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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27호]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 문법: 백남준, '음악의 전시'에서 '포스트-비디오아트'까지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 문법

백남준, ‘음악의 전시에서 포스트-비디오아트까지

 

 

 

이광우_백남준아트센터도슨트

 

 

 

백남준은 비디오아트의 아버지?

1963, 독일의 부퍼탈(wuppertal)에 위치한 파르나스 화랑(Galeire Parnass)에서 세계 최초의 비디오 아트 전시회이자 백남준(1932~2006)의 첫 개인전이 개최되었다. 제목은 <Exposition of Music - Electronic Television(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 제목의 앞 글자를 합하면 Expel. 백남준은 무엇을 추방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새롭지 못한 모든 예술양식 이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혹은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와 같은 피상적인 명칭으로 각인되어 있다. 물론 백남준과 TV가 강력한 연관관계를 맺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를 단순히 비디오 아티스트라는 명칭으로 이해하는 것은 책의 서평만으로 책을 평가하는 것과 같다. TV는 새로운 예술양식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도전했던 백남준의 여정 안에서 평가되어야만 하며, 이를 위해서는 그의 발자취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음악의 전시’, 백남준의 첫 번째 예술 세계

백남준의 첫 번째 예술여정은 다름 아닌 음악이었다. 사실 백남준과 음악의 관계는 많은 이들이 의아해하는 사실 중 하나다. 하지만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작곡과 피아노에 대해 깊은 조예를 보였으며, 도쿄대 미학과 졸업논문 또한 <아놀드 쇤베르트 연구>였다. 이후 뮌헨대에서의 전공도 음악사학 이었고, 프라이부르크 음악예술대학에 등록하여 공부를 이어갔다. ‘음악은 백남준의 예술적 시작점인 셈이다. 그러나 백남준은 음악이 유지해왔던 양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가 많은 영향을 받았던 아놀드 쇤베르크의 작업도 이미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백남준은 음악의 범위를 확장하기에 이르렀고, 이러한 경향은 1957년과 58년에 열린 다름슈타트 국제현대음악 하기강좌에서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 1928~2007)과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를 만난 후부터 가속화 된다. 그렇다면 음악의 범위 확장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 1963, 독일 부퍼탈

▲ <총체피아노, Klavier Intégral, manipulated piano with various items >, 사진 만프레드 몬트베(Manfred Montwe)

 

 

백남준의 첫 전시회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으로 돌아가 보자. 어색한 단어의 조합이 눈에 들어온다. 음악이 전시되는 것이었던가? 음악은 전시가 아닌 연주되는 예술형식이다. 음악은 사실상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귀로 듣는 것이다. 백남준은 과감하고 파격적이게도 음악의 전시라는 표현을 썼다. 이 전시에서 백남준은 피아노에 기계적 장치와 잡동사니 같은 장식을 더한 총체 피아노를 전시하는데, 예를 들어 건반을 두들기면 둔탁한 타악기 소리가 나거나 전등이 켜지고, 모터가 작동하는 식이다. 백남준에 의해 피아노는 더 이상 청각만을 위한 평면적인 악기가 아니라, 시각과 촉각 등 총체적 감각을 요구하는 입체적 도구가 되었다.

63년을 전후로 백남준의 예술적 시기를 나누어 본다면(, 비디오 아트 전후), “총체 피아노는 백남준이 대표적 예술가로 참여했던 플럭서스(Fluxus) 운동 속에서 선보였던 퍼포먼스의 연장선이다. 피아노 2대를 부수고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른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구>(1960), 머리를 붓 삼아 퍼포먼스를 펼쳤던 <머리를 위한 선>(1962), 바이올린 2대를 부셔버린 <바이올린 솔로를 위한 독주>(1962)는 사실상 온몸으로 표현한 음악이며, 악기의 쓰임을 완전히 바꾸어버린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현대예술의 거장들이 플럭서스에 속해 있었고, 실제로 현대라는 단어가 붙은 예술사조에 많은 영향을 미친 플럭서스였지만, 하나의 양식이라기보다는 예술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예술이다라는 기치를 내건 느슨한 국제 예술운동이었다. 악보대신 스코어라 불리는 공연설명서를 사용했고, 퍼포먼스 중에는 어떠한 우연적 요소(해프닝)들이 발생할지 몰랐으며, 퍼포먼스 자체도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일회적 성격을 지녔다. 관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했다는 점도 특징이다.

머리에 먹을 발라 그림(혹은 글씨, 혹은 그냥 행위)을 만들고 피아노에 전등과 모터를 달아 전시한다? 바이올린을 끈에 묵어 끌고 다니거나, 천천히 들어 올리다가 내려쳐서 산산조각 낸다? 그리고 이 파격적인 행동을 하는 조그만 동양인이 동양에서 온 문화테러리스트라는 악명일지라도, 서양에서 이름을 알려간다. 딱히 무엇이라고 정의내릴 수 없는, 그리고 이해가 될 듯 말듯 우리를 고민에 빠트리는 이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이 하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마법의 단어이다.

 

세계의 모든 요소들을 예술의 이름으로

모더니즘은 기존 형식에 대항하는 새로운 형식을 생산했지만, 그 새로운 형식에서 탈피하지 못해 스스로 보수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새롭게 탄생하는 순간 이미 옛 것이 되어버리는 양식의 운명이다. 새로운 문으로 들어가 그 문을 닫는 순간, 이미 옛것이 되어버린다. 유일한 해결책은 새로운 문을 끊임없이 열어나가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가 매력적인 이유는 우리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장벽들을 허물어 버리고, 이 세계의 모든 요소들을 예술의 이름으로 재탄생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수많은 비판과 아류작에 마주하더라도 말이다.

다시 63년의 전시로 돌아가 보자. 거칠게 구분하면 백남준이 수많은 퍼포먼스를 펼쳤던 시기가 전기, TV와 같은 기계-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시기를 중/후기 로 볼 수 있다. <전자 텔레비전> 이라는 제목처럼 백남준은 13대의 TV수상기를 바닥에 엎어놓거나, 전기적 조작을 통해 선, , 혹은 단순한 움직임을 표현하면서 비디오 아트의 시작을 알렸다. TV를 포함한 기계-기술들이 예술가들의 새로운 도구이자 오브제, 캔버스가 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마르셀 뒤샹은 이미 비디오 아트를 제외하곤 모든 것을 다 이뤄놓았습니다. 그는 입구는 커다랗게 만들어 놓고, 출구는 아주 작게 만들어 놓았지요. 그 조그마한 출구가 바로 비디오아트입니다. 그리로 나가면 우리는 마르셀 뒤샹의 영향권 밖으로 나가는 셈입니다”. 1974년 어느 인터뷰에서 했던 백남준의 말이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1887~1968)이 남성 소변기 <>(Fontaine)을 미국의 앵데팡당 전에 출품했던(당시에는 전시거부 당했지만) 1917년은 레디 메이드(Ready made)된 오브제가 예술의 지위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해였다. 이제 세상의 모든 것은 예술이 될 자격을 얻었다. 재현은 더 이상 예술의 절대적 잣대가 될 수 없었고, 작품은 끊임없이 자신의 의미를 주장해야 했다. 예술가들은 금을 찾아 끊임없는 실험을 거듭했던 연금술사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TV, 비디오카메라 등 현대문명의 이기들은 백남준을 포함한 현대 작가들에게 전에 없는 기회가 된 것이다.

아마도 1961년의 어느 날 이었을 것이다. 29세의 백남준은 TV라는 이 신기한 기계로 예술을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것이 뒤샹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유일한 문이었음을 알았기에, 백남준은 61년부터 약 2년 간 전자공학 연구에 집중한다. 그 결과물이 63년에 등장한 13대의 TV수상기 이다. 이 수상기들은 단순히 이제 TV도 예술임을 주장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의 아류작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TV수상기 들은 새로운 그릇에 담길 수 있는 예술형식을 끊임없이 시도하기 위한 출발점이었다. 우리가 백남준을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현대 예술의 거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TV를 이용한 그의 작품들이 역사적으로 최초의 시도였을 뿐 아니라 미술사적 맥락에서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고, 무엇보다 현대사회와 매체 사이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예술의 이름으로 표현해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교감하는 백남준의 예술세계

TV의 시대로 넘어온 백남준의 작품들은 끊임없이 진화했다. 1965년 소니의 최신 캠코더 포타팩(Portapak) 을 구입하여 교황의 뉴욕 방문 장면을 촬영한 것을 시작으로, 물리적 조작에 의한 단순한 이미지 표현을 넘어서기 시작한다. 그 초기 형태로 <전자 오페라 No.1>(1969)을 선보였고, 1970년에는 일본인 공학자 슈아 아베와 함께 아날로그 영상 편집기인 <-아베 신시사이저>를 직접 제작하여 <비디오 꼬뮨>(1972), <글로벌 그루브>(1973)와 같은 백남준 특유의 영상 편집 형태를 보여주었다. 이후 1984년에는 세계최초의 위성 퍼포먼스인 <굿모닝 미스터 오웰>(뉴욕과 파리를 연결했고, 이 모습은 전 세계에 생중계되어 25백만명이 시청했다)을 제작하여, 매체를 통해 전 지구인이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꿈꾸었다. 우주 오페라 3부작 시리즈 중 하나인 이 작품을 통해 그는 1972년에 주장했던 Electronic Super Highway(전자 초고속도로. , 지금의 인터넷)의 가능성을 보았을 테고, 조지 오웰의 우울한 예견이 옳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백남준의 예술세계는 비디오 아트에서 멈추었을까? 2000년에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에서 그는 레이저 아트인 야곱의 사다리를 선보였다. Post-비디오아트라 생각할 수 있다. 음악에서 행위예술로, 이후 전자기술을 이용한 전자음악, 비디오아트, 위성아트, 레이저 아트에 이르기 까지. 그 스스로 이루어놓은 양식과 소재에 얽매이지 않는 탐구정신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고 끈질기게 노력했는지를 말해준다. 모든 것이 규격화, 정형화 되어 숨 쉴 틈조차 없어 보이는 현대문명. 그러나 문득 생각해보면 우리는 스스로를 맞춰진 틀에 가두어 놓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사회의 구조적 견고함을 깨부수어야한 할까? 글쎄, 백남준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정신은 아직도 새로운 탑을 세워질 공간이 충분하다고 말한다.

 

세계의 역사는 우리에게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꿀 수 있다고 가르쳐준다.” (백남준, 1992)