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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18호] 복지와 노동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다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복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마 무상급식이나 반값 등록금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 비정규 일자리를 줄이고 차별을 없애는 것이 복지일까 아니면 복지와는 상관없는 노동문제일까? 대졸 청년에게 좋은 일자리를 보장하고 구직수당을 주는 것은 복지일까 아니면 그것 역시 노동문제일 뿐일까? 한국의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한다. 또한 국가는 “사회적․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임금의 보장에 노력하여야 하며(제32조 1항)”, “사회보장·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제34조 2항)”고도 한다. 한국의 헌법은 복지정책과 노동정책이 동전의 양면이며 상당부분 국가의 의무라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대답은 단순하다. 복지와 노동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복지국가의 출발, 인간의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

이는 복지국가를 이룬 선진국의 예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복지국가는 일자리를 찾지 못하거나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시민의 권리를 갖게 하기 위한 체제로 출발했다. 경제적 고통을 겪지 않도록 보장하는 복지국가의 시작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1944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발표된 필라델피아 선언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세계의 주요 정부, 기업, 노동 대표자는 “인간의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제 1항)”, “일부의 빈곤은 전체의 번영을 위태롭게 한다(제3항)” 등 네 개 조항에 합의한다. 임금 격차가 없는 정규 노동, 즉 ‘공정노동’을 보장하고 ‘사회보장’ 제도를 결합하여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빈곤의 고통 없이 인간답게 살게 하는 것이 노·사·정의 주요한 목표라는데 의견 일치를 한 것이다.
 
외국의 노동조합이나 노동자, 청년 구직자 등의 노동예비군은 일찌감치 보편적 복지에 관심을 기울였다. 일하는 대가로 받는 임금에만 목을 매달아서는 경제 변동에 끊임없이 휘둘리는데다가 먹고 살기 위한 일자리 지키기 외에는 다른 꿈을 꿀 수 없기 때문이다. 기업과 시장에게 경쟁과 효율은 최고의 가치일 수 있지만 기업과 시장이 속해있는 사회는 경쟁과 효율 그 이상의 가치를 요구한다. 그래서 선진국 노동계의 핵심이슈는 인간으로서의 기본 권리 확보를 위한 노동의 탈상품화, 즉 공정노동과 사회보장이었다. 때문에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동일한 업무이면 기본임금 차이가 거의 없다. 이것은 노동조합과 기업 그리고 국가가 사회적 교섭을 통해 임금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또한 노동의 사회적 가치를 인정하여 형평성을 확대한다. 예를 들어 환경미화원이 일주일 동안 일을 쉬면 삶이 매우 불편해진다. 주변이 악취로 넘쳐 난다. 반면 연구자나 교수는 한 달 정도 없어도 그처럼 불편하지 않다. 때문에 외국에서는 환경 미화와 같은 일자리를 단순 노동으로 폄하하지 않고 그 사회적 가치를 인정하며, 그 결과 교수와 환경미화원의 임금격차가 한국처럼 크지 않다.

청년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구직에 대한 지원과 실직 위험에 대한 보호가 광범위하다. 직장에 다니다가 학업을 더 하거나 직업훈련을 받아 더 나은 일자리를 찾는 것이 쉽고, 그 비용 역시 무료이거나 매우 싸서 학자금 대출로 인해 빚더미에 몰리지 않는다. 물론 외국에서도 청년 일자리 상황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노동유연화가 노동권을 훼손하여 일부 청년층 특히 이주청년의 상황은 한국의 현실과 유사할 정도로 나빠졌다. 하지만 복지 이야기만 나오면 인기영합주의(포퓰리즘)라는 비난을 받는 한국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공정노동 없는 반값 등록금?

그렇다면 왜 한국에서는 복지국가 논쟁을 해도 노동과 복지가 전혀 다른 것처럼 이해될까? 비정규직이나 저임금 노동문제, 차별 및 노동권 유린, 낮은 노동조합 조직율과 단체협약 적용률 등의 개선을 통한 공정노동 확립과 사회보험·주택·교육·의료·조세에서의 공공성 확보를 연결시키기 어려운 것일까? 복지국가 논쟁이 아직 시작에 불과한데다가 그 시작이 무상급식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게다가 반값 등록금 논쟁이 다루어지는 방식을 보면 적잖은 우려가 생긴다. 왜냐하면 공정노동 없는 반값 등록금은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주저앉는 격이기 때문이다.

사실 학비가 조금 비싸더라도 졸업 후 괜찮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으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졸업 후 가고 싶은 기업, 예를 들어 300인 이상 혹은 1,000인 이상 대기업 일자리는 1993년 전체의 13.6%에서 2009년 6.1%로 반토막이 났다. 대학 진학률이 80%를 넘고 기업이익이 수조원을 넘는 호황이라는데 그에 걸맞은 일자리는 오히려 줄고 있다. 반면 비정규 일자리나 중소영세사업장 일자리는 더 늘어나고 있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2011년 3월 현재 한국 노동자의 33.8%(577만명)가 비정규직이다. 노동계는 이보다 좀 더 많은 48.7%라고 발표했다. 10명 중 4명 내지 5명이 비정규직인 것이다. 1988년 도입된 법정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2010년 당시 196만명(11.5%)이었으며 저임금 근로자는 26.5%에 달한다.

공기업 등 공공부문도 마찬가지이다. 2003년 설립된 A공기업은 처음부터 정규직 700명과 비정규직 3,500명의 일자리로 설계되었는데, 연 10%대의 이윤율을 낸 이후인 2010년 말에도 정규직 800명과 비정규직 5,936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의 비중이 742%이다. 또한 공공부문의 간접고용 비정규직 비중이 민간 부문보다 20% 정도 더 높다. 그래서 공공부문 취업문은 나날이 좁아지고 대기업 역시 비정규직 일자리가 넘쳐난다. 그 주요한 이유가 대기업의 마구잡이식 아웃소싱 때문이라는 연구결과도 있다.

중소기업이라도 임금격차나 일자리 불안정만 아니면 대기업에 못지않을 수 있다. 하지만 300인 이상 대기업과 100인 미만 중소기업의 평균 임금은 50% 차이가 있으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도 그러하다. 차별시정 제도가 도입되었으나 차별이 사라졌다는 보고는 없다. 게다가 비정규직이나 저임금 노동자는 노동3권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걸핏하면 사용주의 손해배상청구에 시달리는 등 위법을 저지른 사용주는 과태료만 내고 마는데 노동자는 업무방해 등의 이유로 구속을 각오해야 한다.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으면 그나마 항의라도 해보겠지만 전체 노동자의 조직률은 10.3%이고 그 중에서도 비정규직 조직률은 3.1%(2010년)에 불과하다. 전체 임금 노동자의 50%가 취업하고 있는 30인 미만 사업장의 노조 조직률은 0.2% 이다. 따라서 반값 등록금 이상으로 괜찮은 일자리, 공정노동이 중요하다. 반값 등록금에 그쳐서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입을 닫아버린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또한 불평등·불공정을 그대로 둔 채 도입하는 복지는 일부 취약집단을 보조하는 잔여적 복지에 불과할 수 있다. 어려운 사람을 지원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이 역시 사회권과 시민권의 보편적인 도입을 전제로 할 때에만 의미가 있다. 평등한 기회와 적절한 사회보장 없이 경쟁만을 우선시하고, 경쟁 끝에 낙오한 사람에게 자선을 행하는 것은 생선 잡는 기술은 가르치지 않고 생선을 던져주는 것과 같다.

보편적 복지를 말하기 위해 다시 노동을 말해야 할 때

요컨대, 저임금이나 비정규직이 많을수록 복지 재정 또한 많아야 한다. 하지만 차별받는 사람은 조세를 납부할 돈이 없고, 반대로 차별하는 현실에서 이익을 얻는 사람은 굳이 복지에 관심을 기울일 이유가 없다. 그래서 보편적 복지는 불가능해진다. 때문에 좋은 일자리와 납세능력을 가진 시민이야말로 복지국가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만약 한국의 노동조합이나 노동자들이 복지국가, 특히 공정노동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복지국가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예비 노동자인 청년, 대학생이 스펙 쌓기와 취업준비에 들이는 관심만큼 공정노동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반값 등록금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끊임없이 취업 눈높이가 높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될 뿐이다. 태어나서 졸업할 때 까지 너는 명품이니 눈높이를 높이라는 소리만을 듣다가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이제 너는 비용이니 눈높이를 낮추라고 하니 쉽게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좋은 일자리를 찾을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할 수는 있다. 누가 청년의 희망에 단서를 달겠는가. 문제는 이제 희망인지 공상인지를 판단해야 할 시점이라는데 있다. 

얼마 전 신문에 커피숍에서 근무하던 아르바이트 학생이 주휴수당을 주지 않았다고 해당 기업을 고소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런 것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하지만 모니터링하고 위반행위를 고소할 수 있는 노동조합의 수가 적기 때문에 시민단체나 청년의 의지가 매우 중요하다. 때문에 이 학생의 고소는 작은 행위이지만 큰 걸음일 수 있다. 청년이 스펙 쌓기만이 아니라 스펙 지키기를 위해, 일하는 동물이 아니라 존엄한 인간이기 위해 법을 지켜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기성세대의 요구보다 더 중요하다. 청년의 힘이 곧 나라의 힘이고 미래의 힘이기 때문이다.

반값 등록금 요구가 모두의 노동권 지키기 운동으로 바뀌는 것, 청년이 공정노동 확보를 위한 복지국가 논의에 뛰어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노동과 복지를 결합해 복지국가를 이루는 바른 길이다. 복지국가는 주어지는 것도 아니며 운명도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 곧 시민의 열망과 의지, 실천의 결과물이다. 열망이 없으면 복지국가도 없다. 열망이 춤추면 복지국가는 곧 우리의 미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