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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24호] 위기의 담론에 불안하게 대처하는 방법

 

 

 

위기의 담론에 불안하게 대처하는 방법

 

불안을 증폭시키고 전염시키는 불안의 애국적 사용설명서

 

 

최 정 우(비평가, 작곡가, 파리 국립동양어문화대학 강사)

 

 

*사진출처: 민중의 소리

 

 

우리는 이미 불안의 자기증식과 대량생산 체제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불안은 감정적인 것이나 심리적인 것이기 이전에 먼저 하나의 구조 또는 체제이므로. 이러한 불안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그러나 이것은 애초부터 잘못된질문의 형태가 아닐까.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이 모든 불안을 걷어내 주겠다고 약속하는 어떤 달콤한 소시민적 행복의 속삭임, 그 치유에의 유혹과 건강성에의 회유에 가장 먼저 의문을 던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문제는 불안의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불안의 체화 혹은 내재화일 것이다. 불안은 일종의 신체기관처럼 우리의 존재와 주체성/정체성 안에 내속되고, 또한 일종의 공기처럼 우리의 가능조건 그 자체를 구성하는 무의식적 기계가 되고 있다는 점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불안은 합리성의 한 형식, 합리적 선택을 위한 하나의 가능조건이므로.

 

 

국가의 불안을 국민의 불안으로 전가시키기

그러므로 어쩌면 문제는 바로 이러한 불안이 비합리적일 때, 합리성으로부터 벗어난 듯이 보이는 어떤 비가시적이고 비실체적인 이유로 발생할 때이다. 이 비가시적인 불안은 그 자체로 이중적, 그것도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중적이다. 이 보이지 않는 불안은 민족의 단결이라는 허명(虛名)을 책동하고 국민의 화합이라는 공언(空言)을 획책한다. 미지의 적, 하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된 적에 대한 불안, 과도한 것 혹은 과소한 것에 대한 불안, 이 모든 비가시적인 불안은 그 불안의 실체를 보이게끔 만들기를 원하고, 그 불안의 허구적이며 구성적인 대상은 바로 이러한 합리적이고 가시적인 필요성에 의해 탄생하고 형성된다. 이 가장 비합리적인 합리성은 여러 가지 형태와 방식으로 드러난다. 국가의 안보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은 시민들이라기보다 국가 그 자체이며, 이렇게 국가는 그 자신의 병리적인 성격을 계속해서 노출함으로써 오히려 그 자신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역설적으로 역설하는 것. 국가가 가장 불안해하는 것은 바로 국민이 전혀 어떤 불안도 느끼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자신의 불안을 국민의 불안으로 전가시키며 불안의 대량생산을 위한 컨베이어 벨트를 오늘도 쉬지 않고 돌리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안보에 대한 불안은 결국 적을 창출하기, 그것도 적을 더욱 광포한 존재로 창출하기라는 작업으로 표출되는데, 이는 특정한 정권의 욕망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우리라는 이름으로 당연시되는 국민의 욕망이기도 하다. ‘친북혹은 종북에서 문제가 되는 지점은, 소위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그 스스로 어떤 침묵의 대상, 하나의 빈 공간, 부재의 근거로서 북한이라는 기표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적대적 공범자라고 하는 권력 차원의 표층적인 분석만을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그것을 뒤집어 공범자적 적대자라는 미시 차원의 심리적 방어기제 역시 문제 삼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북한의 존재 혹은 남북한 사이의 영원한 대치의 의미를 세계사적 관점에서 근대국민국가의 불가능성 그 자체가 근거하고 있는 어떤 가능조건, 근대국민국가의 담론 자체와 전체를 구성하는 어떤 균열과 틈, 그리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불가능한 교훈이나 불가능의 전범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바로 이러한 남북한의 분단 상황을 민족주의적으로 지양해야 할 것이라든가 세계사적 사명으로 통일해야 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어떤 민족주의적 지향성세계사적 소명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한반도의 역사적이고 지정학적인 위치와 상황 그 자체가 역으로 건강하지 못한근대국가의 봉합을 건강성이라는 허구의 이름으로 덮고 있는 저 국민국가 체제의 상징적이고 폭력적인 일반성에 대해, 일종의 파열하는 실재로 작용할 수 있는 독특성을 갖고 있다는 점, 바로 그 점에서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세계사 속의 이러한 실재로 이해된 한국사야말로, 역설적으로 가장 적극적인 세계사적 기여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불안을 가장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

바로 이런 의미에서 나는 한반도와 통일이라는 주제를 세계라는 하나의 상징체계에 대한 일종의 치명적 실재로 이해한다. 내가 민족/국민국가 안에서 모종의 건강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실재가 지니는 수행적 불건강성일 것이며, 내가 조국이라는 단어로 생각하고 품게 되는 나만의 민족적 감수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의 대상은 또한 한반도가 지닌 세계사적 실재로서의 역사적/국제[정치]적 파국의 지위일 것이다. 근대 민족/국민국가(nation-state)완전한완성을 위한 하나의 전제조건이자 선결조건으로 이해되고 추구되는 통일이란, ‘선진국화에 대한 저 모든 도착적인 담론들의 기초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통일의 담론으로부터 이탈한 지점에서 비로소 통일을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통일이란 근대적 상식의 복원과 복기라기보다는, 바로 그러한 상식의 가능조건들을 비판하고 파열하는 데까지 나가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우리의 불안을 사용해 저들의 불안을 새롭게 창출하고 확인시켜줄 수 있는 실재의 방법, ‘균열의 전략이다. 우리의 상황은 어쩌면 그러한 근대적 국민국가들 사이의 평화라는 상식의 체계 그 자체 속에 포함되어 있는 균열의 양가성(ambivalence)을 더욱 노출시킬 수 있는 역사적 소여그 자체일 것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불안을 가장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안에 대한 우리의 이 가장 불안한 감각과 사유를 통해 국가가 행하는 저 불안의 대량생산에 대항할 수 있으며 또한 대항해야 한다. 이 대항은 물론 불가능성의 대항이며 아포리아적인 대항일 테지만, 우리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의 불안을 헤집고 증폭시켜야 한다. 불안을 사회적 치유의 대상으로 삼을 때 우리는 다시금 저 불안의 국가적 대량생산 체제 안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므로.

따라서 불안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러한 불안의 승화를 희망하고 기획하고 획책하는 모든 시도와 기도들로부터 결단코 단절할 필요가 있다. 불안의 안전한 분출을 조장하고 장려하는 모든 국가적 배려는 일차적으로 불안의 단순한 해소를 목표로 하는 것이며, 그러한 해소란 그 자체로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으로 규정되고 소화될 수 있는 단편적이고 일시적인 해결의 과정일 뿐이다. 사회적 불만사항의 원만한 제거, 개인적 스트레스의 경제적 해소 등을 목표로 하는 불안의 해소라는 담론은, 그것이 바로 해소를 목표로 하는 한에서 불안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만을 문제 삼는 지극히 실용적인 불안의 경제학, 또는 더 나아가 불안을 어떻게 통제하고 조절할 것인가만을 문제 삼는 지극히 정상적인 불안의 정치생리학이기도 하다. 반대로 불안은 조건임과 동시에 그러한 조건 위에서 거쳐야 하는 하나의 과정이기도 하며, 심지어 그러한 과정이 도달하고 도달해야 할 어떤 목표이기도 하다. 불안이 목표가 되는 이러한 뒤틀린 목적론자체가 바로 저 불안의 병증이자 동시에 해법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불안은 또한 하나의 징후일 것이다. 불안이라는 증상을 어떻게 치료할까를 묻지 말고, 불안이라는 징후를 어떻게 확장하고 각인시킬까를 물어야 하는 이유이다.

 

 

고로, 당신의 불안을 사용하라.

그러므로 당신의 불안을 향유하라. 불안을 평온하고 안정된 심리적/육체적 삶을 위해 단지 해소되어야 할 장애물로 보는 이상, 현대적 불안의 해소그 자체는 요원하며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우리의 체제는 역설적이게도 지속적인 불안의 창출과 재생과 반복을 통해서 비로소 제대로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불안을 전이시키고 전염시켜야 한다. 불안의 전이와 전염은 가장 감각적인 행동이자 가장 정치적인 행동이 될 수 있다. 가장 시대착오적으로 보이는 행동이야말로 가장 시의적절하다. 그리고 우리의 불안이 가리키는 길은, 바로 이 반시대성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묻고 있다. 그러니, 당신은 당신의 그 반시대성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당신의 그 시대착오적인 불안에 당당함을 가져도 좋다. , 당신의 불안을 당신만의 사적인 것으로 처분하거나 해소하려고 하지 않는 한에서. 당신의 불안은 당신의 사유재산이 아니라 이 국가의 공공재임을 애국적으로(!) 명심하라. 이는 그 불안을 국가에게 되돌려주고 그 불안을 널리 퍼뜨려야 하는 이유가 된다. 그 불안으로, 그 불안을 전염시킴으로써, 그렇게 그 국가에 봉사하라. 불안의 대상을 국가가 가르쳐주고 지정해준 대로 쉽게 확정하지 말고, 불안을 사용하고 또 그 불안에 대한 당신의 무감각함을 응용해, 그 불안 자체가 지닌 감각과 인지의 불가능성을 유지하라. 그리고 그 불안으로 국가를 오염시키고 희석시키고 무엇보다 전염시켜라. 그리하여 그 불안이 야기하는, 그리고 또한 그러한 불안을 야기했던 전선(戰線)을 확인하고 확정하라. 이 불안의 불가능성을 통해 어떤 가능성을 불러오라, 마치 유령을 불러오듯, 그렇게 음울하고 불온하게. 불안이 여전히 영혼을 잠식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불안은 또한 저 국가를 먹어치울 것이다. 국가가 마치 구제역처럼 여기는 저 불안의 유령이, 그 복수의 날개를 펼쳐, 국가에게 불안을 안겨줄 차례이다. 역사의 천사가 내려앉듯, 아니 숫제 내리꽂히듯, 그렇게 창궐할 차례이다. 고로, 당신의 불안을 사용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