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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22호]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학문공동체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학문공동체를 위하여

 

박구용(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대학을 자율적 학문 공동체라 부르는 경우는 많지만 이를 말 그대로 믿을 만큼 순진한 사람은 드물다. 무엇보다 대학은 공동체가 갖추어야할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연대를 오래전에 상실했다. 사회적 연대란 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동등한 존중과 이웃의 안녕에 대한 보편적 관심을 토대로 공동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실천에 서로를 호명하고 응답하는 신뢰를 가리킨다. 그러나 우선 대학 구성원들, 정규직 교수, 비정규직 교수, 대학원생, 학부생 사이의 동등한 존중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무엇보다 한국의 대학은 지금 비정규직 교수와 대학원생들의 희생과 고통 없이는 생존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있다.

 
한 명의 지도교수를 중심으로 바람직한 소규모 학문 공동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교수와 대학원생 사이의 비대칭적 위계관계가 구조적으로 고착화된 대학 체계 안에서 겉으로 보이는 신뢰와 연대는 성공 지향적 전략의 은밀한 야합일 가능성이 높다. 연대와 정의가 떨어져서는 안 되는 이유다. 연대 없는 정의가 추상적 이상으로 구체적 현실을 재단하고 심판하는 가운데 모두를 공포에 떨게 한다면, 정의 없는 연대는 힘의 크기가 집단의 크기와 결속력을 결정하기 때문에 모두를 눈치 보기 선수로 만든다. 자신들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일명 시간강사라 불리는 비정규직 교수들의 위치를 조금이라도 아는 대학원생들이 교수 눈치 보느라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을 때, 정작 교수들은 자신의 힘을 과시할 수 있는 학생들을 모으느라 분주한 까닭이다.     


여러 가지 의견이 있겠지만 공동체로서 대학이 지향하는 공동의 목표란 학문 연구와 교육을 통해 진리와 정의, 그리고 아름다움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대학이 전정한 학문공동체가 되려면 거짓, 왜곡, 불편함, 불의, 부당함, 고통, 더러움, 추함에 맞서 싸우는 비판 정신과 참하고 편하고 올바르면서도 깨끗하며 좋고 기쁜 사회를 이루는 형성(Bildung)의 정신이 살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비판과 형성의 정신이 이런 저런 이유로 대학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정신 없는 대학, 정신 나간 대학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철학자 헤겔(G. W. F. Hegel)의 말처럼 정신은 자유 혹은 자율에서 생명을 얻고 성장한다. 그러므로 대학이 자율성을 잃지 않아야 그나마 남아 있는 정신이라도 지킬 수 있다.


대학의 자율성은 무엇보다 사회와 학문의 올바를 관계 형성에서 시작한다. 진·선·미를 지향하는 학문의 자율성은 우선 대학 바깥의 다양한 권력의 요구와 명령에 종속되거나 굴복하는 순간 사라진다. 권력은 선도 악도 아니다. 하지만 권력을 참과 거짓, 옳음과 그름, 좋음과 나쁨을 가르는 기준으로 섬기는 것은 나쁜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권력이 폭력으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대학이 학문을 통해 찾은 진·선·미가 권력을 비판하고 형성하는 것은 선이지만, 권력이 진·선·미를 관할하고 관찰하는 것은 악이다. 이렇듯 외부 권력에 자율성을 빼앗긴 대학에서는 어떤 것이 진·선·미이기 때문에 힘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힘을 갖기 때문에 진·선·미로 둔갑한다.


현대인의 일상적 삶과 그들의 생활세계를 지배하는 가장 막강한 힘은 행정 권력과 시장 권력에 있다. 그러니 두 권력에 가까이 가기위해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 물론 최근 들어 두 권력 자체를 혐오시하거나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급진적인 태도나 운동을 전개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두 권력은 자신을 통째로 거부하는 입장이나 저항조차 자신의 체계를 공고히 하는 자양분으로 이용하고 활용할 만큼 견고한 틀과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한편으로 두 권력이 내적 합리성과 유용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두 권력이 생활세계를 포함해서 문화 예술, 심지어 교육의 영역까지 내적으로 식민화시키는 것을 지속적으로 비판하는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 대학이 이 전선의 맨 앞줄에 서서 두 권력을 감시하고 규율할 때에만 사회로부터 학문의 자율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학문이 사회적일 때에만 사회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까닭이다.


사회 속에 학문이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 속에 사회가 내재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를 지배하는 두 권력의 논리가 대학의 권력 구조를 편성한다. 두 권력의 논리는 무엇보다 연구지원비를 통해서 관철된다. 실제로 그동안 BK, HK를 비롯한 각종 연구지원 사업과 기업이 발주하는 다양한 연구용역 사업이 연구비를 많이 수주한 교수들을 중심으로 대학의 권력 구조를 꾸준히 재편해 왔다. 연구비가 많은 교수는 연구를 많이 하는 교수일 뿐만 아니라 지도학생이 몰려드는 교수이다 보니 연구와 교육 모두에서 목소리가 커진다. 그러니 연구비 수주액을 보고 지도교수를 결정하는 대학원생들에게 불만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런저런 연구 및 교육 사업에 참여한 학생은 학문공동체의 구성원이라기보다 지원받은 돈의 크기만큼 실험과 행정에 시간을 내주어야하는 일용 잡급직으로 종사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대학원생들은 훌륭한 학문후속세대로 인정받기 위하여, 적어도 시간강사로 감금되는 사태를 막고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하여 연대 없는 경쟁의 달인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그런 논리에 따라 불만은 사라지고 불안만 커진다.


불안하게 만들면 불만도 통제할 수 있다. 불안 없는 불만은 관리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보다 더 낳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사회적 동력이 된다. 하지만 불만 없는 불안은 너와 나의 정신 내부로 깊숙이 파고들어 모두를 파괴한다. 많은 대학원생들이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투명성 때문에 불안하다고 말하겠지만, 무한경쟁 체계에서 개인의 불안은 근본적으로 자신이 언제나 다른 사람에 의해서 대체될 수 있다는 인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니 불안을 이겨내려면 누구에 의해서도 대체될 수 없는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경쟁하는 동료보다 더 많은 연구실적을 축적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 생각하겠지만 양적인 차이는 언제든 다른 경쟁자에 의해서 추월당하게 마련이다. 그러니 불안을 이겨내고 학문공동체의 동등한 구성원이 되려면 다른 사람, 특히 지도교수와는 질적으로 다른 연구를 해야만 한다. 


지도교수와는 다른 대상을 연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대상, 언어를 끝없이 미끄러지게 하는 대상, 관계 형성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대상 앞에서 불안은 공포가 된다. 불안과 공포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타자성을 가진 타자와의 관계를 형성하고 이름을 부여하며 그 대상과 ‘따로 또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언어의 중단 없는 놀이를 즐기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상인 사물, 사건, 마음이 언어 혹은 말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사물, 사건, 마음은 결로 말과 일치할 수 없다. 그 때문에 미지의 대상과 씨름하는 연구자들에게 불안과 공포는 완전히 해소될 수 없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연구자들은 타자성을 가진 타자와의 관계 형성을 포기하고 타자성과 이질성을 박탈한 타자와의 관계, 곧 나르시즘적 자기 관계에 몰입한다. 이런 연구자들에게 이질적 세계의 사물과 고통 받는 타인의 마음은 나의 자기 보존을 위한 성공 지향적 행위의 도구일 뿐이다.

 

비트겐슈타인(L.Wittgenstein)은 그의 저서 <논리·철학 논고>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라고 요구하지만 나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증명(입증) 가능성, 논증(설득)가능성이 있는 말만 하는 대학원생은 어쩌면 자신이 아니라 지도교수가 입증하고 논증한 것을 반복할 가능성이 크다. 동일한 것을 반복하며 무절제한 증식에 기쁨을 느끼는 지도교수의 양식장에서 연구비라는 사료를 제공하는 시장 권력과 행적 권력이 원하는 말만 하는 연구자는 결국 시도 때도 없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회적인 것을 경제적인 것으로 환산하며 가학적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된다.

 

큰 고통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픔이다. 그런 고통은 증명이나 논증은커녕 증언할 수도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처럼 큰 고통을 직접 체험한 사람조차 다른 사람이 받은 고통을 똑같이 느끼거나 상상할 수 없다. 아인슈타인과 카프카, 프로이트와 피카소, 정약용과 김수영이 위대한 것은 이처럼 증언 불가능하고 상상 불가능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 곧 공감(compassion)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문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자율적 연구자는 타인의 고통에 즉각 감정이입을 함으로써 연민(pity)을 느끼는 게으른 자가 아니라 고통을 완화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바꾸는 데 힘을 쏟는 과정에서 타인과 만나 소통하고 연대하느라 바쁜 사람이다.


 

학문의 작은 오솔길을 진지하게 걷다보면 만남, 소통, 연대의 위대한 교차로에서 지금은 대학원생들은 ‘따로 또 함께’ 자율적 학문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큰 연구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자신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기 꿈을 이루어야 한다거나, 큰일을 하려면 자기를 희생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해치거나 업신여기지 않으면서 사회적 욕망 체계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그러니 ‘학문을 위해 인생을 바치겠다!’는 말 따위로 자신과 타인을 속이지 말고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부터 바로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