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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16호] 서바이벌에서 살아남은 것


정미지 기자


MBC ‘나는 가수다’ 의 제목이 의도한 바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한바탕 소동이 되어버린 이 뜨거운 난투극 속에 드러난 것은, 이 비장한 제목을 두고 처음부터 제작진과 시청자가 동상이몽을 꿨다는 사실이다. 이제 와서 보니 제작진은 ‘나는 (가창력 뛰어나고 경력이 화려한) 가수다.’ 라고만 외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시청자는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바이벌에 응하는) 가수다.’ 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을 지탱하는 긴장감은 분명 후자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는 가수다’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기성 가수의 서바이벌이라는 포맷 때문에 많은 우려를 샀다. 실력과 명예를 모두 가진 가수들이 어떻게 순위로 매겨지는 평가를 받아들이겠냐는 의견이 분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영희 PD는 그의 인맥과 설득으로 대단한 기획을, 아니 대단한 섭외를 이뤄냈고 한 주 한 명 탈락이라는 잔인한 룰을 강행했다. 그런데 첫 탈락자를 호명하기에 앞서 PD는 갑자기 변명을 시작한다. “2위에서 6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탈락보다는 양보의 의미입니다.” 김건모의 이름이 불리자 가수들은 모두 충격에 휩싸인 듯 보였다. 황급히 재도전이 결정되는 과정을 보면서 방송의 시청자들 또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사실 가장 충격을 받은 이는 가수도 시청자도 아닌 김영희 PD 본인이었을 것이다.

불가능할 것 같던 섭외를 가능케 한 그와 가수들과의 끈끈한 관계는, 일종의 양날의 검과 같았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가수들의 공연은 최고이므로 평가받을 수 없다고 여겼지만 시청률 바닥의 일밤을 살리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서바이벌 포맷을 끌어와야만 했다. 믿기 어렵지만, 그는 투표라는 룰이 있는데도 가수들이 상처받거나 평가받지 않는 유토피아를 꿈꿨나보다. “내가 좋아하는 김건모가 탈락해서 슬프단 말이야” 라는 이소라의 말을 그대로 내보낸 것은 그 말이 바로 PD의 본심이기 때문이다. 고별무대나 탈락의 순간을 완화시킬 그 어떤 대책도 마련해놓지 않았던 PD는 어리석을 만큼 순진했고, 자신이 만든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재도전 논란이 있기 전부터 문제가 되었던 것은 가수들의 공연을 훼손하는 편집이었다. 가수에 따라 편집 분량이 현저히 차이가 나서 김건모, 이소라와 같은 가수는 풀 공연이 전파를 타는 반면 박정현, 정엽의 경우는 절반 이상이 잘려나가는 식이었다. ‘나는 가수다’의 선배 우대 정책은 이미 사건 이전부터 많은 이의 공분을 사고 있었다. 후배들이 선배의 탈락에 안타까워하는 것은 있을 법하지만, 룰의 집행자가 그 선배의 손을 들어주고 룰을 바꾸기 시작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시청자들이 바라는 ‘공정성’이란 사실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인맥과 서열로 포장된 부조리함에 치이다가 기껏 웃으려고 보는 예능에서까지 지긋지긋한 선배타령을 보고 싶진 않았을 뿐이다. 따지고 보면, 가수가 한 주 더 공연하느냐 여부가 뭐 그렇게 대수인가.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갑자기 룰을 바꾸는 그 짧은 장면이, 사력을 다해 노력해도 기득권층이 쉽게 뒤엎어버리는 현실과 닮은 매우 불쾌한 장면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물론 김PD의 말대로 순위나 서바이벌이라는 룰은 그 자체로 어떤 가치나 의미도 없다. 하지만 이 쇼에서 그것은 훌륭한 음악을 가능케 하는 토대였다. 시끄러웠던 소동 뒤에도 사람들이 이 프로그램을 여전히 기대한다면, 이는 비의미적 토대 덕분에 음악의 의미를 비로소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핏줄이 터지고 손을 떨어가며 노래를 부르는 데뷔 20년차의 가수와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듣는 청중의 모습은 이를 정확히 보여준다. 이미 지나간 노래조차 지금-여기의 노래로 현재화하는 것은 분명 노래 자체의 좋고 나쁨 때문이 아니다. 떨림과 울림 가운데 비로소 노래가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찾았다면 앞서 말한 비(非)의미적 형식은 결코 무(無)의미하지만은 않은 것이다. 김수현 작가의 말대로 이 쇼가 교활한 게 맞긴 한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