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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24호] 불안, 제약이자 가능성

 

 

 

 불안, 제약이자 가능성

윤 여 일(작가)

 

 

 

불안한 시대다. 불안에 물드는 시대다.

불안은 미래 시제의 감정이다. 불안한 시대인 것은 미래가 불확실해서다. 불확실한 미래는 불안을 동반해 현재를 찾는다.

불안한 시대다. 불안에 익숙해져버린 시대다. 사회는 불안해하기를 권하고, 불안이야말로 사회의 지극히 정상적 감정이 되었다. 이 사회의 인간은 불안에 물들어 불안 없이는 살지 못한다.

불안은 떨쳐낼 수 없다. 불안한 자는 자신을 불안케 만드는 사회를 향해 불안을 분노로 전환시켜 발산해야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길은 막혀있다. 안에서 불안이 차올라 바깥으로 꺼내보지만 현실 벽의 두께에 부딪혀 죄다 토해내기도 전에 체념으로 다시 집어삼킨다. 그리고는 버틴다. 버티는 자들의 표정에서는 냉소의 빛이 돈다. 그게 시대의 낯빛이 되었다.

집어삼킨 불안은 퇴행증세를 보인다. 불안은 바깥으로 분출되지도 안에서 온전히 형체를 이루지도 못한 채 갑갑함, 우울함, 자기연민, 자기혐오로 점차 변질되고 있다. 불안은 안에서 고이고 부패하여 오히려 감수능력과 사고력을 좀먹는 쪽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불안은 떨쳐낼 수 없다. 어차피 불안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면, 그것을 자원으로 사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을 제약하는 조건은 자신에게 유일한 가능성의 조건이다. 병든 자에게는 병의 무거움을 철저히 의식하는 것이 일종의 건강함의 표시이듯 불안한 자는 불안을 철저히 파고들고 활용하는 것이 능력일 것이다.

 

 

 

 

나는 불안하다. 내 불안의 본질은 내게 주어진 시간에는 끝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쓰는 존재다. 나는 쓰는 존재로서 불안하다.

잠들기 전, 하루가 품는 절박함이 이 정도인가 의심스러워지는 밤이 있다. 그러면 시간은 내 안으로 스며들지 못한 채 바깥으로 흩어진다. 잠들지 못하는 공허한 지속을 벗어나려는 무망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은 이어진다. 시간을 손으로 세어보지만 시간은 손에서 새나간다. 오늘은 이제 그만 마무리하고 내일의 힘을 비축하려고 잠을 청하지만 생각의 꼭지를 잠글 수 없다. 생각들의 소음이 속삭인다. 침묵 속에서 박동소리가 들려온다. 다시 의자로 돌아가 앉을 힘은 없는데도 밤이라는 치유의 시간은 속절없이 낭비된다. 짧은 삶의 시간을 비웃는 광년의 조소가 들려온다. 숨은 거칠어지고 잠들지 못하는 밤은 길어진다.

죽음은 풍화작용이다. 쓸 수 있는 시간은 언젠가 멈출 것이다. 나는 언젠가 언어가 지닌 포착의 힘을 박탈당하고 말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를 거쳐 흘러나오는 언어도 끊길 것이다. 그러나 쓰는 자는 죽음과 독특한 거래를 할 수 있다. 사후의 삶을 작품에 걸어보는 것이다. 그러려면 자신의 작품과도 밀약을 맺어야 한다. 작품을 써내는 것은 작가이지만, 작가가 작품에 속하는 것이지 작품이 작가에게 속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작품과 이런 밀약을 맺기로 한다. 그리고 작품에 헌신하기로 한다. 나는 지금의 불안을 미래의 작품으로 보상받는 회로를 만들어본다.

그리고 이따금 그런 밤에 여행을 계획한다. 여행이 그저 일탈이어서가 아니라 이처럼 불안케 만드는 시간의 반대 형상을 지녀서다. 여행의 시간은 신축적이다. 충만하며 내게 밀착되어 있다. 불안한 나는 상상 속에서 지금의 버거운 시간을 여행의 시간으로 옮겨놓는다. 내 불안을 자원으로 삼아 지금의 작업에 몰입할수록 그 불안의 시간에서 벗어나 여행하는 시간은 늘어난다.

이것이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인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쓰고, 다니는 나로서는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