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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26호] 민주주의가 어쨌다구?

 

 

민주주의가 어쨌다구?

 

 

최영화/중앙대 문화연구학과 박사수료

  

 

한 고등학교 교사가 학생들에게 묻는다. “너희들이 생각하기에 독일에서 또 다른 독재정권이 등장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니?” 아이들은 주저 없이 답한다. “그런 일은 이 나라에서 다시 발생할 수 없어요.” 그러나 단 일주일 만에 이들의 믿음이 완전히 무너진다. 2008년 독일에서 개봉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영화 <디 벨레(Die Welle)>는 실제로 한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일주일간의 파시즘 수업과정과 그 결과를 충격적으로 재현한다. 애초 민주주의의 미덕을 가르치기 위해 기획된 체험학습이었으나, 점차 권력과 군중심리에 도취된 아이들이 파시즘 운동에 열정적으로 동조하게 된 것이다.

히틀러와 제3제국의 몰락 이후, 나치에 관한 긍정적인 묘사를 철저히 금기시하고 있는 독일에서 만들어진 이 영화는 단지 나치즘을 비판하거나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대신 지난 세기 파시즘의 만행을 목격한 후에도 오늘날 다시 파시즘이 등장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단순한 영화적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해있고,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좌파에 대한 대중들의 냉소와 반감이 높은 현 상황은 과거 유럽과 아시아에서 파시즘과 독재정권이 등장하는 데 조건이 되어준 사회경제적 상황과 유사한 면이 있다. 게다가 독재와 파시즘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청년세대들은 그에 대한 경각심마저 거의 갖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파시즘의 도래를 우려하는 것은 결코 기우가 아닌 것이다.

 

영화 속 파시즘 수업에서는 배제를 통한 집단화를 학습한다. 수업 첫날 교사는 성적순으로 좌석을 재배치해 우열을 가린다. 그것이 집단을 위해 더 좋은 방식이라고 설명하자 대부분의 학생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지침에 따른다. 이 결정에 반발한 한 학생만이 교실을 박차고 나갈 뿐이다. 여기서 서열화자체보다 더 큰 문제는 그것이 어떤 집단을 위해 더 좋은 방식인가를 묻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다수의 결정에 따르는 것은 분명 민주주의의 미덕이지만, 그 결정에 의해 소수가 배제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어떤 집단주의’, 더 나아가 전체주의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이 쉽게 간과된다.

히틀러가 민주적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총통의 자리에 올랐듯이, 학생들의 동의를 얻어 집단의 수장이 된 교사는 즉시 자신의 허락 없이는 발언을 할 수 없도록 규제한다. 그 밖에도 여러 집단활동을 통해 구성원들이 집단의 위력을 체감하게 만든다. 나치가 히틀러 유겐트를 조직해 운영한 방식처럼 학생들이 권위에 복종하고 권력을 내면화하도록 훈육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다수의 동의를 얻어 진행되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이 강압적이라고 느끼지 못한다. 이 또한 다수의 동의가 반드시 민주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수업 이틀째 되는 날에는 복장을 통일하고 조직의 명칭을 물결이라고 지어 집단의식을 갖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유니폼 입기를 거부한 또 한 명의 학생이 왕따를 당해 자연스럽게 수업에서 배제된다. 이런 식의 배제와 추방을 통해 집단의 내적 일체감은 더욱 공고해진다. 교사의 권위에 순응하던 아이들은 이제 자발적으로 조직을 상징하는 로고를 만들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매체인 마이스페이스에 클럽을 개설해 온라인상에서도 항시 집결한다. 나치 식 경례처럼 그들만의 인사법까지 만들자, 아이들은 강렬한 집단의식에 도취돼 패거리를 이루어 다니며 거침없이 행동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영화 속에서 파시스트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주체가 바로 10대 청소년들이라는 것이다. 파시즘 실험에 참가한 학생들은 집단의식과 집단행동이 세상에 무관심하고 무기력하던 자신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음을 인정하며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집단에 소속됨으로써 원자화된 주체로서 느끼는 불안감이 일부 해소되고, 개인적인 경쟁관계가 유대관계로 봉합됨에 따라 소외감을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배타적 동질감을 통해 집단정체성을 재구성할 수도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주로 배제된 자들이 집단에 소속되길 열망한다. 애초에 아무런 전망이 없는 사람들, 상황이 나아지든 나빠지든 앞으로도 계속 그 상태로 남아있게 될 사람들을 바우만(Zygmunt Bauman)잉여라고 일컫는다. 그에 따르면, 잉여는 경제발전과 지구화가 만들어낸 불가피한 산물로서, 생산에 전혀 기여하지도 않고 참여하도록 요청 받지도 않는 사람들을 통칭한다. 존재하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이 배제된 존재들의 불안과 공포가 타인에 대한 배제를 조장하고, 이것이 잠재적으로 새로운 인종주의와 극단적 민족주의, 파시즘을 소생시킬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정치철학자 아렌트(Hannah Arendt)도 실천적이론적으로 전체주의가 반복될 수 있다고 보는데, 그 잠재적 원인을 잉여 존재의 만연에서 찾는다. 실업, 인구과잉, 사회적 아노미, 정치적 불안과 같이 개인을 쓸모없는 존재로 만드는 현상들이 전체주의적 해결방식에 대한 유혹을 부추긴다는 것이다(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이러한 논의들은 높은 실업과 사회적 부정의, 정치적 환멸이 만연해 있는 현재 한국사회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좌빨이라는 용어가 유대인의 별처럼 낙인의 인장으로 쓰이며, 국민에 대한 국가의 사상 통제와 감시가 일상화되어 있음을 매일 목도함에도 그럴 줄 알았다혹은 그래서 어쩌라고식의 냉소적 반응이 팽배해있지 않은가. 최근 한국사회에서 끊임없이 논란을 야기하고 있는 극우 성향의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와 같은 극단적인 냉소주의 집단은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배양된 것이다. 맑스주의 철학자 발리바르(Etienne Balibar)도 유럽에서 네오파시즘의 형성을 지켜보며, “노동과 소비로부터의 배제든, 신분과 인정(認定)으로부터의 배제든, 전망으로부터의 배제든 간에, 배제된 청년들에게 민주주의란 공허한 말이 될 위험이 크다”(발리바르, 대중들의 공포, 2007)고 지적한 바 있다. 일베 사용자들의 민주화에 대한 조롱이 그 적절한 예가 될 수 있겠다. 이들에게 민주화란 자신들을 일베충으로 매도하는 배타적 논리일 뿐이다. 그래서 민주화 당했다라는 표현에는 스스로를 피해자로 위치 지우려는 의지가 드러난다. 일베 회원들이 사회의 지배층이 아니라 여성과 동성애자, 이주노동자, 전라도 출신자 등 소수자들에게 밑도 끝도 없이 혐오감을 드러내고 민주화에 대한 조롱을 일삼는 것을 일베충들의 찌질한 유희 정도로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배제된 자들의 배제심리가 언제든 새로운 파시즘의 동력으로 결집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한 주간의 파시즘 실험은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다. 스스로 권력을 가졌다고 오인한 교사는 자신이 폭력적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학생들 또한 물결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에게 공공연히 폭력을 행사하는 지경에 이르자 교사가 학생 전원을 체육관에 소집시킨다. 그 자리에서 아이들이 조직을 배신한 한 학생을 공개처단하고 싶어 하자 교사가 묻는다. “주초에 했던 질문을 기억하나? 독일에서 독재가 다시 한 번 가능할 수 있을까? 지금 여기서 발생했구나. 파시즘이.”

 

그러나 그가 실험의 종료를 선언하자 아이들이 저항한다. ‘물결이 해체되는 순간, 조직원으로서의 정체성이 붕괴되고 그들은 다시 무력감에 빠진, 별 볼 일 없는 십대 청소년으로 되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돌아갈 곳이 물결뿐인 한, 이 파시즘 실험은 실패한 것이다. 그래서 조직되지 않고 구조화되지 않은 대중, 절망적이고 증오로 가득 찬 대중이 파시스트 조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연대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파시즘의 도래를 막기 위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상은 케케묵은 부르주아 정치에 대한 경멸뿐만 아니라 좌파에 대한 반감으로 언제든지 파시즘 운동에 동조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배제된 대중들이다. 일베 게시판에 학위와 자격증을 인증해가며 스스로를 통상적인 잉여와 구별 지으려는 이나, 자살한 조부의 사진을 찍어 게시하며 존재감을 증명하려는 소년은 모두 어떤 면에서 스스로 배제되었다고 느끼는 자들이다. 쉼 없이 분란을 일으켜서라도 세상에 존재를 입증하고자 하는 자들, 그들을 박멸해야 할 벌레 정도로 여기는 한, 파시즘은 어떻게든 오고야 말 것이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발생한 역사적 파시즘만이 파시즘인 것이 아니다. 파시즘을 과거에 이미 발생했고, 얼마든지 다른 양상을 띠며 반복될 수 있는 대중운동으로 보는 편이 역사의 실패로부터 배우는 한 방식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파시즘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따위의 천진한 구호를 쉽게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주도한 파시즘과 똑같은 것이 발생할 가능성이 없다고 하더라도, 조건만 갖춰진다면 그보다 더 유연하면서도 더 강력한 형태의 파시즘이 출현할 가능성은 잠재해 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오늘날 한국에서 파시즘이 가능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봐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