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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글

[120호] 다른

 

 

 

   여럿의 삶이 온전히 여럿으로 남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어렸을 때 가졌던 꿈이 지금은 단지 기억 속 한 귀퉁이의 먼지 쌓인 유물이 되고만, 그 과정의 체념과 회한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꿈은 이룰 수 없는 한에서만 꿈일 수 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정작 문제는 왜 우리는 다 다르면서도 또 다 같은 삶을 사는가 하는 거예요.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은 이상하리만치 닮아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이번 호에서 우리가 던지는 질문은 이렇습니다. 다른 삶도 가능할까?

 

   언제부터인가 삶의 여러 가능성들이 하나의 보편적 형상으로 통약되더니 이제는 여기서 벗어난 삶을 상상하기가 힘든 지경이 됐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각자의 삶이 아니라 모두의 삶이라 부를 수 있는, 공인된 삶을 살기에 이르렀지요. 어쩌면 자신의 삶이 타인의 삶과 다르지 않기에 우리는 서로의 삶을 보고 적잖이 안심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우리는 누군가가 다른 삶이 가능한지에 대해 묻는 게 불편하고 심지어 못마땅하기까지 합니다. 지금까지 별생각 없이 살아온 삶에 대한 반성과 함께 현재의 안정적인 삶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두려움 그리고 앞으로 다른 삶을 살기 위해 엉덩이를 떼야 한다는 압박감까지 참으로 험난한 과정을 우리에게 요구하기 때문이지요.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사는 게 얼마나 피곤하고 또 얼마나 큰 다짐이 필요한지는 자못 분명해 보입니다. 그냥 익숙한 대로, 남들 사는 그대로 사는 게 가장 손쉬운 선택이자 안정적인 선택이라는 건 당연한 사실 아니던가요. 우리는 남들이 올린 맛집 리뷰를 보고, 상품평을 보고, 관광 코스를 보고, 후기를 보고, 또 그대로 따릅니다. 같은 삶을 사는 한에서만 우리는 우리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위안을 얻습니다. 하지만 사정은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우리는 같은 공부를 하다가 직장을 얻어 같은 노동을 하고, 여기서 번 돈으로 같은 결혼을 한 후 같은 소비를 하며 같은 도시에서 같은 몸을 갖고 삽니다. 이렇듯 같은 삶을 살기에 문제가 생겼을 때의 진단과 처방도 다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어렸을 적 꿈을 잊은 것에 더해 이제 현재의 삶까지도 잃고 말았습니다. 잊음과 잃음은 더없이 큰 차이인데, 하나로 수렴된 삶 속에서 자신의 종별적 특이성을 잃는다는 게 과장된 해석만은 아니겠지요.

 

   다른 삶도 가능한지 그리고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해서 물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같이 묻기를 청하고 싶습니다. 지금과는 다른 방식의 공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공부가 아니라 삶의 역량이 공부에까지 이르는 넘침의 공부는 가능할까요? 다른 노동, 노동에 몸과 정신이 잠식되지 않고서도 삶의 성취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요? 다른 결혼, 서로를 결박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할 수 있는 우정으로서의 결혼은 불가능할까요? 다른 소비, 자본주의의 포획 망에 적극 가담하지 않는 방식으로 삶을 꾸려나가는 방법은 없을까요? 다른 도시, 회색빛 콘크리트 격자를 푸른 생명으로 넘쳐나게 만들 수는 없을까요? 다른 건강, 돈으로 웰빙을 사는 것 말고 내 몸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요? 다른과 연결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다른 정치, 선거 한 번으로 바뀌길 기대하는 정치 말고 다른 정치를 창안할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요. 물론 물음만으로 뭔가 이룩한 것처럼 자위하지는 말아야겠지요. 다만 분명한 것은, 함께 묻다보면, 다른 삶의 가능성을 묻다보면, 그렇게 계속 묻다보면, 우리의 삶 역시 조금씩 달라지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가 소설 속 얘기만은 아니라는 겁니다. 섣부르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삶도 가능하다.

 

 

편집장 박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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