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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글

[119호] 감수성


감정이 메말랐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기쁘거나 화가 나지도 않고 슬프거나 유쾌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무덤덤하기만 합니다. 이외에 어떤 감정이 있는지 잘 떠오르지가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 갸우뚱해집니다. 우울한 것만도 아닌 이런 감정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지만 이 또한 풍부한 감정을 요구하는 까닭에 스스로도 이게 도대체 어떤 감정인지 헷갈리곤 합니다. 편의상 ‘애매한’ 감정이라고 부를까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애매한 감정을 표현하는 게 상황을 더 애매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연기하는 법을 터득했지만 혼자 있을 때 혹은 여럿 중에 혼자 섬이 될 때는 어느새 이 애매한 감정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남들이 웃을 때 울고 울을 때 웃을 수 있으면 차라리 낫겠지만 남들이 웃거나 울거나 상관없이 애매한 상태로 지속되는 이 감정을 도무지 떨쳐낼 수가 없습니다. 외로움도 우울도 아닌, 짜증도 좌절도 분노도 아닌, 관조나 무관심도 아닌, 기쁨이나 즐거움은 더더욱 아닌, 애매함 그 자체. 어쩌면 저는 이 감정의 정체를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을 잃었는지도 모릅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서점에서 시집을 하나 샀습니다. 시집을 산 건 처음입니다. 제목이 강렬합니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그러고 보니 소설을 읽은 적도 시를 읽은 적도 기억 속에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 중에는 소설책과 시집이 단 한 권도 없습니다. 아, 갑자기 부끄러움이 밀려옵니다. 소설과 시를 알지 못하고 살아온 삶에 대한 회한 때문이 아니라 소설과 시가 없어도 잘 살 수 있다고 자신했던 만용과 오만이 들통 났기 때문입니다. 대학원 내내 훈련했던 비판적 사고가 삶까지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건 아닌지, 텍스트를 읽어내는 방법론적 엄밀성으로 생동하는 삶을 평면화한 건 아닌지 고민이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 종일 책과 씨름하다보면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사람을 대하고 삶을 대하기 십상이거든요. 책 속의 회색빛 말들이 삶 속으로 전치되는 것도 이상하지만은 않습니다. 날 선 비판 외에는 아무 것도, 떨어지는 낙엽의 쓸쓸함도 추운 아침의 부산스러움도 따뜻한 커피의 그윽함도 담아낼 수 없는 빈곤한 말이 애매한 감정과 맞닿아 있는 건 아닐까요.

성급한 다짐일수도 있습니다. 당장 기말 페이퍼와 종합시험, 밀려 있는 전공 서적들과 아직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논문까지,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한가하게 소설이나 시를 읽을 여유가 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한가하게’ 시간을 내 보려 합니다. 작은 커피숍에 앉아 잠시나마 인터넷을 닫고 종이 넘기는 한가로움을 느껴보려 합니다. 감정에는 애매한 감정 말고도 애틋함, 애잔함, 애석함, 애절함 등 미세하지만 확연히 다른 여러 감정들이 있음을, 그리고 저에게도 이런 감정이 있음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소설이나 시를 읽는다고 감수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급하게’ 시도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네요. 변화는 실패한 시도들과 실패할 시도들을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가능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작으로 이번 호에서는 소설과 시 그리고 만화를 소개하려 합니다. 아마 많은 학우들이 학업과 논문에 지쳐 감수성(性)을 감수성(城)인 줄로만 알고 있을 것 같네요. 부디 대학원신문 지면을 통해서라도 성급한 시도에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앞서 말한 시집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닫습니다.

“사람이 시 없이 살 수 있는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시 없이 살고 있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살고 있는 것은 현실에 대한 그들의 관념일 뿐이다.” -이성복

편집장 박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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