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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15호] 우리는 오늘, 김수영을 읽는다


이은정(이화여대 강사)

흘깃 바라보기만 해도, 보는 이를 한 순간에 결박시켜버리는 사진이 있다. 푼크툼, 사진의 어떤 의외의 부분이 보는 이의 마음과 머리와 눈을 찌르듯 상흔과 자상을 남기는 순간이다. 김수영의 이 사진이야말로 몇 번을 보아도 생생한 푼크툼, 녹록치 않은 결박을 느끼게 한다. 어떤 이는 이 사진에서 ‘런닝구의 포스’를 발견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영화배우 양조위의 깊고 쓸쓸한 표정을 얘기하기도 하며, 어떤 이는 그 불온한 아우라에 일순 전염되고, 어떤 이는 그 퀭하고 형형한 눈빛에 한참 사로잡혀 있기도 한다. 사진 속의 김수영은 뺨을 괴고 앉아 생각에 골몰한 채 비스듬한 시선으로 묻는다. “나, 너, 우리, 어떻게 살고 있는가?”

김수영은 생전보다 사후에 각인된 시인이다. 1970년대와 8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광휘처럼 조명을 받은 시인이다. 지금은 김수영이라는 이름의 무게와 부피 자체가 너무 커져서 한 시대에 속한 시인이 아니라 오히려 시인의 이름이 상황과 현실을 재구해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 시대 속에서 고뇌하고 고투하던 시인 김수영이 잉태되었지만, 지금은 외려 김수영이 현실의 맥락을 만들어내면서, 시인과 현실이 삼투하고 과거와 현재가 삼투한다.

김수영 신화 혹은 우상화의 시간들 속에는

시대를 거듭하며 화두는 변하게 마련이다. 어제의 신화가 오늘은 휴지쪼가리가 되기도 하고, 오늘의 우상이 내일은 한 구석에 내팽개쳐지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시간을 견디는 것이야말로 실로 위대한 일이다. 신화와 우상이 일정 시간을 견뎌내면 그것은 쉽사리 신화적 ‘현상’ 혹은 우상의 ‘파괴’로 내닫지는 않는다. 김수영의 시와 산문은 언제 어느 부분을 펼쳐보아도 마음을 달아오르게 하지만, 그의 글만 시간을 견뎌온 것은 아니다. 김수영의 정신은 자유, 양심, 정직 등의 명사로 화석화되지 않는 동사(動詞)가 되었으며 상징이자 메타포가 되었다. 현재에도 김수영의 정신은 폭포처럼 곧은 소리를 부르며 내리꽂히고,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처럼 활강하고 비상하며, 부드러운 풀처럼 눕고 일어서기를 반복한다. 신화화와 우상화의 밀도를 채우는 정신의 움직임, 김수영의 정신은 생장하는 신화다.

오늘 왜 김수영을 되풀이하여 읽는가. 김수영을 소환하고 기억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미미하고 보잘 것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와 반성에서 김수영 읽기를 시작하지만, 그 욕망들이 모이는 지점은 그의 시가 지닌 배음과 둔중한 울림, 경쾌하면서도 강고한 정신적 배면을 공유하려는 욕망이다. 당대의 정서적 혹은 정치적 금기어들을 한껏 발화했던 김수영의 시를 끈질기게 재독하는 맥락 안에는 우리 시대의 공통적 욕망이 잠재해 있다.
김수영의 삶은 시의 텍스트였다. 자신의 삶을 자기 시의 텍스트로 삼는 시인은 의외로 많지 않다. 따라서 자기 삶의 비루함 혹은 자기 환멸을 견디기 위해 고투하는 자는 거듭 김수영의 시를 읽는다. 우리 안에는 저마다 여러 자아가 있다. 바깥 세계를 내다보며 세계와의 불화 속에서 정의나 양심, 자유와 도덕에 대해 간절한 마음을 가져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한 순간일 뿐, 목전에 놓인 일상의 격랑과 광폭한 속도전에 금세 휩쓸려 들어가 버린다. 진실했던 그 순간은 진심이지만, 그 순간을 지나면 이내 그 자성의 순간을 면죄부 삼아 자신을 위무하며 다시 일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마치 예방주사를 맞으면 치명적인 중병에 걸리지 않듯 우리는 자신을 방어하는 자유와 정의를 순간순간 치레하면서 현실 위에서 위태롭게 운신하듯 살아간다.  

그런데 김수영의 시는 치열한 자기반성과 실천적 자아가 결정(結晶)화된 명징한 텍스트다. 그의 글에 비친 내 얼굴은 김수영을 닮은 듯 뜨겁고 진지하며 정직하고 자유롭다. ‘먼지야 풀아 나는 정말 얼마만큼 적으냐’라는 시인의 정직하고 간절한 일상적인 반성은 우리로 하여금 위선을 벗어던지게 하고, 시인이 ‘조금쯤 옆에 서 있다는 것을 안다’고, 게다가 ‘그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임까지 알고 있다고 말할 때, 마음속 공감의 환호를 누르기 어렵다. 우리 는 자신을 따갑고 뜨겁게 응시하는 정직하고 환한 거울을 김수영의 글에서 찾는다. 따라서 김수영을 현재화하는 작업은 반성과 자학과 진보의 쾌감을 동시에 안고 있다.

실천적 자아의 아비투스, 에토스적 독서 욕망

진실이 매끄럽게 소통되는 세계는 굳이 진실을 힘주어 말하지 않는다. 구호와 플랭카드가 여기저기 내걸려 펄럭거리는 세계는 그만큼 슬로건과 강령을 필요로 하는 세계다. 당대와 현재를 동시에 재구해내는 김수영의 시를 읽는 우리는 자의식적인 독자, 개인과 역사에 대한 방향감각을 지닌 실천적 자아의 독서욕망을 가진 독자다. 익히 알듯 김수영은 반동적인 부정의 어법, 일상어가 시가 되는 경지, 새롭고 낯선 현학적 시의 풍경으로 매력을 발휘하지만, 무엇보다도 반전통적인 것들을 철저하게 비판하는 동시에 전통적인 것의 반동을 긍정하는 시인의 결기야말로 가장 위력적이다. 맹목적 전통 추수가 아니라 역사와 전통의 ‘더러운 진창’까지 정면으로 관통해 들어감으로써 고통스럽게 얻어낸 ‘거대한 뿌리’는 당시뿐 아니라 최근 다시 조명되는 탈식민주의적 독해가 명쾌하게 성취되는 지점이다.

김수영은 현실인식을 지향하는 독자집단의 전위적 지리를 담당한 시인이자 한국시의 베스트셀러 시집의 지형도를 바꾼 시인이기도 한데, 김수영을 읽는 독자의 욕망 안에는 나르시시즘이 없지 않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 자기 안의 뜨거움이 지닌 역사적 방향 감각을 시인의 것과 일치시키고 또 자신은 늘 사회와 세계를 향해 의식을 열고 있다고 믿는 자홀감, 이것이 독자의 또 다른 욕망이다. 독자의 일정 취향 즉 아비투스(habitus)가 독자 자신의 계급을 유지시키고 동시에 그 정체성을 인정하게 하는 기제가 되므로 김수영의 시를 읽는 것은 역사와 현실에 대한 감각이 유사한 집단의 ‘구별짓기’를 통해 일종의 동류의식을 형성하기도 한다.

오늘 김수영을 읽는 독자의 욕망 안에는 자신이 지향하는 모습을 실현하려는 욕구와 자신을 현시하려는 욕구가 공존하고 있다.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들여다보려는 개인적인 욕망과 더불어, 김수영의 시를 읽음으로써 동시대 독자들과 공유하는 실천적 자아를 유지하려는 욕망이 병행하고 있다. 부연하면, 김수영의 가열한 정신에 대한 매혹, 그리고 그 치열함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려는 욕망을 실현하는 한편, 모순된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감각을 갖고 있다는 자신의 독서욕망을 충족하고 이같은 독자집단의 연대적인 독서를 통해 사회적 자아를 자기 안에 세우고 유지하려는 에토스적 욕망 또한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온몸을 던지지 않는 시대를 향한 투신의 언어

김수영의 시는 의미의 잉여가 많아 매번 새로 읽힌다. 잦은 논의로 익숙하게 읽히는 시들보다 그 바깥의 시들에서 시인의 맨 얼굴, 더 웅숭깊고 강렬한 언어를 만나기도 한다. 또한 김수영의 시를 거듭 새로 읽으면서 그의 성취와 한계들도 속속 재독되고 있다. 탈식민주의적 프리즘, 문학과 정치의 연동 등에서 새로 읽히는 생산적 의미들에 비해, 가부장제적 이데올로기의 시스템 속에 머물렀던 것은 한계로 지적되기도 한다. 김수영의 시읽기로 들어가는 정식 입구는 없는 셈이다. 외길로 보여도 다가가보면 무한히 넓은, 더 많은 십자로가 무수히 열리는 것을 봐왔던 까닭이다. 그리고 김수영 시의 진경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시선들 위에서 우리가 지금 김수영을 다시 읽으며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현재 자기 삶의 박자를 찾기 위해서이다. 김수영은 지사연(志士然)하기보다 정신의 어떤 높이와 강골의 태도 같은 것만 보여주었다. 그저 자기 정신의 높이와 궤적, 그 속도를 드러냈다. 사랑이란 결국 타자와 섞이는 운동이라는 것, 그곳에 다가가기 위해 그는 시를 썼다. 높이, 궤적, 속도, 방향, 그리고 언어. 추상적이나마 김수영의 시에 장전된 이 힘들에서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는 자기 삶의 박자를 찾아본다.

순정하게 온몸을 다해 뛰어드는 사람 없는 시대, 온몸을 다해 무엇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오늘, 온몸을 던져야 한다고 외쳤던 시인에 대한 선망은 열패감과 더불어 부풀어 오른다. 그 대상이 나든 세계든, 온몸을 던지는 것 자체가 난공불락인 이곳에서, 그의 물음은 뼈아프다. 그 뼈아픈 선망과 열패감 속에서 내 안의 타자성을 극복하고 진짜 나를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 김수영을 읽는다. 
 
명문장으로 꼽히는 글도 닳아버린 눈으로는 읽을 수 없다. 허나 젊은 우리의 눈은 살아있으니 가래 같은 더께를 뱉어내면 다시 선명하게 읽을 수 있다. 묵독 말고 기침 하듯 소리 내어 읽으면 더 잘 읽을 수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시인에게 시는 곧 삶이니 ‘시를 쓴다는 것’은 삶을 살아간다는 것과 똑같은 말이다. 차가운 지성의 ‘머리’나 뜨거운 열정의 ‘심장’만이 아닌 이 모두의 “온몸”으로 현재의 안팎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

김수영은 모리스 블랑쇼의 책을 읽고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읽고나자마자 즉시 팔아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김수영의 글이 마음에 들어 공연히 그의 책을 끼고 다닌다. 그것은 내가 지향하는 내 모습이 담긴 거울이자 구호이며 강령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