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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글

[121호] 취중진담

 

 

 

 

우리는 취했을 때야말로 진실할 수 있을까요. 눈이 반쯤 풀리고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이것과 저것, 자와 타의 구분이 희미해질 때 쯤, 짐짓 술기운을 빌려 그동안 하지 못했던 혹은 할 수 없었던 속 깊은 이야기들을 꺼내어, 마치 이 모든 게 술 때문인 듯 알리바이를 대면서 그토록 쉴 새 없이 떠들었던 건, 아마도 진실을 토하게 하는 마력이 그 곳 어딘가에서 우리를 조종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술 먹고 거짓말하기 힘든 건 혀가 꼬이는 마법에 걸렸기 때문이(라고들 하)지요. 용케도 잘 저며 놓았던 내밀한 이야기들이, 잠시 방심한 틈을 타서 혀 언저리까지 넘어오더니 이내 술과 함께 미끄러져 나와 한바탕 향연을 벌입니다. 항상 진지하던 당신도 얼굴 가득히 웃음을 지으며 연거푸 술을 들이킵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의 안주가 공부 이야기인 건 당연해 보입니다. 술 한 잔에 시작된 공부 이야기는 곧이어 논문에 대한 부담, 불안한 미래, 가족에 대한 미안함 등으로 흐르더니 이내 부족한 자신에 대한 낙담과 절망으로 옮겨갑니다. 급기야 한없이 작아진 모습으로 공부가 힘들다고 고백하는 (당신과 나의) 모습 앞에서 단지 술기운만으로 갈음할 수 없는 진실함을 느꼈다면 섣부른 오해일까요?

헌데 공부가 힘들다는 게 새삼스러운 깨달음은 아니기에, 만일 진실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은 그때 내뱉은 한숨과 마주친 술잔 그리고 도닥이던 손길을 통해 함께 공부하는 우리의 존재를 확인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자리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진실은 꽁꽁 숨겨두었던 남모를 이야기에 있는 게 아니라 항상 이를 초과하는 무엇, 곧 술이 들어가는 순간 불쑥 튀어나와 당신과 나의 존재를 확인하게 만드는 술자리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해서 우리는 술에 취하기에 앞서 분위기에 취하는 것이겠지요.

이번 호에서는 그래서 술의 힘을 빌려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를 그리고 그 자리의 진담을 들어보고자 했습니다. 이름 하여 취중진담입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솔직함과 진실함을 지면에 그대로 옮길 수는 없겠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읽는 분들이 그 반감된 부분을 자신의 경험으로 또 상상력으로 채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진실이 있다면 전하는 말에 있는 게 아니라 함께 기울였던 술잔과 웃음 그리고 공감 속에 있을 테니까요.

 

이번 호를 끝으로 3년간의 신문 제작을 마무리 합니다. 소주 한 잔 부탁드려도 될까요.

 

편집장 박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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