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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119호]『신자유주의의 탄생』의 저자 장석준에게 묻다.

 


인터뷰 및 정리 박승일


“미래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자료는 역사다. 우리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시작된 그때의 광경을 돌이켜봐야 한다. 한 시대가 저물고 혼돈이 찾아왔던 1970년대에, 인류에게는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방향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것일까?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인류의 정해진 운명이 아니었다면, 지난 30여 년간의 세계사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신자유주의 지구화는 막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Q 이 책을 관통하는 주요한 문제설정은 무엇인가요.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라는 물음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A 이 책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어요. 첫 번째는 지금까지 신자유주의를 좁은 의미에서의 경제적인 흐름으로만 바라봤었는데, 그보다는 이에 대비되는 정치적인 시각에서 신자유주의를 바라봐야 한다는 겁니다. 두 번째로 이 정치라는 것을 국민 국가 내에서의 정치적 절차와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실천들로 환원해서 생각하기 쉬운데, 신자유주의 자체가 이미 전지구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여러 층위에서 복합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거예요. 국민 국가뿐만 아니라 지구 질서까지 포함하는, 다시 말해 지구경제정치적인 시각에서 신자유주의를 바라봐야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정치적인 현상으로 바라보면 신자유주의라는 게 어떤 정해진 프로젝트가 일방적으로 관철된 것이나 혹은 사람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역사적 필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대안들이 서로 경합하고 투쟁하는 과정에서 아주 어렵게, 하지만 어쨌든 다른 대안들을 물리치면서 전지구적으로 관찰되었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없지 않았는데 왜 막을 수 없었는가라는 문제제기를 했던 것이죠. 이 물음 안에 답이 다 들어있어요. 만일 다른 대안이 있었다면 그 대안을 살펴보는 게 신자유주의가 저물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우리 시대의 대안을 마련하는데 가장 중요한 참고가 되지 않겠느냐하는 것이죠. 70년대 신자유주의가 처음 등장했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내놓았던 대안들이 실행되지 못했다고 해서 3~40년 뒤인 지금 그걸 그대로 발굴해서 쓸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 때 신자유주의와 맞서는 과정에서 패배를 했다면 어떤 한계가 있었던 것인지 살펴봐야 우리 시대의 대안을 조금 더 지혜롭게 마련할 수 있지 않겠는가하는 문제의식이 있었어요.

Q 서론에서 이 책의 목적을 크게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좀 더 설명해 주신다면요.

첫째로 많은 경우 7~80년대 서구의 진보좌파 세력이 신자유주의에 투항했다고만 알고 있지 그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어요. 투쟁의 과정들을 망각 속에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칠레와 영국 그리고 프랑스의 사례를 다뤘어요. 다음으로 좌파의 문제점들을 들춰내는 것은 지금 우리의 대안을 짜기 위해서예요. 역사라는 게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뭔가 일정하게 반복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전과는 다른 각도에서 실천한다면 새로운 상황들을 창출해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과거의 한계나 오류에 대해서 생각 외로 잘 모르는 측면이 있거든요. 잘 모른다는 것은 과거의 오류를 그대로 반복할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그런 점에서 한계를 들춰내는 것도 중요한 작업이라고 봤던 거예요. 마지막으로 최종 결론과 연결되는 문제인데, 70년대 좌파의 한계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지나치게 국민 국가라는 정치무대에 스스로를 제한하거나 또는 과잉적응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어떤 측면에서 보면 좌파가 국민 국가의 집권세력이 되었을 때 자신들의 가능성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라 할 수 있어요. 신자유주의는 지구 질서 차원에서 공격을 해오는데, 영국이나 프랑스 사례를 보더라도 지금 상식으로 봐서는 너무 답답할 만큼 국민 국가라는 정치 역학에 갇혀 있었거든요. 신자유주의가 서서히 몰락해가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생활 세계’와 ‘국민 국가’ 그리고 ‘지구 질서’의 여러 층위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정치형태를 발명해내는 것이 좌파의 한계를 극복하는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Q 1930년대 초 서구 좌파 세력들이 봉착한 ‘좌파 정치의 첫 번째 구조적 위기’란 무엇인가요.

러시아 혁명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서유럽에 보통 선거가 실현되면서 좌파 세력이 선거를 통해 집권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좌파의 집권은 가능해진데 반해 노동자가 원하는 사회경제 정책을 펼칠 수 있는 그런 조건은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는 거예요. 지금의 국가와 달랐던 거죠. 독일 사민당이나 영국 노동당 역시 공황이 닥쳤을 때 자유주의 세력이나 보수주의 세력과 다른 형태의 경제정책을 펼치지는 못했던 겁니다. 물론 이들의 강령에는 사회주의니 혁명이니 하는 말들이 다 남아있었어요. 그런데 그건 먼 미래의 과제고 당시에 펼칠 수 있었던 정책은 자본주의 정치 세력의 정책이랑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통화 가치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인플레이션 억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식이였죠.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면 케인스주의 정책을 반대로 펼쳐야 했는데, 그러면 불황이 더욱 심화돼서 좌파 정당들을 지지했던 노동자들이 실업자가 되고 결국 이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다른 세력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공산당으로 돌아서면 그나마 나은 경우인데 심지어 나치를 지지하기도 했던 겁니다.

이게 다 20년대 말 30년대 초에 있었던 일이거든요. 저는 이게 ‘좌파정치의 첫 번째 구조적 위기’라고 봅니다. 제도적인 절차를 통해서 좌파정권이 집권할 수 있는 국민-대중적인 정치공간은 마련되었는데, 이를 통해 집권한 세력이 국민-대중적인 경제공간을 마련해낼 수 있는 여지는 아직 열리지 않았던 상황인거죠.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브레턴우즈 체제가 등장한 후에야 초국적인 케인스주의의 배경 속에서 각국이 국민 국가 차원의 케인스주의 정책들을 펼쳐나갈 수 있게 됩니다. 상식적인 차원에서 복지국가라 할 수 있는 국민-대중 경제가 전개되면서 첫 번째 구조적 위기가 봉합 혹은 극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한때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던 문제가 70년대 들어 초국적인 케인스주의 체제라고 할 수 있는 브레턴우즈 체제가 깨지고 세계 질서가 금융자본주의 질서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다시 한 번 위기로 도래하게 됩니다. 좌파 세력들이 두 번째 구조적 위기를 주체적으로 극복했어야 했는데 그게 아니라 수동적으로 끌려가면서 결국 이른바 제 3의 길로 정착되고 만 것이죠.

Q ‘구조 개혁 좌파’라는 말이 생소합니다. 이들은 기존의 좌파와 어떤 점에서 같고 또 다른가요.

상식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좌파는 사민주의 아니면 혁명적 사회주의 둘 중에 하나에요. 그런데 서유럽을 중심으로 보통선거제도가 도입되고 나서 이 열려진 정치공간에 일정하게 적응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의제들을 끊임없이 현실정치에 도입하려고 한 세력들이 분명히 있었어요. 이러한 세력들이 사민당 좌파나 노동조합 좌파로 아니면 이태리 공산당이나 프랑스 공산당으로 나타나기도 했는데 그 특성이 전반적으로 일치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들을 통틀어 ‘구조 개혁 좌파’라고 표현한 거예요.

70년대 케인스주의가 위기에 몰렸을 때 이 위기를 새로운 질서로 만들려는 우파의 대안이 등장했는데 여기에 경합하는 대안들이 좌파 쪽에서도 제안됩니다. 그런데 사민주의는 대안이라고 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기존질서를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기존의 케인스주의를 지키려고만 했거든요. 오히려 케인스주의를 적절히 극복하면서 70년대 등장한 신자유주의 우파와 정면으로 맞붙었던, 즉 기존질서를 바꾸려고 했던 좌파가 있었어요. 이들은 체제 바깥에 있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도 아니고 사민주의처럼 수동적으로 기존 질서를 고수하려고 했던 사람들도 아니에요. 이런 이유로 이태리 공산당이나 칠레 공산당 아니면 영국 노동당 좌파나 프랑스 사회당을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신자유주의의 황혼기인 지금, 대안을 만들어내기 위해 중요하게 참고해야 할 흐름이 바로 이들이라는 문제의식이 깔려있는 거죠.

“1970년대의 기본 전선이 꼴을 갖춰가고 있었다. 한편에는 국민 국가의 성취를 바탕에 두고 자본주의 극복의 방향에서 체제의 골간에 손을 대려는 구조 개혁 좌파가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초국적 네트워크를 통해 자본주의 복고의 방향에서 체제의 골간을 뒤집으려는 신자유주의 우파가 있었다. 승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싸움이 어떻게 진행될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이것이 수십억 지구인 하나하나의 삶에 영향을 미칠 결정적인 대결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Q 아옌데 정부가 제시한 <인민연합 강령>이란 무엇이고 이 강령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요.

구조 개혁 좌파는 케인스주의를 부정한 게 아니라 오히려 케인스주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요. 이들이 추구한 국민-대중 경제의 건설은 사실 탈자본주의가 아니에요. 국민-대중 경제 건설, 흔히 복지국가라고 하는 것을 만드는 데는 동의한 거죠. 그런 점에서는 사민주의와 다를 바가 없어요. 하지만 이들은 이를 최종적인 목표로 본 게 아니라 그걸 디딤돌로 봤다는 데서 차이가 있어요. 디딤돌로 해서 탈자본주의 전망으로 가야 한다고 본거죠. 그 당시에는 국유화를 많이 얘기했는데, 도식적으로 말하면 케인스주의 + 국유화의 전망을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칠레는 선거를 통해 집권하면서 서유럽보다도 먼저 구조 개혁적인 전망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칠레는 아직 복지 국가를 건설하지 못한 대표적인 남반구 국가, 즉 반주변부 국가였어요. 왜 건설하지 못했냐하면 지구 질서 층위의 자본주의가 칠레 경제를 그런 방식으로 구조화하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칠레의 주요 수출원이 구리인데 거기서 나오는 수익의 대부분을 미국 자본이 가져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복지국가를 건설하기가 불가능했던 거죠. 국민-대중 경제를 건설하기 위해서도 칠레는 자본주의 그 자체를 건드릴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반주변부였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의식이 서유럽보다 먼저 등장했던 것이고 더 많은 대중적 지지를 받으면서 집권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인민연합 강령>은 남미판 케인스주의라고 할 수 있어요. 요컨대 칠레 정부가 구리 광산을 완전히 국유화해야 한다, 여기에서 생기는 수익을 바탕으로 다양한 복지정책을 펼쳐야 한다, 단순히 구리 광산뿐만 아니라 유럽이나 미국에 종속되어 있는 제조영역에서도 국유화를 단행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인민연합 강령>의 핵심이거든요. 때문에 칠레의 경우를 70년대에 등장한 보편적인 구조 개혁 대안의 한 형태이면서 또한 유럽보다 먼저 등장하고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받은 시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겁니다.

Q 칠레에서 시도한 구조 개혁은 실패했습니다. 이 가운데 드러난 구조 개혁 좌파의 한계는 무엇이고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나요.

저는 칠레에 대해 정당한 발굴과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물론 재평가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평가가 많아요. 아옌데(Salvador Allende) 정부가 쿠데타 때문에 실패한 것을 놓고 칠레 집권 좌파들의 실정이 누적돼서 결국 쿠데타로 인해 무너진 것이라고 보는 입장인 거죠. 그런데 저는 이러한 입장이 지나치게 결과 중심적인 평가라고 생각해요. 쿠데타가 일어난 것 자체가 다른 정상적인 정치과정을 통해서는 정권을 뒤엎는 것이 어려웠다는 방증일 수 있거든요. 구조 개혁 좌파의 시도가 일정 정도 성공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반대 세력이 쿠데타를 시도한 것이라고 역으로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대 세력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어요. 좌파 세력이 선거를 통해 정당하게 집권을 했고 대중의 지지를 받는 구리광산 국유화 같은 정책을 통해 강력한 구심점을 구축했던 점은 분명히 성공한 측면이라 할 수 있어요. 다만 한계라면 그 힘을 보다 강하게 이어가는 측면에서는 취약했던 거지요. 우파 세력은 미국이라는 지구 질서의 핵심권력과 연계를 했기 때문에 국민 국가 내 거점이 상대적으로 취약했음도 불구하고 아옌데 정부에 맞서면서 결국에는 쿠데타까지 일으킬 수 있었던 거잖아요. 그렇다면 아옌데 정부는 국민 국가를 거점으로 하면서 동시에 지구 질서 차원의 공격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어디에서 동원할 수 있었을까요. 1972년 정치위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민중 권력의 여러 힘들, 예컨대 노동 현장 내에서의 노동자 자주권리 운동이라든가 지역에서의 주민자치 운동이라든가 이런 데에서 힘을 확보했었어야 했는데, 당시의 상황들을 보면 기대했던 것만큼은 유기적인 연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이런 측면들이 구조 개혁 좌파의 한계가 아니었겠는가. 이점이 바로 생활 세계와 국민 국가 그리고 지구 질서를 아우르는 정치를 재발명해야 한다는 이 책의 결론과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Q 영국에서 구조 개혁 좌파가 시도한 ‘대안 경제 전략(AES)’의 성취와 실패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나요.

영국의 경우는 실패의 측면을 중심으로 살펴볼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노동당이 74년 총선에서 승리할 때 내세운 공약 자체는 구조 개혁적 전망을 담고 있었지만 실제 집권하고 나서 펼친 정책은 전혀 그렇지 않았거든요. 이게 어떻게 보면 이미 사민주의적 정책이 일정하게 완성되어있는 중심부 국가에서의 좌파 세력과 칠레처럼 복지국가 건설 그 자체가 과제인 반주변부 국가의 좌파 세력이 갖는 차이라 할 수 있어요. 영국 노동당의 주류세력이 당시의 경제적 혼란 속에서 기존의 사민주의적 복지국가 틀을 소극적으로 유지하는데 중심을 두었기 때문에 구조 개혁 좌파 전망을 갖고 있었던 당내의 주변부 좌파 세력은 실질적인 정책 집행을 못하게 됐어요. 이러한 상황에서 1976년의 외환위기는 전지구적인 금융 네트워크 세력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하고 마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사실 영국은 성취라기보다는 실패를 중심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패의 원인으로는 결국 노동운동과 같이 좌파의 대중적 기반이 되어야할 실천들이 그동안 사민주의적인 복지국가 틀 안에서 수동화, 체제화, 관료화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어요. 이런 한계들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구조 개혁 전망을 말 이상의 실천으로 만들기가 어렵다는 것을 영국의 실패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영국의 외환위기는 국민 국가 내의 거점만으로는 부족하며 자본의 초국적인 공세에 맞설 수 있는 민중 세력의 거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한 사례라 할 수 있어요.





Q 자본진영의 진지전이 승리를 거둔 이유는 무엇이고 이후의 변화는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특히 영국의 IMF 위기가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요.

칠레와 영국의 외환위기를 비교해보면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어요. 칠레의 경우는 아직까지 금융자본이 전면에 나서지 않은 상황이거든요. 칠레에 대한 미국의 공세를 보면, 국무부나 CIA와 같은 전통적인 냉전 세력들과 칠레의 광공업에 투자하고 있었던 초국적 자본들이 주도가 됐었죠. 하지만 이들이 주도한 공세는 절반의 성공밖에 이루지 못했어요. 칠레 정부를 전복시키거나 굴복시키지는 못한 거죠. 때문에 쿠데타를 통해 개입할 수밖에 없었던 거고요. 사실 칠레는 약한 나라에요. 인구가 천만밖에 안 돼요. 그런데 이 나라에 대해서도 완전하게 본 떼를 보이지는 못한 거예요. 그런데 칠레 쿠데타가 73년 9월 11일에 발생했는데 불과 3년 뒤인 76년에 영국에서 IMF 외환위기가 발생합니다.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인 영국, 과거 자본주의의 종주국이었고 세계의 중심부인 이 나라에 대해서는 완전하게 굴복을 시킨 거예요. 도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했냐는 겁니다.

중요한 건 공세의 주도세력이 바뀌었다는 거예요.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냉전주도세력이 아니라 새로운 세력, 즉 국제 은행가 네트워크와 미국의 연방준비제도, 서독의 연방은행을 통해서 활동하는 초국적 금융 엘리트들의 네트워크가 작동을 한 거죠. 한 유서 깊은 국민 국가를 초토화시켜버리는 광경을 역사상 처음으로 경험했던 겁니다. 사실 IMF는 없어질 수 있는 기관이었어요. 브레턴우즈 체제의 톱니바퀴 중 하나였기 때문에 이 체제가 붕괴된 뒤에는 용도 폐기될 운명이었거든요. 그런데 이후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IMF가 굉장히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겠다 싶어 잔존하게 된 겁니다. 미국이 영국 정부에 직접 개입한다는 건 국가 간 전쟁으로까지 비화될 수 있는 상황이에요. 하지만 IMF를 통해서 개입한다면 실질적인 목소리는 미국을 통해서 나오더라도 마치 국제 사회가 한 나라의 금융위기에 올바른 처방을 제시해주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거죠. 바로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서 신자유주의가 정착이 된 건데, 가장 선구적인 사례가 76년 영국의 외환 위기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전환점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Q 완전 고용과 복지 정책 대신 금융 시장을 중심으로 진지전의 지형이 변화한 것은 우파의 논의 틀을 좌파가 수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나요.

76년 말에 미국을 중심으로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하는데, 카터정부가 케인스주의적인 정책을 복원하려고 하다가 이 상황에 직면하면서 항복을 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상징적인 게 볼커(Volcker)라는 사람을 미국 연방준비제도(FRS, Federal Reserve System)의 의장으로 임명해요. 볼커는 의도적인 초고금리정책을 펼치면서 인플레이션을 잡는데 성공합니다. 성공하지만 역으로 인위적인 경기침체 양상이 나타나게 되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초고금리정책의 피해를 중남미가 떠안게 되었다는 겁니다. 70년대에 금융자본은 남미의 군사정권들에게 굉장히 싼 이자로 떠안기다시피 해서 대규모 융자를 해줍니다. 이 돈으로 남미의 여러 나라가 경제정책을 펼쳤는데 갑자기 초고금리가 되면서 눈덩이처럼 빚이 늘어나게 되고 결국 외환위기를 맞이하게 되죠. 그리고 이 위기를 타개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IMF의 요구에 따라 구조조정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중남미 여러 국가로 신자유주의가 확산되기 시작한 거예요.

이 모든 과정의 한 가운데에 ‘볼커 쇼크’가 있기 때문에 볼커 전환을 중요한 변곡점이라 할 수 있어요. 달리 말해 전지구적인 규범이 성문화되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이전에는 완전 고용이나 복지 정책 혹은 냉전에서의 승리와 같은 여러 가치들이 공존하고 있었어요. 이런 가치들을 다 고려하면서 정책들을 펼칠 수밖에 없었던 게 45년에서 75년까지의 상황이라면, 볼커 쇼크 이후에는 자유주의 경제의 가장 중요한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바로 화폐가치의 안정이며, 이를 위해서는 다른 모든 가치들은 희생되어도 좋다는 전지구적인 규범이 확립된 것이죠. 신자유주의의 출발이라 할 수 있겠네요.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좌파 세력이 프랑스의 미테랑 정권이었는데, 이마저도 83년에 항복을 하고 말아요. 결국 좌파 세력들이 우파의 틀을 완전히 받아들이게 되는, 즉 제 3의 길 같은 노선이 등장하게 되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한 시대가 끝난 거지요.

“더욱 치명적인 것은 좌파 스스로 패배를 합리화하고 우파의 구조 개혁을 새로운 신념으로 추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최후의 저항자들이 앞다퉈 전향하는 순간, 새로운 지구 정치 경제 질서의 헤게모니는 완성되었다.”

Q 프랑스 구조 개혁 좌파의 대안인 <공동 정부 강령>은 무엇을 시도했고 왜 실패했나요.

정당하게 평가를 한다면 미테랑 정부가 81년에 집권하고 나서 1년 동안 펼친 정책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권보다 급진적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자본주의의 중심부 국가가 은행의 대부분과 제조업의 거대한 그룹들을 실제로 국유화했던 겁니다. 물론 이 국유화에는 한계가 있어요. 사회당은 국유화를 통해 노동자의 자주권리를 실현시키겠다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국유화를 하고 나서는 자본주의 내의 공기업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즉 국가가 경영진을 임명하면 그 경영진이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기업을 운영하는 형태에 머물고 맙니다. 많은 부분에서 한계가 있었던 것은 분명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영국이 더 이상 이윤이 남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조업을 포기하고 금융으로 넘어가면서 현재 신자유주의의 핵심에 있는 반면 프랑스는 국유화한 기업들을 계속해서 육성해나갔기 때문에 아직도 제조업이 살아있어요. 이런 차이들은 어쨌든 미테랑 정부가 구조 개혁적인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에요.

물론 이런 점들을 높게 평가할 수 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프랑스 역시 실패했습니다. 그 이유는 81~83년 당시에 미국이나 서독이나 통화 가치 안정을 중심으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게 기조였기 때문입니다. 케인스주의의 입장에서는 경기 침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적극적인 적자 재정을 펼쳐야 하는데, 당시의 전지구적 질서에서는 통화 가치 안정을 위한 인플레이션 억제가 주안점이었기 때문에 프랑스가 확장 정책들을 고수할 수 없게 되었던 거죠. 케인스주의가 교과서의 지위에서 이단의 지위로 추락하게 된 겁니다. 유독 프랑스만 이런 전반적인 흐름에 저항을 했던 거였어요. 그런데 모든 나라들이 의도적으로 긴축 정책을 펼치는 상황에서 한 나라만 확장 정책을 펼치다보니까 무역수지 악화라는 문제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결국 프랑스 역시 케인스주의적인 경기 확장 정책을 포기하게 되고 말아요.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신자유주의가 정착되고 있는 마당에 프랑스라는 국민 국가 차원에서 프랑화를 고수하면서 케인스주의적인 경기 확장 정책을 펼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보여줬다고 할 수 있어요. 이런 한계를 절감하면서 프랑스 좌파가 유로화 단일 통화에 앞장서게 됩니다.

Q 영국과 프랑스의 패배는 이후 세계 질서가 전개되는데 엄청난 영향을 줬습니다. 왜 이들은 자본 진영이 강요한 선택지 외의 다른 선택을 하지 못했나요.

만약 영국과 프랑스가 다른 대안을 선택했다면 지금의 신자유주의적 질서와는 다른 질서가 만들어졌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을 거예요. 영국과 프랑스가 중요한 나라이긴 하지만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핵심에는 미국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 미국의 변화에 따라서 지구 질서의 상황이 변동했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가 당시에 다른 선택을 했다고 해서 지금의 상황과 완전히 다르게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만일 영국의 노동당 정부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리고 프랑스의 미테랑 정부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신자유주의 지구화 과정이 정착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우여곡절이 많았을 것이고 더 완만하게 진행되었거나 아니면 금융자본의 입장에서는 조금 더 왜곡된 형태로 실현이 됐을 수도 있겠죠. 이런 가능성들은 분명히 있어요.

그렇다면 왜 그런 선택을 하지 못했는지 물을 수 있어요. 당시의 좌파 세력들은 그런 선택을 하고 싶었지만 만일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엄청난 혼란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걸 두려워했던 것 같아요. 예컨대, 얼마 전에 그리스 총리가 국민 투표하겠다고 한 마디 했는데 전 세계, 특히 채권국인 독일이나 프랑스가 달려들어서 이틀 만에 없었던 걸로 만들어버렸잖아요. 이런 상황을 당시의 영국과 프랑스가 경험했겠죠. 여기에 맞서려면 70년대 초에 칠레가 경험했던 것처럼 대중 운동의 전면적인 부상, 다시 말해 좌파 정부와 대중 운동 세력이 유기적인 연계를 맺으면서 장기적인 혁명을 시도해야만 했어요. 장기적이고 혹독한 혁명의 과정을 겪어야 했는데, 차마 그런 선택을 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자신감이 없었던 거죠. 자신감이 없었던 중요한 이유는 당시 좌파가 생활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만약 대안적인 선택을 한다면 과연 노동 운동이 따라올지에 대해 확신이 없었던 거예요. 신자유주의는 이런 일련의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긴 역사적 선택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시장’과 ‘국가’ 보다 우위에 서야 할 ‘사회’ 자체를 새로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어쩌면 ‘구조’ 개혁의 여러 과제들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이 아닐까. 오늘날 이 ‘사회’는 자본-임노동 관계나 국가 관료 기구의 거대 체계로부터 자율성부터 되찾아야 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 자체를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 점에서 여성주의와 생태주의는 기존 사회주의 운동에 부족했던 새로운 각성을 불러 일으켰다.”

Q12 좌파 정치가 국민 국가에 지나치게 긴박되어 있었다는 역사적 한계를 지적하셨는데요. 그렇다면 생활 세계를 바꾸는 정치와 지구 질서를 바꾸는 정치는 국민 국가의 정치와 어떻게 연동될 수 있나요.

새로운 정치를 발명해야 한다는 게 굉장히 거대한 과제로 보이는데, 사실 20세기에 걸쳐서 좌파 운동이 만들었던 질서 역시 거대한 실천들의 결과였거든요. 보통선거제도를 도입하고 국민 국가를 만들고 독립을 쟁취하는 등 이 정도의 거대한 실천들이 21세기에도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19세기에도 새로운 사회질서를 만든다는 게 굉장히 거대하고 막연하게 다가왔었을 텐데, 20세기의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점차 현실로 만들었던 거잖아요. 마찬가지로 21세기에도 국민 국가로 한정되지 않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기 위한 실천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이 있어야만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수 있어요. 몇몇 국가에서 케인스주의 정책을 복원한다고 해서 신자유주의가 바뀌는 게 아니에요. 신자유주의 자체가 인류사적이고 문명사적인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그 정도의 인류사적이고 문명사적인 프로젝트가 가동이 되어야만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생활세계를 바꾸는 정치는 다른 게 아니라 생태주의나 여성주의의 문제의식을 이어 받는 거라고 할 수 있어요. 이를 자본주의 변형에 적용한다는 건 결국은 생태 사회주의 혹은 녹색 사회주의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과 같아요. 구조 개혁 좌파의 중요한 인물인 앙드레 고르(Andre Gorz)가 생태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은 이렇게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거죠. 국민 국가의 정치를 재탈환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생활 세계의 정치를 복원해야만 한다는 거예요.

지구 질서를 바꾸는 정치는 가령 남미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에요. 다수의 국민 국가에 좌파 정권이 들어서서, 예를 들어 베네수엘라, 브라질, 아르헨티나가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남미연합을 만들어가고 있어요. 그러면서 공고했던 신자유주의 지배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는 가장 전위적인 세력이 되고 있거든요. 저는 이런 움직임들이 남미뿐만이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확산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앞서 말했던, 지구 질서를 바꾸는 정치가 다소 추상적이고 막연하게 느껴질 텐데, 이러한 움직임들을 통해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기존의 국민 국가 정치에 기반을 두면서도 그것을 가능케 하는 생활 세계와 이를 넘어서는 지구 질서의 실천들을 동시에 아우르는 변증법적인 과정으로 정치를 사고한다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정치를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국민 국가를 넘어서는 정치형태를 생각하기가 어려웠던 게 사실이에요. 오히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틀을 만든 것은 신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어요. 지구적 차원의 지배를 관철시키는 틀을 만든 거잖아요. 반면에 좌파 세력은 그런 틀을 못 만들어왔죠. 그런데 남미의 경우 스스로 그런 틀을 만들어가고 있는 거예요. 국민 국가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남미 국가들의 공동 의지가 관철되는 틀을 남미연합이라는 형태로 만들어가고 있는 거죠. 지구 질서 차원의 틀을 만들어가기 위한 구상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남미연합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겁니다. 새로운 형태의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가장 앞서서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Q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가 한창인 지금, 우리는 과거의 패배를 미래의 승리를 위한 실험으로 소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나요.


스웨덴의 사회학자 예란 테르보른(Therborn, Goran)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가 의미는 있지만 탈자본주의의 전망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준비되어 있지 못한 것 같다고 냉정하게 평가합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과거에 진보 좌파가 준비 했던 여러 대안 및 전망들과 비교해보면 미래를 준비하는 패러다임이 없는 게 사실이에요. 오랜 시간 동안 신자유주의를 경험하고 나서 자생적으로 여러 시도들이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은 과거 맑스, 레닌주의나 사회민주주의처럼 일정하게 정형화된 틀을 갖추지는 못한 상태에요. 그런 의미에서 아직은 초보적인 단계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관적인 전망을 갖게 하는 것은 이런 운동이 어떤 예측가들도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전지구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우리가 촛불시위를 통해서도 경험했지만 대중은 인지적인 능력이나 혁명의 잠재적 역량에 있어서 그 어느 때보다 앞서 있는 상황이에요. 68 혁명도 TV를 통해서 빠르게 확산되었는데, 지금은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광범위한 인터넷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잖아요. 아주 빠른 속도로 저항주체 더 나아가 대안주체가 형성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새로운 내용을 만들어나가는 데 있어서 이와 마찬가지로 속도를 내서 노력할 필요가 있겠지요. 한국뿐만 아니라 전지구적으로도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준비가 아직은 미흡한 상태이기 때문에 좀 더 분발할 필요가 있어요. 제가 이 책을 쓰면서 여러 문제의식을 던진 이유도 이런 과제들을 급하게 하지만 내실 있게 준비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에요. 단순히 몇몇 정책만 제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거든요. 부자 증세만 하면 해결할 수 있다거나 은행 국유화만 하면 해결할 수 있다는 식의. 이런 건 아니거든요.

Q 앞으로의 신자유주의를 전망한다면요.

신자유주의는 단순한 정책 패키지가 아니라 인류사적인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어요.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 이후로 신자유주의가 몰락기에 접어든 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기간 내에 다른 질서로 대체되기는 힘들 것 같아요. 기존의 대안은 몰락했지만 새로운 것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는 그람시적인 위기 개념이 앞으로도 상당기간 세상을 지배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이건 굉장히 무서운 얘기에요. 이 시간은 전지구적인 위기의 시기이기 때문에 1920~30년대의 대공황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다만 이런 시대일수록 더욱 근본적인 대안이 등장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커지기 마련이겠죠. 항상 종말론이 그렇잖아요. 무서운 종말의 가능성과 구원받을 가능성이 함께 온다는 것, 다시 말해 종말은 곧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기도 하기에, 이 둘을 함께 볼 필요가 있는 거지요. 힘들지만 흥미진진한 시대가 우리 앞에 열려진 게 아닐까 싶습니다.

“기존의 정치 형태를 뛰어넘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를 스스로 발명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국민 국가의 정치에 적응해온 과거 좌파 정치의 역사가 놓쳤던 정치의 또 다른 층위들을 환기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또 다른 층위의 정치들을 국민 국가 수준의 도전과 결합시켜야 한다. 이 책의 첫머리에서 제시한 도식을 따른다면, 그것은 곧 국민 국가의 정치를 생활 세계의 정치, 지구 질서의 정치와 (재)접속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