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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119호] 우리 커피 한 잔 해요

글. 사진 송주현 기자

 설렘... 우연히 마주치다 Cappuccino


알람 소리에 잠을 깼다. 요즘 들어 왜 이렇게 일어나기가 힘든 걸까.
몇 분의 잠이 간절하지만, 이미 ‘오늘 해야 할 일’을 떠올린 기특한 기억력을 원망하며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차가운 아침 공기가 졸음 섞인 눈가에 상큼하게 닿는다.
조용한 공간을 찾아 헤매다 골목 안쪽에 위치한 카페 ‘달달한 하루’에 들어선다.
따뜻한 햇살 때문일까, 여느 때와 달리 몽롱한 기분을 쉽게 떨치고 싶지 않아
부드러운 거품이 가득한 카푸치노를 주문하고 구석 자리를 찾아 앉는다.
우연히 발견한 예쁜 카페에 들어설 때면 마치 어릴 적 만화에 나오는 ‘마법의 문’을 통해다른 세계로 빠져드는 듯한 묘한 설렘이 느껴지곤 한다. 창밖으로 보이는 일상은 여전하지만 카푸치노 한 모금, 익숙한 세계를 벗어나는 마법에 걸린다.
 



오랫동안 모니터를 보고 있으니 목이 뻐근하다.
목을 동글게 돌리면서 주위를 살펴본다. 
카페 저 편에서 책을 읽고 있던 사람은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다.
아, 그러고 보니 저 사람도 카푸치노를 마시고 있는 듯하다.
뭔가에 몰두하고 있는지 주변의 분주함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잔잔한 음악과 진한 커피 향, 재잘거리는 목소리, 밝게 비치는 햇살 그리고 카푸치노
그도 나처럼 일상과의 단절을 통해 다시금 일상을 살아가는 위안을 얻는 걸까.

달달한 하루, 그에게도 달달한 하루이길.



카푸치노(Cappuccino): 에스프레소, 뜨거운 우유, 그리고 우유 거품으로 이루어진 커피. 여기에 코코아 가루나 계피 가루를 뿌려 먹기도 한다. 카푸치노는 카페라테에 비해 우유의 양이 훨씬 적은 게 특징.

달달한 하루: 서강대 남문, 횡단보도를 건너 걸어가다 보면 오른 편에 위치한 작은 카페. 진한 커피 향과 곳곳에 아기자기한 아이템이 눈길을 끄는 곳. 


 중독... 일상에 스며들다 Americano



그녀가 내게 말했다.
“아메리카노 같은 사람이라면, 언제까지라도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메리카노의 맛을 알지 못했을 때 이 말의 의미 역시 알지 못했다.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을 섞어 만드는 지극히 평범한 커피, 아메리카노.
커피의 달콤함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검고 쓴 물’

하지만 아메리카노를 진지하게 음미하다 보면,
커피콩의 원산지와 커피콩을 로스팅하고 그라인딩하는 정도,
커피 머신의 압력, 들어가는 물의 온도와 양 그리고
뜨거움을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머그컵 등
이 모든 것들이 미묘하게 그리고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때 그녀가 말했던 아메리카노 같은 사람이,
달콤한 말로 현혹하지 않지만 그 무던함으로 삶에 깊숙이 스며들 수 있는,
약간의 변화만으로도 전혀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블랙의 색을 간직한,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까.

때론 진하게, 때론 연하게,
언제나 내 어딘가에 그렇게 스며들어있는 사람.





아메리카노(Americano): 에스프레소에 끓는 물을 섞어 만든 커피


추억... 그 사람을 닮았다. espresso


작고 예쁜 컵에 담겨서 매력적인,
한 번에 마시기엔, 그 쓴 맛에 주저하게 되는,

어느 새 바닥을 드러내 아쉬운,
너무나도 빠르게 스쳐 지나가버린,

다시는 마시고 싶지 않은 고통,
쓴 맛이 쉽사리 잊히지 않아,

그 기억이 입가에 아련히 맴도는,
언젠가 또 다시 마시고 싶은,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쓰다.

쓰디 쓴 한 모금을 넘긴 후,
달콤한 케이크를 먹는 건,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대한 위로이자
감내하지 못한 자의 배신이다.


에스프레소(espresso): 고압·고온 하의 물을 미세하게 분쇄한 커피 가루에 가해 추출해내는 고농축 커피의 일종.

카페 싯따, 숨도(soom do)
서강대 남문 쪽 하이마트를 지나 길 건너편에 위치한 카페. 카페를 문화 공간의 일부로 사용하며 커피와 책, 전시, 인문 강연 등을 함께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기다림... 세 시간이 흘렀다. Dutch Coffee

말이 없는 두 남녀가 서로의 시선을 피한 채 커피 잔을 만지작만지작 한다.
그들의 모양새가 흥미로워 나도 모르게 시선을 옮기 운다.
어떤 상황일까? 고백의 순간일까, 이별의 순간일까.
표정에서 읽을 수 없는 미묘한 긴장과 식어가는 커피를 보며,
아무리 쿨한 것이 좋다고 외치는 세상이지만 기다림과 떨림은 여전하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숨죽인다.
 
문득 어느 드라마에선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뜨거운 피를 가진 사람이 언제나 쿨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고 본다. 나는.”
사람들에겐 이성보다는 감성이 더욱 강하게 작용하는 어느 시점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확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불안과
돌이킬 수 없는 질주에 대한 후회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출처를 알 수 없는 그 무언가에 이끌려
뜨거운 감성에 기꺼이 나를 맡길 수 있는 건, 열정이다.

그들을 보며 잠시 동안 떨림과 기다림을 공유하던 중,
모래시계처럼 생긴, 더치 커피 머신이 눈에 들어왔다.
‘커피계의 와인’이라는 애칭이 붙은, 더치 커피.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커피를 보며
기다림과 뜨거운 열정이 한편으로 참 많이 닮았다는 걸.

떨림과 기다림이야말로 나와 그대가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증상이 아닐까.
부러 쿨하려 하지 말고 한 방울 한 방울 모여 깊은 향을 내듯 기다려보자.
떨리는 가슴을 안은 채.

더치 커피(Dutch Coffee): 원두액을 찬물을 이용하여 한 방울씩 오랜 시간 추출하는 워터 드립 커피

CaféSSONG : 신촌역 5번 출구에서 서강대 쪽으로 올라오는 길, 첫 번째 골목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사거리 귀퉁이에서 만날 수 있는 CaféSSONG. 전문 핸드 드립 카페로 다양한 커피와 곳곳에 앤틱한 소품들에 시선이 절로 머문다. 카페 한 켠에는 음악가들을 위한, 피아노 연습공간도 마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