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획

[118호] 카다피의 트리폴리 퇴각, 리비아는 어디로?


문이얼 (아이비스 에너지 전략 연구소)

리비아 민주항쟁의 배경

카다피가 나토의 공습과 반군의 공세에 밀려 트리폴리에서 퇴각하면서 리비아 사태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고 있다. 향후 리비아 사태에 대한 장기적인 전망을 하기 위해서는 리비아 사태 진행 과정에서 드러난 다양한 모순관계를 볼 필요가 있다. 

지난 1969년 친서방 경향의 국왕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이집트의 나세르가 주창한 아랍 민족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은 카다피가 권력을 잡았다. 당시 국왕은 벌어들인 석유 대금을 리비아 대중들의 필요에 맞게 제대로 분배하지 않았고, 이러한 상황 때문에 리비아 대중들은 카다피의 쿠데타를 묵인했다. 리비아는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식민지배를 받았고, 사회적으로 매우 낙후되어있었기 때문에 쿠데타 성공 이후 카다피는 몇 가지 급진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카다피는 우선 리비아 주둔 미군 공군기지를 철수시켜 외세의 지배를 거부했고, 정부가 직접 석유 자원을 통제하여 이전보다 서방측으로부터 더 많은 석유 판매 대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석유 수입은 주로 주택보장과 의료보장 등 사회 보장에 충당되었고, 토지 재분배도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아울러 아랍 민족주의자답게 서방측에 도전하면서 분열된 아랍민족들의 단결을 위해 애썼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리비아는 경기침체에 빠졌고 이에 따라 대중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1986년 미국은 서독주둔 미군장교클럽 폭파사건에 리비아가 연루되었다고 단정하고 리비아의 수도인 트리폴리와 벵가지를 보복 폭격하고, 리비아에 대해 경제적 제재를 가했다. 이런 미국의 군사·경제적 공격에 리비아 국민들은 카다피에 대한 불만을 잠시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카다피는 당시 전 세계에 유행처럼 번진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이 리비아의 침체된 경제상황 개선과 권력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보고 다음 해인 1987년부터 국제통화기금의 처방에 따라 점차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수입대체 경제정책은 폐기되고, 농업과 산업부문에서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이 도입되었다. 이 때문에 농민과 노동자, 자영업자의 불만이 증가했지만, 1992년 유엔의 리비아 경제제재 때문에 이러한 불만은 재차 ‘주권 수호’, ‘제재 반대’라는 구호 속에 억제되었다. 지난 2000년 초반부터는 카다피 정권이 ‘카다피 혁명’의 성과라고 할 수 있는 국유기업의 민영화를 추진하고, 자유무역지대 창설을 밀어 붙였다. 일부 사람들은 카다피가 정치적 주권을 지나치게 양보한다고도 비판했는데, 결국 카다피는 2004년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고 서방과 타협했다.

1993년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에 의한 카다피 암살미수 사건이 발생하자 카다피는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에 대한 강경책을 쓰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지난 2001년 9/11 테러 사건 이후, 카다피는 재빨리 미국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이후 카다피는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군에 저항해 싸우고 있던 리비아 출신 이슬람주의 전사들을 체포하는데 미국과 공모했다. 또 카다피는 각종 정책적 차원에서 다른 부족들이나 지역을 홀대하고 자기부족 출신들을 국가 요직에 등용했는데 이는 다른 부족이나 지역의 불만을 불러 일으켰다.
 
반(反)카다피군의 특징과 서방의 정치적 계산

현재 리비아의 반카다피군은 기존의 카다피 정권에서 이탈한 이들과 정부로부터 억압받던 민중들이 섞여있다. 전자는 기본적으로 카다피 정권 하에서 진행되었던 민중 탄압과 서방과의 타협 및 거래에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충실히 수행했던 인물들이었다. 이 점에서 이들은 카다피가 서방에 대해 취했던 태도에 반대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반카다피군 내에는 급진적 이슬람주의자들도 있는데, 이들은 카다피를 몰아낸다는 목적 하에 친서방 구체제측 인사들과 일시적인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카다피에 대항하여 싸우는 과정에서도 이들 사이에는 끊임없이 불신과 긴장, 적대감이 표출되었다. 예컨대, 지난 7월 말 반군 사령관인 유니스가 이슬람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된 일이 그것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유니스가 나토와 결탁하여 자신들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기에 그를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리비아 국가과도위원회의 유럽 지역 대표자로 임명된 한 리비아 관리 역시 유니스가 지나치게 이슬람주의적인 반군의 위치를 나토에 알려주어 폭격하게 했다고 인정한 바 있다. 실제로 리비아 내전 과정에서 반군에 대한 나토의 오폭사건들이 많았는데, 이 가운데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이 관리는 카다피에 대항해 싸우는 반군들의 70% 이상이 나토와 서방측의 군사적 개입을 반대하는 이슬람주의자들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리비아의 저명한 종교 지도자인 셰이크 알리 살라비는 리비아 국가과도위원회의 핵심적인 지위에 있는 인사들이 리비아 혁명을 훔치려는 친서방 꼭두각시라며 사퇴할 것을 주장했다.

서방은 카다피와 미국이 화해한 이후 카다피가 자행하던 잔혹한 반대파 탄압에 침묵했고, 각종 무기들과 시위진압용 물품들을 리비아로 수출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리비아에 대한 서방의 군사적 개입은 정치적 도덕성이라는 면에서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서방은 왜 리비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려고 했던 것일까? 가장 중요한 이유로는 석유 문제가 있다. 그동안 서방은 카다피와의 타협 이후로 다국적 석유 회사들을 리비아 석유산업 부문에 진출시켰다. 그러나 리비아 민주항쟁의 여파로, 무장한 리비아 민중들이 석유 관련 시설을 통제하기 시작한데다가 이 투쟁이 아랍 민주항쟁의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자극할 우려도 있었기에, 서방 국가들은 더 적극적으로 사태에 개입해야만 했다. 이를 위한 핑계가 바로 ‘인도주의적 개입’이다. 그러나 이런 ‘인도주의적 개입’은 사실 민중 봉기를 약화시켜, 카다피 구체제에서 이탈한 반카다피 세력들로 하여금 혁명에 대한 통제력를 회복하고 구질서로 회귀하게 돕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서방의 대응 사이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이는 리비아에 대해 각국이 가지고 있는 이해관계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문제였다. 먼저 리비아에서 생산된 석유의 대부분은 영국과 프랑스가 위치한 유럽으로 보내지기 때문에 이들 국가들은 미국보다 리비아의 석유 문제에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반면 국내 경제가 심각한 상황이고 이미 두 개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미국은 리비아에 대한 이해관계가 그나마 덜 한 편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리비아 사태에 대한 무대응이 자칫 제국의 위신과 영향력에 상처를 낼 가능성을 고려해야 했고, 아랍 혁명의 물결 속에서 자신들 역시 아랍의 친구인 것처럼 서둘러 가장할 필요도 있었다.

‘제2의 혁명’으로 나아가고 있는 리비아 혁명

카다피가 트리폴리에서 퇴각한 상황에서 문제의 초점은 정부 구성과 질서 회복일 텐데, 여기서 관건은 서방과 이후 구성될 리비아 정부 그리고 이슬람주의 반군들 사이의 관계이다. 우선 리비아 국가과도위원회에서 핵심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대개 친서방 인물들이다. 이후 이들이 구성할 정부는 서방 및 다국적 석유기업과 매우 가까운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들이 그러한 결탁을 하면 할수록 이슬람주의자들이나 민중들로부터 저항을 받을 가능성 또한 높아진다. 게다가 정부 구성을 놓고 적대적인 분파들이 경쟁적으로 난립하여 갈등이 커지게 되면서, 이후 구성될 리비아 정부는 만성적인 혼란과 마비 상태를 겪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리비아 반군들의 무장 해제가 신속히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친서방 리비아 정부의 사태 장악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불안정을 해결하기 위해 리비아에 대한 나토 공습에 참여했던 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지상군 파병이 논의될 수도 있지만 이 또한 쉽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유럽 국가들이 재정위기에 빠져 군사비 감축을 하고 있는 마당에 대규모 지상군을 파병하는 것은 단순한 공습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설사 서방의 지상군이 리비아의 안정을 위해 개입한다 해도 이 과정에서 나토군이 행사할 폭력에 대해 리비아 민중들의 저항만을 촉발할 가능성이 많다. 이런 상황은 북아프리카 사막에 또 하나의 이라크를 재현하는 것이다. 설사 나토측이 친서방 리비아 정부에 순전히 정치적, 경제적 지원만을 제공한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만약 리비아의 정치·경제적 상황이 빠른 시일 내에 개선되지 않거나 혹은 악화되고, 더 나아가 이후 구성될 친서방 경향의 리비아 정부가 대중들의 다양한 정치적·경제적 요구들을 탄압할 경우, 나토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리비아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인 석유 시설을 원상복구 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점도 이런 압박을 크게 만들 것이다). 무엇보다 리비아는 이라크와 중요한 차이점 하나가 있다. 즉 리비아에는 이라크와 달리 현지 주둔 외국군이 없기 때문에 리비아 정부가 서방에 의해 지원받을 수 있는 폭이 제한된 반면, 이에 대항하는 다양한 반군들과 민중들은 행동의 자율성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비록 서방측의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이라크와 달리 리비아 민중들은 엄연히 자신들의 손으로 카다피를 쫓아냈다는 점이다. 어쩌면 리비아는 이제 ‘제2의 혁명’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