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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114호] ‘비시대적’ 매체론을 위하여


글 곽성우 기자


교정 곳곳 대자보란에 군데군데 붙어 있는 포스터들을 보며 올해 초 한 대학생의 선언을 상기한다. ‘김예슬 선언’이라 지칭되는 이 선언은 한국 대학의 부조리를 지적하고 우리 사회의 치부를 건드리는 돌팔매질이었다. 그런데 주목할 만 한 점은 이 거부의 몸짓이 최초엔 바로 대자보라는 다소 낡은 매체형식을 취했다는 점이다. 물론 김예슬 선언이 여러 매체들을 통해 급속도로 전파되고 대중들의 이목을 끌며 사회적인 공감을 얻어낼 수 있었던 동력이 무엇보다도 선언의 행간을 채우고 있는 고민의 흔적, 즉 그 ‘내용’이었다는 점은 부정될 수 없다. 따라서 단순 시발점에 불과할 수 있는 대자보라는 형식에 집중해보자는 것, 요컨대 내용적 측면이 아닌 ‘형식적 측면’에서 김예슬 선언을 논해보자는 것은 다소 사변적으로 비춰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김예슬 선언이 과연 처음부터 인터넷을 통해 언표 되었다면 그와 같은 파급력과 공감대를 이끌어 낼 수 있었을까. 오히려 인터넷이라는 ‘뉴 미디어’와 구분되는 대자보의 ‘올드 미디어’적 특성이야말로 선언의 내용과 공명하며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필수불가결한 형식적 조건은 아니었을까.

한 매체가 낡은 것인지 새로운 것인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시대에 따라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적 관점에서 특정매체가 올드 미디어인지 뉴 미디어인지 판가름되는 주된 기준은 그 매체가 ‘일방향적 매체’인가 아니면 ‘쌍방향적 매체’인가에 달려있다. 예컨대 책이나 신문의 경우 특정 주체가 다른 주체에게 일방적으로 정보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올드 미디어라면 인터넷은 주체 간에 상호적으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뉴 미디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방향성과 쌍방향성이라는 대당적 특성은 곧장 또 다른 대당적 특성, 즉 ‘강제성’ 및 ‘자율성’과 환유적으로 연계되곤 한다. 즉 올드 미디어가 일방향적이기에 정보를 받는 수신자에게 어떤 강제성을 부여한다면, 뉴 미디어는 쌍방향적이기에 상대적으로 자율성이 보장된다는 식이다. 이러한 환유의 결과는 자율이 강제보다 낫다는 일반적인 통념에 따라 뉴 미디어는 올드 미디어 보다 ‘좋은 것’이라는 연역체계의 구축이다. 이처럼 일방향성·쌍방향성과 강제성·자율성이라는 개념적 대립쌍은 뉴 미디어에 대한 찬양들의 근저에 놓인 핵심 논리구조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의문에 부쳐봐야 하는 것은 과연 강제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이고 자율을 그 자체로 좋은 것인가 하는 점이다. 때때로 강제는 개인의 변혁과 사회적 연대를 추동하는 반면 오히려 자율은 개인의 방종과 사회의 파편화를 초래하지 않는가. 다시 말해 강제와 자율에 대한 통념적 판단이전에 어떤 강제이고 어떤 자율인가를 먼저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의문은 소위 일방향적이어서 강제적인 올드 미디어와 쌍뱡향적이어서 자율적인 뉴 미디어 간의 위상을 재고하도록 이끈다. 예컨대 쌍방향적이고 자율적인 소통을 기술적으로 가능케 하는 뉴 미디어가 어떠한 현실적 변혁도 이끌어 내지 못한다면, (물론 전제적이거나 억압적인 체계로 귀결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일방향적이고 강제적이긴 하지만 아주 작은 변혁이라도 이끌어내는 올드 미디어 보다 낫은 점이 무엇이겠는가.  

다시 김예슬 선언을 보자. 이 선언의 내용을 담아내는 대자보라는 매체형식은 기술적 차원에서 따져봤을 때 다분히 일방향적이며 강제적이다. 하지만 앞서의 논의를 바탕으로 일방향성과 강제성에 대한 가치판단을 유보한 체 김예슬 선언과 대자보의 관계를 톺아보면, 일방향성과 강제성은 김예슬 선언을 제약하는 요소 혹은 부차적인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그 내용과 공명하는 필수적인 요소임이 드러난다. 그 내용이란 것이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질주에 허덕여온 한 개인의 실존적 결단을 일방적으로 현시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결단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동참을 강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는 한편으로 김예슬 선언의 또 다른 형식적 특징, 즉 ‘선언’이라는 발화형식과도 맞닿는다. 선언은 언제나 현실의 불의를 부정하며 미래의 변화를 일갈하는 당위적 외침이었다. 즉 그것은 참여나 공유로의 초대가 아니라 계몽과 각성의 촉구였다. 
  
물론 모든 소통이 오직 사회의 변혁이라는 목적에 묶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모두가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는 이 사회의 몇몇 부조리들은 부단히 소통될 필요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변혁되기 위해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방식으로 소통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소통을 뜻하는 영어단어(Communication)의 라틴어 어원(Communicare)을 뜯어보면 소통이란 공동체 문제의 돌봄, 즉 너와 나로 구성된 우리 communi- 의 ‘돌봄’ -care을 의미한다. 물론 이때의 돌봄이 현실안주나 자기보전으로 이해되어서는 곤란하다. ‘자기 배려 Epimeleia Heautou’ 라는 개념을 통해 자기를 돌본다는 것의 역사적 변용을 천작한 푸코의 논의는 돌봄의 의미에 실천적인 비틀림을 선사한다. 푸코가 얘기하는 자기 배려 혹은 자기 돌봄은 현실태로서의 자기를 부단히 깨어나가며 새로운 자기를 변형·생산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결국 소통이란 우리를 돌보는 것, 즉 현재의 우리를 부단히 창조·변형해나가는 작업인 셈이다.

매체를 바라보는 관점 또한 마찬가지이다. 다시 한 번 대자보란을 본다. 스펙에 도움이 된다는 각종 자격증 학원 광고와 공모전 포스터가 세련된 외양을 뽐낸다. 김예슬의 선언의 그것처럼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노출 앞에서 뉴 미디어에 대한 비판이 곧 올드 미디어에 대한 희구로 귀착되어서는 안 됨을 확인한다. 니체가 말했듯 시대에 대립되는 ‘반시대적 사유’는 역시나 ‘시대적 사유’의 이면일 뿐이다. 현재를 넘어서기 위해선 ‘비시대적 사유’가, 현재 속에서 미래를 ‘생성’해내는 일이 필요하다. 낡았는지 새로운지, 일방적인지 쌍방적인지, 강제적인지 자율적인지를 애써 구분하기보다는 그 매체가 나와 너, 그리고 우리 사회를 부단히 변혁시키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매체를 사유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고민거리가 아닐까. 매체에 대한 ‘비시대적 사유’가 열릴 때, 올드 미디어나 뉴 미디어라는 시대적이고 기술적 구분을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