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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13호] 한국 다문화주의의 겉과 속: 이주민에 대한 열외적 열애


오경석(한양대학교 다문화연구소 소장)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다문화주의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이주민들에 대한 관심이 매우 뜨겁다. 하지만 이 뜨거움(熱)은 실상 일방적인 온정 내지 동정의 시선에 그칠 뿐이며, 이에 이주민의 타자성은 우리의 동일성으로 재차 용해되어 버리고 있다. 이주민들이 사회의 주변부로 끊임없이 내몰리는 현실 또한 여전하다. 다문화 연구가인 필자를 통해 표면적 포용과 배면의 배제로 점철된 한국 다문화주의의 현주소를 짚어보았다.

한국은 이민국가가 아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 평등하게 어울려 사는 문제를 고민해볼 기회와 경험이 별로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동질성의 압력이 강한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로 여겨질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이주민 대중이 급증하면서, 몇 년 전부터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문화주의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더 이상 다문화주의는 대한민국에서 낯선 용어가 아니다. 아동센터, 유치원, 청소년 문화의 집 등, 다문화주의에 기반해 새롭게 건립된 공공시설들은 그 수효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전국의 사회교육시설들은 ‘다문화 전문 학원’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단기간의 속성 과정을 통해 ‘다문화 지도자’ 내지 ‘다문화 전문가’ 등으로 불리는 전문가 집단이 양산되고 있다. 언론과 대중 매체 내에서도 다문화 담론이 범람하고 있는데, 1990년대를 통틀어 2백여 건에 불과했던 다문화 관련 기사가 2007년에는 무려 3만여 건에 육박했다. 다문화 관련 연구 논문의 규모 역시 2006년 전까지 한 해에 한 자리 수를 넘지 못했던 반면 2007년에는 무려 세 자리 수로 급증한 바 있다. 국어사전의 정의 그대로 “열렬히 사랑함, 또는 그런 사랑”을 ‘열애’라고 한다면, 이러한 다문화주의 ‘열풍’은 - 그 속도와 규모만을 주목할 경우 - 표면상으로는 이주민 대중을 향한 우리 사회의 열애라 평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문화주의라는 이름으로 전개되고 있는 한국 사회의 이 집단적인 열광과 헌신에 대한 외부의 평가들은 냉혹하기만 하다. 1999년과 2007년 두 차례에 걸쳐, 유엔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순혈주의와 단일민족주의로 인해 한국 사회가 인종주의에 경도될 위험성을 우려하며 “다민족주의를 인정할 것”을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권고했다. 2009년 10월 국제 엠네스티는 「대한민국 이주노동자의 권리보고서」를 통해 한국 이주노동자들의 상황을 강제 노동과 미등록 노동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1회용 노동자”로 압축해 표현했다. 2003년 1월 UN 아동권리위원회 또한 한국 정부에게 “한국 정부가 비준한 유엔아동인권협약에 명시된 바와 같이 모든 외국인 어린이 에게도 한국 어린이들과 동등한 교육권을 보장하라”라고 권고한 바 있다.

한국 이주민 정책의 현실

실제로 한국에 체류하는 가장 큰 이주민 집단인 이주노동자들의 삶은 다문화주의의 확산 이후 오히려 더욱 악화되고 있다. 그 단적인 예가 이주 노동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미등록 체류자들에 대한 단속,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탈법적인 인권 침해다. 대부분의 단속 반원들은 사복 차림이며 신분증을 제시하거나 동의나 허락을 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79.5%가 수갑을 사용했으며, 전자 충격기 및 그물총을 사용하는 경우도 2.9% 였다. 그 결과 단속 과정에서 2003년 이후에만 무려 100여명의 이주민들이 사망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올 11월로 예정된 G20 정상 회담을 ‘안전하게’ 개최하기 위해 미등록 체류자 단속을 오히려 강화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그나마 ‘합법적인’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고용허가제 역시 사업주들의 이익과 권한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개악되었으며, 고등법원의 합헌 판결에도 불구하고 이주 노동자 노조는 정부의 표적 단속에 의해 거의 붕괴된 형편이다). 이에 한 이주노동자는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이 동물 취급을 받으며 고통으로 죽어가고 있다”라고 절규한 바 있다. 다문화주의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로 인하여) 이주노동자들은 (오히려) 더욱 노골적인 배제와 탄압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주 아동 및 청소년들의 상황 역시 암담하기는 마찬가지다. 한국에 체류하는 이주아동의 규모는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2009년 5월 현재 만 18세 미만의 이주 아동은 총 체류 외국인의 9.7%에 해당하는 107,689명에 달한다. 2008년의 49,682명에 비해 무려 85.6%가 증가한 규모다. 2006년 25,000명에 불과했던 이주아동의 규모가 3년 만에 무려 4배로 늘어난 것이다. 유엔아동인권협약을 비롯한 국제 인권 협약들은 18세 미만의 아동이 어떠한 경우에도 비차별적인 교육권을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국은 유엔 아동 협약 비준 국가이며, 이는 유엔아동인권협약이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주 아동의 규모가 증가하는 속도만큼이나 교육받을 권리로부터 배제되는 이주 아동의 규모 역시 증가하고 있다. 이주 아동 가운데 80%는 공교육으로부터 배제되어 있으리라는 것이 활동가들의 추산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미등록 이주 아동들의 상황이다. 그들은 ‘태어난 곳은 있지만 고향이 없고, 살아있지만 태어난 적이 없는’ 유령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의 규모는 최소한 1만 여명에 달한다.  



순혈에 대한 강박과 동일을 향한 압박

한편으로, 대중매체에서는 외모와 피부색에 관계없이 ‘능력이 중시되고 사랑하는 마음이 많아지는 사회’로 다문화사회를 칭송하고 있지만,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순혈’과 ‘단일’에 대한 강박인 듯하다. 순혈과 단일에 대한 강박은 전근대적인 인종주의를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작년에 있었던 보노짓 후세인 교수 사건이 대표적이다. 그는 백주 대낮에 “더럽고 냄새나는 새카만 새끼”라는 모욕을 당해야만 했다. 검은 얼굴의 외국인이 ‘감히’ 한국인 여성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 한 가지 때문이었다. 한국의 시민사회를 지배하는 ‘살색의 논리’는 이처럼 여전히 완강하기만 하다.

따라서 이주민 당사자들이 한국의 다문화주의에 대해 냉담한 평가를 내리는 것은 자명하다. 한국의 다문화주의가 자신들의 존재에 대한 승인과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존중에 터하고 있다기보다는 자신들의 절박한 욕구를 왜곡하는, 생뚱맞고 무례하며 위선적인 한국인들만의 잔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주민들이 원하는 것은 ‘특별한 대접’이 아니라 ‘같은 사람’으로 보아주는 것이며, ‘일방적인 지원’이 아니라 서로 ‘친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다문화주의 속에서 그들은 여전히 ‘교육’과 ‘지원’ 그리고 ‘상담’이 필요한 ‘특별한 사람들’일 뿐이다. 특별한 사람들에게 허용되는 것은 다문화주의라는 이름으로 수행되는 ‘한국인 만들기 프로젝트’를 수용하든지 거부하든지 하는, 양자택일의 선택지뿐이다. 다문화주의는 이주민들에게 또 하나의 외적인 강제에 불과한 셈이다.  

서양의 한 사회학자는 열애의 두 가지 유형을 구분한 바 있다. 하나는 타인에 대한 망상에 기초해 파트너를 압박하며 즉각적인 희열을 구하는 것이다. 그는 이를 “중독적인 사랑”이라고 명명했다. 다른 하나는 타인의 개성을 인정하고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가운데 장기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포용적이되 동일시하지 않는 친밀성(loving detachment)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는 이를 “합류적인 사랑”이라고 명명했다. 한국 사회의 다문화 열풍에 대한 국제 사회와 이주민 당사자들의 반응은 이주민 대중을 향한 우리 사회의 열애가 전자에 가까운 것임을 확인시켜 준다. 한국의 다문화주의는 이주민 대중들에 대한 ‘망상’에 기초해 그들과 한국인을 ‘동일화’하는 것을 목표로 그들이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들의 변화를 ‘압박’한다. 이러한 압박을 감당할 수 없거나 거부하는 이주민들은 잠정적 범죄자 내지 법 외부의 유령들로서만 우리 근린의 목록에 추가된다. 다양성의 이름하에 다시 한 번 모두가 똑같아지는 이 기이한 폭력적 결과는, 안타깝고 아픈 일이지만 한국 다문화주의의 현주소를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