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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20호] 우리는 노동하는가?

 

 

 

 

우리는 노동하는가?

노동을 거부하는 것은 가능한가

 

조형래(문학평론가, 동국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잉여, 먹지도 말라.

 

오늘날 노동하지 않는 삶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합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OECD 국가들 중 최고 수준의 연간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나라인 만큼 모두 다 노동해야 합니다.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든, 어떤 사정으로 그 기회를 자발적으로 포기했든, 노동하지 않는 이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이 그저 숨만 쉬고 있어야 하는 잉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취급됩니다. 청년백수, 실직가장, 독거노인, 캥거루족 등 노동하지 않는 잉여들에 붙어 있는 이름표는 실로 다양하지만 하나같이 동정과 경멸이 뒤섞인 양가적인 시선을 환기한다는 사실은 같습니다. 그리고 어떤 태도가 우세하든 간에 이러한 시선이 그러한 잉여를 자신과 동등하지 않은 존재로 대우하는 태도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분명해집니다. 이처럼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명제는 한국에서 그야말로 보편적 조건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인간의 자격을 결정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예컨대 어떤 이들에게 각종 복지는 노동을 통한 인간의 자격을 박탈하는 일방적 시혜이자 국가적 차원의 세금 낭비에 불과합니다. 웹페이지만 들여다보고 있는 잉여와 폐지를 줍는 독거노인을 양산할 뿐일 정책이므로 결코 무분별하게 확대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노동하지 않는 인간 이하의 삶만을 양산하는 정책으로 간주됩니다. 대신 몇 십 년 동안 그야말로 숨만 쉬고 공부하고 노동하여 저축해서 집과 차를 마련하는 삶을 인간적인 것으로 권장합니다. 한국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욕망의 복마전 속에서 이러한 인간의 자격을 거부한다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노동하는가?

 

단 한 번도 정규직으로서의 삶을 영위해 본 적이 없는 비정규직 잉여인 저 역시 그러한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 날씨 좋은 휴일인 오늘 부지런히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저 자신은 글을 쓴다는 것이 재미있기 때문에 이 일에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휴일에 쉬지 않고 일한다는 것이 확실히 쉽지 않은 일이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필사적인 이유는 마감이라는 지켜야 할 데드라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번 마감을 지켜야 앞으로도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경력을 유지하지 않으면 앞으로 글을 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실업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쫓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즉 앞서 언급한 것처럼 노동하지 않는 삶을 바람직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한국사회의 일반적인 시선에 대한 두려움이 저로 하여금 휴일의 노동을 기꺼이 감수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는 과연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사실 휴일에 노동하고 있는 것치곤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즐겁다면 즐겁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노동의 즐거움, 노동을 통한 자기실현 또는 일중독 정도로 정의되는 이러한 역설에는 실로 간단치 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며 비단 제게만 국한된 현상도 아닌 것 같습니다. 예컨대 인기 있는 TV 프로그램인 무한도전의 출연자들은 과연 매주 노동하고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져 볼 수 있겠습니다. 최근 이삼 년 간 부쩍 힘든 기색을 내비치는 박명수나 매 순간 프로그램의 재미를 위해 긴장을 풀지 않는 유재석을 보면, 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가 출연의 대가로 만만치 않은 수입을 얻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들이 생산하는 재화는 시청률 높은 프로그램에 붙는 광고수입으로 이윤을 창출하고 있지만 알다시피 그 가격은 대단히 유동적이며 문화적 텍스트들이 대개 그렇듯 그것의 가치를 책정하기는 그만큼 애매합니다. 최근 명수는 12특집 등이 단적으로 예증하듯 출연자들의 태도 역시 그들이 일하고 있는 것인지 즐기고 있는 것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확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매 특집마다 설정되어 있는 게임이나 과제에 대단히 몰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는 듯합니다. 스태프와 제작 환경 등이 전례 없이 자주 노출되는 리얼 버라이어티를 표방하지만 그것은 마치 쉴 새 없이 세트가 허물어지는 상황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버스터 키튼 영화의 고전적 유머를 연상시킵니다. 출연자 및 스태프들의 노동조차 웃음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노동의 고단함 내지는 물질성 그 자체는 가급적 감추어지고 있거나 또는 문제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이를테면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출연자들 간 결속은 견고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연대가 스태프들 전체로 확장되어 적용되지 않을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노동 아닌 노동이라는 애매모호성

 

질문은 간단합니다. “그들은 노동하는가?”입니다. 하지만 답은 실로 간단치 않습니다. 노동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실제로 많은 시청자 특히 청소년들이 무한도전을 노동으로 간주하고 있지 않습니다. 노동으로 간주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재미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시청자들을 기만하지 않기 위해서는 출연자들 자신도 매회의 촬영 자체를 일정부분 즐기지 않으면 안 되며 실제로도 그렇게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지 간에 그들은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출연료를 받고 있는 일종의 노동자입니다. 급여라는 대가가 없다면 그들은 촬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며 즐기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출연료는 기회비용을 생각할 때 그리 높은 수준이 아니며 그들 자신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곧바로 환금(換金)되지 않는 다른 무엇을 염두에 두면서 출연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장기간의 결방을 인내하고 있는 것일 터입니다.

이러한 복합적인 의미와 결부된 행위와 태도를 과연 노동이라 단언할 수 있을까요? 그들 모두는 노동하면서 동시에 노동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이 애착을 갖고 있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 외에 그들의 노동 아닌 노동을 정확히 정의할 수 있는 언어는 사실상 없습니다. 하지만 노동과 관련하여 이 노동 아닌 노동이라는 말은 다분히 애매모호합니다. 그렇지만 이 애매모호성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도 이 애매모호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저는 글을 쓰고 있을 뿐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것은 분명 노동 아닌 노동입니다. 하지만 글을 쓰는 것을 노동으로 환원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동시에 저는 노동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 work).”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의식과 무관하게 어떤 강요에 의해서 휴일에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 만큼 즐거움이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하고 있는 개별적인 일 또한 노동이라는 이름하에 간단히 추상화될 수 있을까요? 오히려 모든 이가 노동 아닌 노동의 애매모호성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노동이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노동 아닌 노동이 보편적인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 노동은 지금 여기의 모든 이들이 각자 몰입하고 있는 가치 있는 일들의 개별성을 포괄하기에 적합한 용어가 아닙니다.

 

노동 너머

 

노동을 거부하라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개별적인 행위를 아울러 노동이라 부르게 된 것은 근대 계몽주의 시대에 들어서의 일입니다. 그것은 인간을 자본주의 생산 시스템의 교환가치와 불가결하게 관련시키는 형이상학적인 상상력의 구조를 계몽했습니다. 재화를 창출하는 데 있어서 부단히 근면 성실할 필요가 있는 금욕주의적 인간이 노동자의 이상으로 구축되었던 것도 이 시기입니다. 이 책의 저자들인 크리시스 그룹의 일원들은 바로 이 상상력의 구조가 항구불변의 것이 아님을 다양한 각도에서 논증하고 자본주의 너머를 전망하기 위한 여러 혁명적인 대안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노동을 거부하라외에도 노동하지 않는 자들을 잉여로 취급하여 먹지도 말라고 명령하거나 또는 노동=비용으로만 간주하려는 한국사회의 지배적 담론에 대한 비판적 인식 하에 다양한 사회적 기업을 제안하는 책들의 출간 러시가 계속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간=노동=교환가치에 입각한 사고가 근본적인 차원에서 회의되지 않는다면 노동하는 인간 너머를 상상하고자 하는 일체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문진영의 소설 담배 한 개비의 시간(창비, 2010)에 인상적으로 그려진 것처럼 노동과 같은 어떤 가치로도 환원되지 않지만 그저 담배 한 개비를 피우는 짧은 시간과 같이 무익한 청춘의 방황 또한 때로는 필요한 법입니다. 그러므로 노동 너머를 상상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노동으로 수렴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직시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는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결코 노동으로 추상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오히려 노동 아닌 노동의 애매모호성에 걸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노동 너머는 이러한 직시와 인식 속에 이미 도래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