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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19호] 유령

윤이형



그녀가 열람실 문을 힘겹게 밀고 들어온 것은 12월 초의 어느 날, 폐관시간을 한 시간쯤 남겨둔 오후 다섯시 무렵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날따라 신착도서 목록 파일을 갈아엎느라 오후 내내 직원 모두가 커피 한잔도 못 마신 채 분주히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파일 대조작업을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내 앞에 그녀가 서 있다는 걸 알았다. 

주의 깊게 둘러본 사람은 알지도 모르겠지만, 대학 도서관 열람실은 의외로 다양한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사이클 선수복을 입고 헬멧을 쓴 땀투성이 중년 아저씨가 독일 시인의 시집을 대출해가거나, 로리타 양복을 입은 앳된 얼굴의 아가씨가 이종격투기 교본을 한아름 빌려간다거나 하는 일이 몇 번이나 있어서, 나는 웬만큼 특이해 보이는 방문객과 특이한 대출 목록에는 신경을 쓰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사람에게는 각자 사연과 개성이 있는 법이고, 도서관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장소니까. 비율로 따지자면야 두터운 수업 교재를 끼고 다니는 학부생과 대학원생들이 절대 다수였지만, 졸업한 다음이라도 이용료를 내고 정당한 절차를 거쳐 대출증을 만들기만 하면 누구나 출입하고 자료를 대출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 해도 그녀는 역시 좀 특별한 방문객이었다. 나는 내 앞에 선 방문객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털 달린 카키색 야상을 입은 그녀는 금방이라도 앞으로 쏟아져 버릴 것처럼 서 있었다. 얼핏 봐도 팔순은 넘었지 싶은 할머니였다. 아니, 아흔 살쯤 되시지 않았을까? 체구가 아주 작았고, 눈가는 오래된 우물처럼 검었다. 오랜 세월 동안 어떤 절대적 존재가 그 이마에 입술을 대고 삶의 정수를 꾸준하게, 남김없이 빨아들여버린 것 같았다. 뒤로 빗어넘긴 성긴 은발과 앙상한 손가락 마디. 생기라고 할 만한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할머니는 내 쪽을 잠시 응시하더니 주머니에서 작은 쪽지 하나를 꺼냈다.

할머니의 손가락이 연보라색 애벌레처럼 움직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할머니를 800번대 서가로 데려갔다. 밖에는 함박눈이 오는 모양이었다. 할머니의 좁은 어깨에서 떨어져 내린 눈 알갱이가 카펫 위에 자국을 남겼다. 나는 책을 손에 든 할머니가 서가 옆에 놓인 책상 앞에 편히 앉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섰다. 열람실 안에 틀어놓은 히터가 과해서 그런지 머리가 아찔하고 온몸이 휘발되어 버릴 것처럼 느껴졌다. 까마득한 윗 학번 졸업생일까? 은퇴한 노교수나 학교 관계자? 그도 아니면 혹시 손녀의 대출증을 빌려 들어온 동네 주민은 아닐까? 규정대로라면 그런 경우 신분을 확인하고 내보내야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냥 자리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너무 힘겨워 보였고, 입고 있는 낡은 면바지는 날씨에 비해 지나치게 얇은 듯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헤어지기 전의 마지막 겨울, 나는 그 책을 이 도서관에서 빌려 D와 함께 읽었다. 내가 먼저 읽은 다음 그녀에게 빌려주었고, 책을 다 읽은 그녀는 대출기한에 늦지 않게 내게 돌려주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정말 그 책을 함께 읽은 것일까? 그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D와 나 각자의 세계에 그래도 겹쳐지는 부분이 어딘가 있음을 기억해보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그 책은 어느 추운 나라의 작가가 쓴 그리 길지 않은 소설이었다.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는 젊은 남자주인공 앞에 어느 날 한 연약해 보이는 노파가 나타나 책 한 권을 찾아달라고 한다. 책을 다 읽은 노파는 도서관을 빠져나간다. 그녀가 실은 오래 전에 헤어진 여자친구라는 사실을 주인공은 그녀가 사라져버린 뒤에야 깨닫는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이 비틀린 채 흘러 그녀만이 세월의 포화를 받은 채 여전히 젊은 그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도서관을 뛰쳐나와 미친 듯 헤매지만 결코 그녀를 찾지 못한다.

나는 사실 그 이야기가 조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쩐지 자신의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여자의 목 위에 오직 아내의 얼굴만을 그려 넣었다는 화가 워터하우스의 병적인 애착이 떠오르는 이야기였다.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미래라고는 없는 남자. 여주인공만 노인으로 만들어버리는 설정이 유치한 저주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내가 D에게 그 책을 빌려준 건 단지 D가 그 작가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책을 다 읽은 D는 그 소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좋았다거나, 싫었다거나, 단 한 마디도.

그러니까, 실은 정말로 미래가 없는 것은 나였다. 나는 꿈꾸는 듯한 눈빛으로 그 작가의 작품에 관해 얘기하던 1학년 때의 D를 좋아했고, 그녀가 노트에 끄적이는 모든 글들을 좋아했고, 그런 그녀를 타들어가는 가슴으로 지켜보던 그때의 나 자신을 어쩌면 그녀보다 더 사랑했을 뿐, 3년이 흐르는 동안 우리 사이에 존재했던 무언가가 돌이킬 수 없이 변해버렸으며 우리가 공유하는 세계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사랑은 호박 속에 굳어버린 벌레처럼 내 기억 속에만 말라붙어 있었다. 집안 사정이 그다지 좋지 못했던 D는 졸업을 한 후 곧바로 대우가 좋은 직장에 취직할 예정이었고, 나는 아직 몇 년은 학교에 더 머물러 있어야 했다. 군대 때문이기도 했지만 설령 도시 빈민처럼 살더라도 글을 쓰고 싶다는 꿈 때문이기도 했다. 만약 상황이 반대였다면- 내가 현실을 선택하고, 그녀가 꿈을 지켜냈다고 해도 우리는 헤어졌을까? 나는 D를 미워하고 내 자신을 미워하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견뎠다. 하지만 그녀에게 새 남자친구가 생기고, 우리가 더 이상 공적인 자리에서도 대화하지 않게 된 다음에도 나는 그녀가 언젠가 내게 돌아올 거라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학교를 떠났고 나는 캠퍼스에 남았다. 그리고 몇 년인가가 흘렀다.

이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한 건 다른 일들보다는 육체적으로 편할 거라는 막연한 기대(나중에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 자신을 벌하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내게 영원히 나이 먹지 않는 꿈이었던 책들의 공간을 단순히 근육에 피로를 느껴가며 정리해야 할 하루치의 사물들이 있는 장소, 낭만이나 여유라고는 들어설 여지가 없는 관료적인 업무와 삭막한 밥벌이의 공간으로 바꿔놓음으로써, 나는 그녀로부터 버림받은 나와 나의 꿈을 모욕하고 저주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송아지가 일어나 걸음마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글을 쓰는 일을 그만두고는, 대출대 옆에 펼쳐진 취업준비서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내가 사랑하던 도서관은 곧 다른 많은 곳들과 다를 바 없이 지루하고 힘겨운 장소, 내게 간헐적으로 두통을 안겨주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참으로 쉽게도 말이다.

나는 어느새, 하나뿐인 열람실 출구 쪽으로 걸어올 사람이 D라고 믿고 있었다.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닮았나? 아니, 그렇지는 않았다. 이목구비도 그랬지만 전체적인 인상도 닮지는 않았다. 그 할머니의 얼굴을 한 D를 상상하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D를 만나는 일이 의미 있는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늙어서 그렇게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달라져버린 그녀. 나를 사랑하지 않은 그녀. 내게 매달리지도, 애원하지도, 아파하지도 않은 그녀. 그녀는 그 죄 때문에 혼자서 수십 년의 세월에 노출되어 풍화되어버린 것이고, 연유는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이런 식으로 그녀를 한 번 더 마주하게 되어 있다고, 오늘을 위해 지금껏 그 오랜 시간을 기다려온 거라고, 나는 취한 사람처럼 생각했다. 그리고 그 바보 같은 소설 속 주인공처럼 그녀를 놓쳐버리지는 않겠다고도.

폐관시간인 여섯시에서 십분이 더 지나도록 할머니는 열람실을 나서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조금 비틀거리며 그녀가 앉아 있던 800번대 서가 쪽으로 걸어갔다. 그 책의 줄거리를 머릿속으로 되감으면서.

도서관에서 일하는 젊은 남자주인공 앞에 어느 날 한 연약해 보이는 노파가 나타난다. 책 한 권을 빌려 읽은 뒤 노파는 도서관을 빠져나간다. 주인공은 그녀가 사라져버린 다음에야 깨닫는다. 그녀가 실은 오래 전에 헤어진 여자친구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녀를 떠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 뒤 자신을 속이는 일을 거듭하면서 살다가 사고로 일찍 목숨을 달리한 자신과는 달리, 그녀는 여전히 세월 속에 살아남아 모든 것을 견디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게 그 소설의 진짜 줄거리였다. 기억을 비틀고 역사를 왜곡하고, 자신의 죄를 떠나지 못하는 지박령의 이야기.

정말 그랬던가? 그녀에게 진심을 말할 용기가 없어 비겁하게도 책 뒤로 숨는 방법을 택하고, 그녀와 내가 사랑하던 도서관을 저주의 공간으로 바꿔버린 그 이상한 이야기 속 인물은 정말 나였을까? 그러니까, 살아 있던 어떤 순간에도 충분히 살아 있다고 느껴보지 못한 이 나일까? 대체 얼마만큼의 시간이 흐른 것일까. 아니, 애초부터 그 할머니는 정말 D였을까.

모퉁이를 돌았다. 서가 옆 책상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여전히 책장을 넘기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여전히 조금 젖어 있는 그녀의 앙상한 어깨 위로 드리워진 가느다란 은발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살아 있습니까? 그리고 나는 살아 있습니까? 정말로 이상하고 부조리한 부탁이지만, 부디 우리 둘 다 살아 있다고 말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대답을 듣고 싶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윤이형   
2005년 중앙신인문학상에 단편소설 「검은 불가사리」가 당선되며 등단했다. 소설집 『셋을 위한 왈츠』,『큰 늑대 파랑』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