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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글

[118호] at issue


할 줄 아는 게 공부밖에 없는지라(그렇다고 잘한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거죠.) 학교 와서 집에 갈 때까지 책만 보다보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이래저래 눈짐작으로라도 챙겨보려 하지만 지나치기 쉬운 사건들이나 언뜻 봐서는 이해하기 힘든 사건들의 경우 아무래도 놓치고 말 때가 많습니다. 더군다나 ‘이게 도무지 나랑 무슨 관련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사건의 경우, 아예 관심조차 안 가질 때가 부지기수입니다. 이런 과정이 계속되다 보니 이제는 먹고 사는 것 이외에는 다른 관심을 가질 여유도 의지도 점차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어느 순간 이러다 꼰대가 되는 건 아닌지 무서워지더군요. 아뿔싸.

부랴부랴 신문을 펼칩니다. 이것저것 주간지도 좀 챙깁니다. 인터넷은 안 뒤집니다. 괜히 딴 짓 할까 봐요. 영국에서 폭동이 났군요. 아, 이건 아는 거네요. 미국의 신용등급이 강등된 모양입니다. 이것도 아는 거네요. 아, 아니네요. 자세히 읽다보니 대충 알던 내용이랑은 좀 다른 것 같아요. 한 꺼풀 안을 살펴보니 이건 뭐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매달려 나옵니다. 대처(M. Thatcher) 이후의 신자유주의가 영국 폭동과 엮이더니 미국 금융위기에 이어 리비아 민주혁명으로 심지어는 복지논쟁까지, 이 모든 게 긴밀한 ‘구조연관’ 안에 기입되어 있었네요. 그런데 이마저도 딱 잘라 무엇 때문이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는 모양입니다. 신자유주의가 만병의 근원은 아니니까요. 답이 없는 물음이기에 여기저기에서 각양각색의 목소리들이 넘쳐납니다. 하나로 마름질할 수 없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서로 교차하고 간섭하면서 계쟁(係爭)을 만들어 냅니다. 계쟁, 즉 권리를 얻기 위한 다툼 말입니다. 

자신들의 몫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계쟁은 기존의 질서가 배분한 위치와 기능의 분할선을 의문에 부치는 과정입니다. 예컨대, 리비아의 민주혁명은 카다피가 구획한 질서 및 정당화의 체계를 가로지르는 것이자 이러한 체계가 갖는 위계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최근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위도 이와 비슷합니다. 시장의 자유를 최우선으로 하는 체계가 현재의 위기를 낳았다면, 당연히 이 체계의 근거 없음을 밝히고 지금까지 박탈당했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시작이겠지요. 한국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복지 논쟁 역시 빈부에 따른 나눔을 지움으로써 기존의 셈법을 흐트러뜨리는 계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권리를 주장한 결과로 받게 되는 ‘몫’이 아니라 몫을 얻기 위해 스스로의 언어와 역량을 배가하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당연한 말인가요?

이번 호에서는 최근 큰 이슈가 되고 있는 주요 사건들을 짚어 봤습니다. 그런데 ‘이슈’라는 단어에는 ‘계쟁’이라는 뜻과 함께 ‘불화’라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권리가 없는(혹은 박탈된) 상태를 전제하기에,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 자들의 요구는 이미-항상 불화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의 요구는 언어가 아니라 하나의 외침으로 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불화와 함께 비로소 존재하는 이들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우리이기도 합니다. 앞서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알지 못한다고 푸념한 것은 몫을 요구하지도 불화에 참여하지도 않는 무던한 삶을 반성하기 위해서입니다. 계속해서 이슈를 만들어 내는 것, 즉 계쟁이자 또한 동시에 불화인 이슈의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것, 이는 스스로의 언어를 갖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호의 목적은 주요 이슈에 관심을 갖자는 게 아닙니다. 불화를 두려워 맙시다. 이 말이 하고 싶었습니다.

편집장 박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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