성 현실에 대한 배반과 어긋냄의 행위) 없는 정치도 없다. 

최근 자퇴를 선언한 한 대학생의 행위는 기존의 세계에 구멍을 내고 현실(주의)적 기대 지평을 배반한 ‘사랑의 정치화’의 한 사례라 할 만하다. “경주마처럼 질주해온 길고 긴 트랙”에서 김예슬을 벗어나게 만든 것은 경주마의 피로와 절망이 아니다. 그것은 대학-기업-국가라는 상징계에 난 “작지만, 이미 시작된 균열”이자 그 균열을 통해 그가 내다보게 된 새로운 세계와의 사랑, 즉 아직은 비-현실인 ‘다른’ 세계(타자)와의 열애熱愛일 것이다. 문제는 그 ‘열-외列-外’하는 열애를 자본의 압력에서 해방된 특별공간으로, 혹은 ‘대안’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대안-대학, 대안-지성, 대안-공동체 등의 예외적 해방구에 안착시키는 일이 아니다. 우리의 과제는 이 ‘열-외’하는 사랑을 일종의 준거점으로 대학 안에 재-도입하는 것, 그리하여 대학이라는 공간이 엘리트 또는 산업예비군을 생산하는 자본 지배의 공간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주의)을 한낱 이데올로기적 허깨비로 폭로하는 것이다. 이는 취업불안과 자격증, 학점, 스펙 등등의 각종 공포로 지탱되는 신자유주의적 대학에 사랑, 즉 실재라는 균열과의 열렬한 동일시를 들여놓는 폭력적 제스처이자 우승열패라는 경쟁의 법(빗금)을 중단시키는 사랑의 법(열림)을 시작(詩作)하는 일이다. 비약하자면 이렇다. “이제 쿨한 사랑은 집어치워라. 우리에겐 대열을 벗어는 열애의 고통이 필요하다. 너의 증상인 사랑을, 소비가 아닌 삶-정치로 구가하라. 그 열-외하는 열애의 궤적이 현실이라는 이름의 저 맹목적 행렬을 영구히 궤도이탈(列-外)시키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