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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26호] 문화권력과 한국사회

 

 

문화권력과 한국사회

 

홍성민 / 동아대학교 정치학 교수

 

 

베버에 기대어 보면, 권력이란 갑이 을로 하여금 을이 원하지 않은 일을 하도록 강제함으로써 갑의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몇가지 의문이 생긴다. 첫째 갑이 을을 강제하는 방식은 무엇일까 ? 물리적 폭력이 가장 손쉬운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갑이 지속적으로 폭력을 행사한다면 을은 오래 견디지 못하고 저항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성공적인 권력관계는 을이 자발적으로 순응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 져야 한다. 이것은 권력관계에서 지배의 정당성을 문제 삼는 것이다. 둘째 을에게 강제하는 갑의 욕망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인가 ? 또 을이 애초에 가지고 있던 욕망은 무엇이며, 원하지 않았던 욕망은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는가 ? 갑과 을의 욕망이 생리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권력관계는 무한대의 상황으로 확대될 것이다. 그런데 갑과 을의 관계를 경제적 이해관계로 조망해 본다면 갑과 을의 욕망은 자본주의 사회구성체 안에서 발생하는 구조적인 문제가 된다. 갑을 자본가, 을을 노동자라고 설정해 본다면 갑과 을의 욕망은 임금을 두고 벌이는 충돌현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권력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형태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들이 저항하지 않는 이유

 

대체로 지배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것은 17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정치학 전통에서 유래하는데, 이때 권력은 형식적 절차로 이해된다. 다시말해서 헌법적 질서를 존중하고, 민주주의의 절차를 준수하는 것이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런데 이렇게 절차민주주의를 강조하게 되면 사회형태속에서 은밀하게 내장되어 있는 경제적 착취구조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18세기에 등장한 맑시즘이 바로 자유주의 정치를 부르조아의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권력현상의 근저에는 경제적 소외와 착취가 존재하는데, 형식적 민주주의만으로는 이처럼 은폐된 지배현상을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착취의 문제를 경제구조의 차원에서만 분석하게 되면 자본주의 착취 매카니즘을 받아 들이는 노동자의 의식을 이해하기 어렵다. 예를들어 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착취받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저항하지 않을까 ? 20세기 초반까지 맑시즘의 전통은 노동자들이 단결하지 않는 이유를 그들의 허위의식에서 찾았다. 즉 노동자들이 자신의 계급의식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 즈음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서유럽의 노동자 정당이 점차 쇠락하면서 노동자들이 계급배반 투표를 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즉 노동자들이 착취에 대한 인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보수정당에 표를 주는 것이다. 왜 그럴까 ?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네오 맑시즘이 내세운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이라는 주장이다. 지배현상의 근거가 반드시 경제적 토대로 환원될 수 없으며, 권력의 효과를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수준에서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체로 포스트 모던이즘 계열의 이론가들, 예를들어 알튀세, 푸코, 라깡, 부르디외, 지젝 등의 이론적 성과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권력을 문화현상과 연결지우게 된 계기가 이 지점이다.

 

 

노동자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

 

알튀세는 자본주의가 재생산되는 이유를 노동자들의 의식이 재생산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18세기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재생산이란 육체노동자들이 먹고 살면서 다시 육체노동을 제공할 수 있는 과정을 의미했다. 그러나 20세기 접어들어 육체노동보다는 정신노동이 중요해 진 상황에서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이유는 노동자들이 부르조아가 만들어 놓은 질서와 규범에 복종하는 과정이 재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노동자들의 의식이 재생산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역활을 하는 것이 바로 학교와 가족이다. 중세의 교회가 담당했던 역할을 20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학교가 수행하게 된 것이다. 학교를 통해서 자율과 경쟁의 논리가 학생들에게 주입되고, 능력에 따라서 직업과 보수가 결정된다는 부르조아의 이데올로기가 주입된다. 이 과정에서 노동과정의 착취와 계급적 차별은 학생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뿐만 아니라 학교는 학생들에게 일정한 태도와 성실성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인간형을 만들어낸다. 또 상품광고, 영화 등이 확산시키는 상징적 질서는 노동자들에게 상품을 소비하고 싶은 욕망을 주조한다. 이런 식으로 주체는 호명되고, 왜곡되고, 조정당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알튀세는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라고 이름붙인 바 있다. 이러한 알튀세의 문제의식은 적어도 1990년대 이후 소비사회로 진입한 한국사회에서 문화권력의 횡포를 분석하는데 커다란 교훈을 준다. 영화, 광고, 학교에서 전개되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개인의 일상속으로 스며들어 노동자 계급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방식을 분석하는데 매우 유용하기 때문이다. “귀하가 사는 집이 귀하의 품격을 말해준다는 상업광고가 단순히 상술의 차원이 아니라, 계급의식의 차원에서 분석될 필요가 있다. 또 신자유주의적 학교개혁이 단순히 교육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재생산을 공고히 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육체의 사회적 관리

 

알튀세의 이데올로기론은 1960년대 상황에서는 매우 파격이었다. 적어도 전통적인 맑시즘이 흐름에서 보면 이단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로부터 프랑스에서는 정치권력의 논의가 정치사상사의 범위를 넘어서, 역사, 사회학, 정신분석학으로까지 확장되기 시작한다. 여기에 큰 역할을 한 대표적인 사람이 푸코이다. 그는 알튀세가 암시적으로 제시한 육체의 통제과정을 훈육이라는 관점에서 정교하게 설명한다. 물론 지배의 형식을 육체의 관리와 가장 먼저 연결시킨 학자는 베버이다. 그가 <유교와 도교>라는 책에서 한사회의 지배구조가 몸짓과 관련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베버에게는 예절형식이 지배의 정당성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혹은 주체의 형성과는 어떤 맥락에서 닿아 있는지가 명쾌하지 않았다. 즉 종교를 단순히 금욕주의 모델로 한정하고 규제장치 정도로 이해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푸코는 알튀세와 베버를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연결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학자이다. 적어도 푸코에게 육체의 관리란 문화적 권력을 확산시키고, 시대의 변천에 따라 조응하는 인간형을 만들어 내는 장치들을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야스가 <문명화 과정>에서 수행했던 몸짓의 변화사를 푸코는 권력의 관점에서 보다 구체화 했던 것이다. 권력의 효과가 인간의 육체위에 각인된다고 할 때 우리는 구체적인 몸짓과 거동 혹은 수줍음 등이 시대에 따라서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한국현대사를 구획하는 기준을 새롭게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통상적으로 일제강점기,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 군사독재 정권, 문민정권 과 같이 정치권력의 등장을 기준으로 시대구분을 해 왔다. 그러나 한국민이 유지하고 있는 육체의 관습에 초점을 맞추면 정권의 변화와는 다른 기준으로 문화권력의 변화를 추적해야 할 것이다. 즉 일제강점기를 폭력적 권력의 시기, 박정희로부터 80년대의 군사독재 시기를 훈육적 권력의 시기, 1990년대 이후를 소비적 자아의 시기, 2000년대 이후를 분열된 자아의 시기등으로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또 이시기에 조응하는 지배담론의 변화를 연결시켜 보면 상징투쟁의 면모가 보다 확실해 질 것이다.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역사해석을 두고지식담론의 투쟁이 치열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날 보수와 진보의 대립은 세계관의 대립을 넘어서 민중들의 습속을 관리하는 상징권력-지식담론의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 즉 오늘날 한국사회는 인간의 육체와 습속을 지배하는 연성권력이 생활세계를 지배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있다. 이것을 극복하는 방안을 찾아내는 것이 진보정치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제는 과거 1987년이나 1997년에 한국 사회가 맞이했던 법적이고, 제도적인 개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과제이다.

한편 푸코의 분석은 고대 그리스부터 19세기 서유럽 자본주의 사회분석에 머물고 있다. 20세기 자본주의 사회의 실제 모습은 분석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라는 책은 육체의 사회적 관리라는 주제를 현대사회와 접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끌만하다. 특히 부르디외는 소비취향이라는 주제를 계급지배와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사회에 주는 시사점이 매우 크다. 특히 부르디외가 설명한 중간층의 특성에 주목하고 싶다. 그는 중간층이 광범위한 계층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 중에서 하층계급으로부터 상승해 온 중간층의 경우와, 상층계급으로부터 하락해 온 중간층의 취향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어린시절부터 금욕과 성공에 대한 열망을 통해 계급 상승을 이룬 경우인데, 이들의 특징은 더 높은 성공을 성취하기 위해서 현실에 대해서 금욕하고, 정치적으로는 보수화된다고 한다. 한편 후자의 경우는 과거에 누렸던 경제적 윤택함이 아직도 잔존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현실에 대해서 보수적이 된다. 한국사회에서 경제발전과 정치민주화의 내실을 다지기 위해서 그동안 중간층에 거는 기대가 많았는데, 실제로 한국의 중산층이 점차 보수화되어 가는 상황을 지켜 보면서, 이러한 역행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부르디외의 통찰이 유용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사회통합의 열쇠는 중간계급의 정치적 표심에 달려 있는데, 이들이 보수화되고 있다는 것은 향후 한국사회의 미래에 긍정적이지 않다. 따라서 중간층의 마음의 구조를 이해하고 그들의 정치적 가치관을 진보적인 것으로 유도하는 것이 진보정치의 과제라고 하겠다.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문화권력의 횡포는 소비주의, 성공주의, 경쟁주의로 촉발되었는데, 이제는 그 위력이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다. 급속하게 증가하는 자살율, 성범죄, 왕따의 문제 등이 이러한 상황을 웅변해 주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단순히 범죄사회학, 교육학, 아동심리학의 시각이 아니라 마음의 정치학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다시말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등장하는 병리현상들이 이른바 3차원적 권력(상징적 권력) 부작용이며,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향후 한국사회에서 실질적 민주화를 정착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